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89)화 (174/197)

기껏 배려해 준 사람이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원하던 이야기가 나온다면 이쪽에선 전혀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언은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 그렇긴 하다만.”

“강경하게 나가야 합니다. 조익환의 수배령을 강화하십시오. 지레 겁을 먹고 입궐하지 않고 있는 대신들은 모조리 반역죄로 추포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걱정 말게. 안 그래도 그리 지시하였으니.”

“또 직제학 영감들이 직접 찾아오신 증좌를 대어 훙서하신 세자빈 마마들의 사인이 타살이었음을 널리 알리셔야 합니다. 그리한다면 성균관 유생들이 궐 밖에서 이끌고 있는 여론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모은 증거들을 조익환을 잡았을 때 그의 죄상을 드러내는 데만 쓰기보다는 맞불 작전을 놓자는 의미였다. 언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한참 동안 머리를 맞대고 조익환이 가진 병력의 규모와 이에 따른 대응책들을 생각했다.

“그럼 남은 문제는 앵속각입니다. 그동안 소인은 상단을 통해 앵속각을 재배하는 곳들을 발견하는 즉시 불을 내어 모두 태워 버리라 하였습니다만, 그리하여 모조리 정리를 하였는데도 어째선지 공급량이 전혀 줄어들질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혼미하게 만드는 문제의 약초를 정리하는 데는 세자인 언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쉽지 않았다. 손쉽게 백성들에게 스며들어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아무리 단속한들 작정하고 암암리에 퍼트리는 자들을 막기는 어려운지라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그때 도겸이 의견을 내었다.

“하여 소인의 생각으로는 혹, 저들이 앵속각을 기르기가 비교적 쉽다는 점을 악용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만 듣던 언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르기 쉬운 점을 어찌 악용한단 말인가?”

“땅이 아닌, 배 위에서 기른다면 어떻습니까?”

“무어?”

“바다는 물살의 변덕이 심하다는 것만 빼면 무엇이든 숨기기 좋은 곳이 아닙니까. 게다가 바다 위에 떠 있다면 꽃을 기르기 위한 햇볕도 충분할 테지요.”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다. 언은 저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면, 당장 각 수군에 파발을 보내야겠구나.”

“배를 타고 드나드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목격자에게는 후한 포상을 내리겠다, 그리 방을 붙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청을 잃은 상실감에 폐인이 되어 있다고만 생각했건만, 도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의연하고 다부졌다. 괜한 걱정을 한 듯싶어 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의견을 묻는 영서(令書,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내리는 교서)라도 내리려던 참이었는데, 자네와 이리 가감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듯해.”

“소인이 저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자네가 소인이 아니라 소신이었다면 국본이나 되는 내가 서촌까지 올 필요도 없이 규장각으로 갔을 텐데 말이지.”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그만 궐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부쩍 어깨가 무거운 언은 느릿느릿 일어나 괜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송구합니다, 저하.”

대문 앞까지 배웅을 나온 도겸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못내 안타깝고 불안한 언은 전처럼 집 주변에 호위를 단단히 심어 둬야겠다 마음먹었다.

“너무 그 얼음 샘 옆에 있지 말게. 함께 얼어 버릴지도 모르니.”

“유념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벗을 잡아다 동궁에 가둬 놓고 다시 살이 오르게 음식을 마구 해다 먹이고 싶었다. 야위어도 늘 심지가 굳어 그다지 불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건만, 오늘만큼은 도겸의 의연함이 어쩐지 시늉만 하는 것같이 보였다. 그리 생각하느라 말에 올라타 말을 다루는 것도 어쩐지 굼뜨기만 했다. 말도 언의 마음을 아는지 느릿느릿 움직였다.

“설마 더 놀고 싶으신 것이라면 아니 됩니다. 서두르십시오.”

결국 도겸이 공손하게 쫓아내고 나서야 언은 돌아설 수 있었다.

“어쩐지 더 매정해진 것이….”

꼭 청이 같다고 하기엔 도겸이 더 힘들어질까 뒷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애꿎은 말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리고 날쌘 말은 언을 금방 서촌 골목 밖으로 이끌었다.

“…아무리 은애한들 그런 점은 닮아 가면 안 되는데 말이지.”

궐로 돌아가는 내내 언은 부디 청이 다시 돌아오길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저리 단단한 제 벗이 언제 메말라 무너져 버릴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

불면의 밤이 길어졌다. 텅 빈 집에 홀로 남아 불안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까만 허공을 바라보던 도겸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았다. 습관적으로 늘 남산댁이 채워 두던 주전자를 더듬거리다 이내 헛수고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혼자였음에도 행색을 흐트러트리지 않은 도겸은 겉옷을 걸치고 부엌으로 가려 빈 주전자를 들고 사랑을 나섰다.

“…….”

“……!”

그리고 문을 나서자마자 휘영청 달빛이 비추는 마당에 가만 서 있던 하얀 여인과 마주쳤다. 어찌나 놀랐는지 도겸은 그대로 사기 주전자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신발을 신을 틈도 없었다. 홀린 듯이 성큼성큼 마루를 내려간 도겸은 정작 여인의 앞까지 다가가 놓고도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꿈인 것이냐?”

취하기라도 했을까. 아니, 그러기엔 아까 언이 가져온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였다. 도겸이 어쩔 줄 모르는 틈에 여인이 답했다.

“아니, 생시야.”

“나를 꼬집어 보… 아니, 아니다. 내가 하마.”

그렇게 묻자마자 퍼뜩 정신을 차린 도겸은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스스로 제 손등을 꼬집었다. 역시 생시가 맞았다.

“그….”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느냐 묻고 싶었고, 왜 저부터 찾아 상의하지 않았느냐고도 따지고 싶었다. 화도 내고 싶었고, 그럼에도 다행이라 안도하며 웃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도겸은 멍청하게도 우두커니 청을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많은 감정과 생각이 뒤엉켜 하나도 제대로 꺼낼 수가 없었다.

입을 달싹이던 도겸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 아프진 않으냐?”

다른 때 같았다면 어깨를 덥석 잡고 이리저리 살펴봤겠지만 어쩐지 조심스러웠다.

“딱히.”

청은 늘상 그렇듯 단답이었다. 그러면서 도겸을 뚫어져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눈으로만 살핀 도겸은 조심스레 물었다.

“허기가 지진 않고?”

“배 안 고파.”

“그럼 아직 밤이 깊으니 안채로 가자꾸나. 이부자리를 봐주마. 이야기는 해가 뜬 뒤에 나누어도 늦지 않으니.”

그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 청을 이끌어 안채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엔 그나마 물을 것이 떠올랐다.

“이리 돌아올 거면서 어찌 그걸 도로 주고 간 것이냐?”

“그…냥. 내 마음이야.”

다소 퉁명스럽게 구는 청을 바라보는 도겸의 눈빛이 짙어졌다.

“상당히 높더구나.”

“뭐가?”

“네가 나를 두고 간 낭떠러지 절벽 말이다.”

“…뭐?”

아직 안채로 가는 중문에 다다르기도 전이었다. 도겸의 말에 우뚝 멈춰 선 청이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낭떠러지라니.”

“두 번째는 나를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한 걸음쯤을 먼저 나아가던 도겸은 느긋하게 돌아서서 제 할 말만 했다.

“청이는 격이 다른 이무기가 감히 제 모습으로 둔갑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었는데, 어찌 모습을 따라 한 것이냐? 그건 좀 의아하구나.”

“그래. 못한다고 했잖아. 근데 왜 날 의심해?”

도겸은 한심한 듯 고개를 저었다. 잠시 그리운 모습을 보았으니 되었다는 생각에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누면 뻔히 들통날 것이니 서로 무의미한 기력 낭비는 안 하는 게 좋을 듯싶구나.”

“…….”

“나를 해치러 온 것이라면 굳이 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지 않느냐? 혼자 있다는 것을 알 텐데.”

확신하는 도겸을 노려보던 청의 눈동자가 세로로 쭉 찢어졌다.

“…제법이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구렁이로 변해 도겸과 거리를 좁혔다.

도겸은 엄습해 오는 위기 앞에 그저 초연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게 본모습이로구나.”

“그래.”

금방이라도 꿀꺽 삼켜 버릴 것처럼 굴던 이무기는 도겸의 싱거운 반응에 김이 샌 듯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렸다.

그리고 뱀을 좋아하지 않는 도겸은 내심 사위가 어두워 다행이라 생각하며 물었다.

“어찌 다른 모습으로 둔갑하지 않는 것이냐?”

“이제 싫어, 인간은.”

“인간이 싫다며 내 앞에 나타난 연유는 무엇이냐?”

“너한테 볼일 있어 온 거 아니거든?”

이무기는 쌀쌀맞게 대꾸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용은 어디 있어?”

“그것은 어찌 묻는 것이지?”

이번엔 도겸이 냉랭하게 되물었다. 전적이 있는지라 방어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청은 지금 샘물과 함께 얼어붙어 무방비한 상태나 다름없지 않나.

한편으로는 이무기가 이 작은 집에서 청의 위치를 쉬이 가늠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기도 했다.

도겸에게 설명하는 게 내키지 않는지 혀를 날름거리던 이무기가 시선을 돌리며 툴툴댔다.

“그야 나보다 격이 높은 존재니까. 용은 그 자리에 있어도 없는 존재나 다름없어. 자취를 쫓을 수 있을 리 없잖아. 모습을 따라 할 수 있던 것도 용이 내 여의주를 품으면서 기운을 넣어 놔서고, 그래서 잠깐은 둔갑할 수 있었지만 완벽하진 못했어. 오래 버틸 수도 없었고.”

새삼 이무기의 입을 통해 들으니 청이 훨씬 더 멀게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는 저와 아예 다른 존재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상기됐다. 평소엔 그저 기척을 잘 숨기는 것이라 여겼건만.

“청이를 찾지 못하는 이유를 물은 게 아니라 어찌하여 찾아왔는지 묻는 것이다. 네가 청이를 해치려는 의도라면 결코 알릴 수 없을 테니 말이지.”

도겸의 경계에 이무기는 똬리 튼 꼬리를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마치 백기를 드는 모양새였다.

“이제 싫다고 한 인간엔 조익환도 포함이니까 걱정하지 마.”

저를 구해 줄 때부터 뭔가 어긋났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와중에 다행인 일이었다.

그러나 도겸은 청이 깨어나지 못하는 상황인 만큼 확실히 하고자 했다.

“어찌하여… 갑자기 심경이 변한 것이냐?”

내키진 않았지만 이무기가 먼저 본모습을 드러낸 이상 거짓을 말할 것 같진 않았다. 도겸은 답을 듣기도 전에 청이 있는 곳으로 몸을 슬쩍 틀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인간의 탈을 쓴 이무기'였으니까.”

스르륵 뒤를 따르는 이무기가 조용히 답을 내놓았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조익환의 딸이 아니었던 거지. 난 딸이라는 이름의 도구였으니까.”

“…….”

“그리고 어쩌면 진짜 조설아도 그랬을지도 모르겠어.”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이냐?”

“은혜를 갚고 싶었던 것뿐이야.”

이무기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아마 순수한 존재가 복잡한 이유를 댔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의심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도겸은 밤공기를 헤치고 안마당에 있는 샘 앞으로 이무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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