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88)화 (173/197)

“무어? 아니, 최 직각… 최도겸!”

무슨 정신으로 그 거친 길을 내달렸는지 모르겠다. 도겸은 빗속을 뚫고 죽을힘을 다해 산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히 산 초입에 언과 익위사들이 묶어 둔 말이 있어 도성 안까지 두 다리로 뛸 필요는 없었다. 잘 훈련된 말은 굵은 빗방울에도 놀라지 않고 도겸을 안전하게 태우고 힘차게 달려 주었다.

“제발… 아니 된다. 안 돼!”

이무기의 말에 따르면 조익환은 일부러 사당패를 부르고, 집마다 연기를 피우게끔 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거센 비에 모든 것이 잠잠해져 있었다. 도겸이 말을 재촉해 큰길을 내지르는 동안 귀를 자극하는 소리라곤 빗소리뿐이었다. 연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어쩌면 청이 무리해서 비를 내린 이유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청아!”

만약 비를 내려 누군가의 흔적을 찾기 쉬워졌다면 한 사람쯤은 찾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집에 데려다 놓았을 것 같아 우선은 서촌의 집으로 돌아갔다. 입구에 다다라 말을 내버려 둔 도겸은 천신만고 끝에 되돌아온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청아! 청….”

“나리!”

도겸을 먼저 맞이한 이는 삼득이었다. 그사이 머리를 다쳤는지 이마를 천으로 질끈 동여맨 채로 비를 맞으며 대문 앞을 서성거리다 득달같이 달려와 맞이했다.

“안 그래도 세자 저하께서 직접 찾으러 가신다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이는 어디에 있나. 보았나?”

“아, 그것이….”

“어서 말하게!”

우물쭈물하는 이를 다그치자 차마 도겸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삼득이 고개를 푹 숙이며 안쪽을 가리켰다.

“아씨는… 남산댁과 순이, 그리고 저희 객주님까지 모두 구하여 돌아오셨습니다.”

도겸은 지체 없이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절벽을 기어 올라왔을 때만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다 생각했으면서 무슨 정신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리!”

그리고 안채 마루에 앉아 있던 화월과 마주쳤다.

“어찌… 몸이 상하신 것입니까?”

만만찮게 고초를 겪었을 여인이 수척한 얼굴로 도겸에게 물었지만 무어라 답할 겨를이 없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남산댁과 순이를 차례로 살피는 동안에도 청이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청이, 청이는 어디에 있느냐?”

도겸의 눈에 제가 전혀 보이지도 않는 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화월이 도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안채 중앙의 샘을 가리켰다.

“아씨는… 저희를 집에 데려다주신 이후 저 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도겸은 즉시 샘의 앞으로 뛰어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안타깝게도 평소 맑기만 하던 샘의 수면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이 만든 어지러운 파문으로 인해 그 안을 살펴볼 수가 없었다.

“…청아.”

“아씨께서 제게 남기신 것이 있습니다.”

직접 들어가 확인하고자 더러운 옷을 한 겹 벗어 내려는 도겸에게 다가온 화월이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처음 도겸이 청에게 사 주었던 푸른빛의 머리 장신구였다. 어쩐지 붉은 핏기가 묻은 머리꽂이를 말없이 받아 든 도겸에게 화월이 덧붙였다.

“아마도 기념품으로 삼긴 어려울 것 같다 하시면서요.”

“…….”

“약조를 어겨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혼에 새긴 것인데 지키지 못하였다고….”

그즈음 비로소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짓궂게 샘물을 두드리며 괴롭히던 빗방울들은 모두 샘물의 일부가 되어 갔다.

“약속하거라. 네 몸을 먼저 아끼기로.”

“…알았어.”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청과 손가락을 걸어가며 단단히 해 둔 약속을 되새긴 도겸은 제 심장이 멎어 버린 듯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설마… 아니 된다.”

갑자기 이끌려 와 한바탕 비를 쏟아 낸 구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리고 있던 하늘을 깨끗하게 비워 냈다. 이내 슬며시 고개를 들이미는 햇살로 사방이 밝아지기도 했다. 밝은 빛은 도겸을 따스하게 감싸 주었지만 정작 그는 더러워진 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뒤 샘물로 들어가려 했다.

“나리!”

화월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도겸은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막 샘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차였다. 도겸을 포함해 샘물까지 밝게 비춘 햇빛 덕에 맑은 물속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리! 저, 저것을 보십시오!”

가까스로 도겸을 붙든 화월이 물속을 가리켰다.

“……!”

깊은 샘의 바닥엔 청이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문제는 심장이 있는 부근은 뻥 뚫린 채 그 자체로 새하얀 얼음 조각이 되어 버린 뒤라는 점이었다.

***

불과 며칠 만에 나라가 환란과 도탄에 빠졌다. 전국 각지에서 화적과 산적이 들끓었고, 통증 완화에만 쓰이던 약재인 양귀비의 오남용으로 중독 증상을 보이는 백성들이 넘쳐났다. 급기야는 약물을 구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다.

“저하, 예안이 좋지 않으십니다.”

유례없는 한낮의 폭풍우가 지나간 이후, 다른 이들을 모조리 안전한 곳으로 보내 둔 도겸은 집을 보살피는 가솔 하나 없이 홀로 서촌에 남아 있었다. 밤늦게 찾아온 언은 황폐해진 집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야말로 여기 혼자 남아 무얼 하는 겐가? 언제 또 기습을 당할 줄 알고.”

그러자 도겸이 옅게 미소 지으며 샘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청이가 아직 저 안에 있지 않습니까. 평소에 나뭇잎 한 장, 꽃잎 한 장 물에 떠 있는 것을 싫어했던 아이인지라 날리는 것들이 쌓이지 않게 돌볼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이에게 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언은 부쩍 핼쑥해진 벗의 몰골이 못내 안타까웠다.

“꽁꽁 얼어 버렸다던 안채의 샘 말이지?”

“예.”

화월이라는 객주가 고하여 언도 알고 있었다. 샘물이 청을 품은 그대로 하얀 얼음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했던가. 이후 바깥의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는 반면 단단하게 얼어 버린 샘물은 도통 녹을 줄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궐 안의 연못이 하루아침에 꽁꽁 얼어 있어서 난리였던 일이 떠오르는군.”

“…….”

어쩐지 시선을 피하는 도겸을 본 언이 짓궂게 웃으며 콕 짚어 물었다.

“그때도 아마 청이 그 아이와 관련된 것이었겠지?”

그리고 차마 거짓을 꾸며 내지 못한 도겸이 순순히 인정했다.

“…예.”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내는 불이 꺼진 안채 마루에 걸터앉아 등 하나만 켜 둔 채로 얼어붙은 샘물을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가 나중엔 사람들을 위해 궐 안팎의 우물들을 모두 정화해 주기까지 하였으니 부쩍 이곳에 정이 든 모양이구나. 냉정하게 생겨 쌀쌀맞게 굴면서 어찌 그리 마음속은 따스한지….”

언은 더없이 고요한 이 순간을 차마 깨지 못하고 애꿎은 술병만 흔들었다.

수심에 빠진 도겸에게 차마 조익환이 지금 반역을 도모해 군사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진군 중이라는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다.

기실 언은 이 혼란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막막해 도겸에게 상의하고자 찾아온 것이었다. 당장 궐 밖에선 성균관 유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유소 행렬을 벌이고 있고, 일찍이 조익환의 편에 서 있던 조정 대신들은 입궐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도성 안팎의 치안은 끔찍한 수준으로 떨어져 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수척해진 벗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아, 청이 그 아이가 간택을 스스로 포기하겠다며 내게 준 게 있었네.”

대신 언은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도겸에게 건네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장식이 반쯤 사라진 갓끈이었다. 뜻밖의 물건을 받아 들고 의아해하는 도겸에게 언이 설명했다.

“처음 내가 청이를 만난 게 야밤의 천변이었다고 이야기한 적 있지 않았나? 그때 웬 소복을 입은 여인이 천변에 코를 박고 있는지라 내가 놀라서 구하려다 그리 만났거든.”

그 말을 들은 도겸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아마도 여인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고 있을 것이었다. 언은 제 설명을 계속했다.

“하필 금혼령이 내려진 이후에 자진하려는 처녀라, 나는 그만 청이가 따로 정인을 두고 간택에 들어야 하는 규수라 착각했던 것이지. 그리하여 그걸 내어 주며 증표로 쓰라 하였었네. 간택에 들어 그것을 내게 보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간택에서 제외시켜 주겠노라, 무턱대고 약조를 하며 말이야.”

도겸은 언이 준 것을 두 손바닥에 올려 두고 가만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데 재간택에서 점희를 먼저 구한 청이가 내게 그것을 내보이더군. 무어 조설아가 입궐하지 않았으니 무의미하다 여겼을진 모르겠으나 굳이 그것을 보인 것은 아마도….”

“…….”

“내가 착각했던 사정이 정말로 일어났던 게 아닐까.”

언은 비로소 도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그 순간엔 그 여인의 눈이 평소와 달랐거든. 그건 확실해.”

언의 이야기에 도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뚫어져라 손안의 것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제 이야기를 아마 이해했을 사내는 한참이나 멍하니 굳어져 있었다. 언은 도겸이 충분히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저하.”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비로소 도겸이 먼저 정적을 깼다.

“곧 도성이 포위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운을 떼는 주제가 언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어?”

분명 언이 이곳을 찾아온 목적이었으나, 의도치 않은 터라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아니, 그야 모르지 않다만.”

직전에 제가 한 이야기는 귓등으로 들었냐는 듯한 표정을 읽은 도겸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하에게 급한 것은 얼음이 되어 버린 청이가 아니라, 언제 궐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반역자들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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