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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87)화 (172/197)

“으… 으악!”

꿈일까? 아님 벌써 죽어 저승에 온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제가 죽고 난 이후에 듣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행랑아범이, 사람의 숨통이 끊어져도 들을 수는 있어서 누군가 죽거들랑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줘야 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땐 이미 죽은 사람이 어찌 듣냐며 허무맹랑하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무렴 상관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따진들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 사이사이마다 들리는 사내들의 비명을 들으며 저승으로 가기엔 이 또한 서러운 일이었다. 눈을 감은 순이가 우울하게 생각할 즈음이었다.

“……!”

우박 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나무판이 벌컥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깊게 판 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빗줄기가 순이의 뺨을 두드렸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시원한 빗물을 맞고 있자니 마치 극락에 온 것만 같았다.

“순이야.”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간절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늘 차분하고 정나미라곤 하나도 없이 쌀쌀맞지만 문득문득 과자 그릇을 밀어 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씨였다.

“내가 늦었어.”

더없이 차가운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그러나 어쩐지 순이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늘어진 몸은커녕 눈꺼풀 하나도 마음대로 밀어 올릴 수가 없었다. 완전히 탈진한 몸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두려움에 떨던 아이는 와락 안겨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아씨는 순이에게 어떤 반응도 채근하지 않았다.

“집에 가자.”

시체처럼 늘어진 순이를 차가운 손이 가볍게 들어 올렸다. 콧구멍으로 맑은 공기가 들어왔지만 거기까지였다. 차가운 빗줄기 사이로 왠지 모르게 뜨거운 뭔가가 느껴졌지만 알 길이 없었다.

어쩐지 아씨의 목소리가 많이 지친 것 같다 생각한 순이는 그대로 완전히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아이는 거대한 용의 발톱에 매달려 무궁한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

참으로 황홀한 꿈이었다.

***

“나리!”

절벽에서 꼼짝없이 떨어지겠다 싶을 즈음 누군가 도겸의 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든 도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범이 어찌.”

일찍이 내쫓은 행랑아범이 절벽 위에 엎드려 다급히 도겸을 붙들고 있었다.

“이, 일단 올라오십시오. 소인도 오래 버틸 수가 없습니다!”

버텨야 하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 도겸은 두말할 것 없이 행랑아범의 거친 손을 잡고 힘껏 위로 올랐다. 대신 도겸의 발 아래로 물에 젖어 부서진 돌무더기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행랑아범이 아니었다면 도겸은 지금쯤 떨어진 돌덩이들처럼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었다.

오래도록 매달려 있었기에 탈진할 것 같았지만 도겸은 가까스로 땅을 딛고 일어났다. 도성 밖까지 나와 버린 터라 어서 가 봐야만 했다.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놓치지 않았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마주 보고 선 사내들은 직전까지 서로를 구하고 구했다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데면데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마찬가지로 다 젖은 행랑아범은 우선 도겸을 그나마 비가 덜 떨어지는 나무 아래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서야 옷소매로 눈앞을 가리는 빗물을 닦아 내며 사정을 설명했다.

“나리께서 말씀하신 대로 멀리 가려 했으나… 그리하지 못하고 천변의 걸인들 틈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다 나리께서 웬 여자에게 붙들려 가시는 것을 보고 따라온 것이지요. 방향만 보고 따라와 한참 찾던 중에 설마하고 내려다본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다소 면이 서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할 틈이 없었다. 과정을 탓하기엔 행랑아범이 아니었다면 속절없이 죽을 목숨이었지 않나.

“어쨌든… 구해 주어 고맙네. 다만 지금 조익환이 본색을 드러내 상황이 좋지 않으니 자네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말게.”

냉정한 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서둘러 산을 내려가려 돌아선 도겸은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길이랄 게 없이 온통 거친 돌부리에 잡초가 무성한 탓이었다. 몇 번이고 기우뚱하며 뛰어 내려가던 그는 결국 멈춰 서서 뒤뚱뒤뚱 따라오는 행랑아범에게 한숨 섞인 투로 물었다.

“…자네는 어찌 그 다리로 이런 길 같지도 않은 길을 올라온 겐가?”

“예? 아니, 무어….”

처음엔 빗속에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제야 행랑아범이 얼마나 허둥지둥 뛰어올라 왔을지가 눈에 보였다. 아마도 몇 번이고 넘어졌을 무릎 부근은 피에 절어 시커멓게 얼룩진 채였고, 걸인들 틈에서 지냈다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건만 걸친 옷가지도 넝마가 됐을 만큼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또다시 복잡한 감정이 몰려온 도겸은 그만 돌아서고 말았다.

“자네는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천천히 내려오게. 많이 미끄러울 테니….”

그 순간 빗속을 뚫고 화살이 날아와 스쳤다. 시커먼 복색의 사내들이었다. 아마도 행랑아범처럼 방향을 잡고 뒤를 따라온 듯싶었다.

“나리!”

행랑아범이 소리치는 틈에 도겸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무기가 날 그런 곳에 두고 간 것이었군.”

혼자 벗어나거나 사람은 저를 쉽게 찾을 수 없어도 추후에 청이만큼은 자신을 찾아올 테니 말이다. 도겸은 시커먼 적들이 재차 활시위를 당길 즈음 행랑아범을 수풀 속으로 밀어 넘어트렸다.

“나리…!”

“거기 숨어 있는 게 내게 도움이 되는 길이니 설령 나 대신 목숨을 버릴 생각은 말게!”

그러곤 도망치지 않고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해 적에게 돌진했다. 활을 쥔 자가 검을 뽑아 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에게서 검을 탈취한 도겸은 주저 없이 달려드는 이들을 하나씩 베어 나갔다.

“어르신께서 저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셨다!”

“죽여라!”

그럼에도 그림자와 같은 사내들은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저를 죽이는 데에 사활을 걸기라도 한 것 같았다.

“으아아아악!”

도겸이 적에게 둘러싸여 홀로 검을 맞댈 즈음, 기어이 튀어나온 행랑아범이 적들에게 마구 돌을 던져 댔다. 덕분에 잠시 흐트러진 적들을 제압하기는 쉬웠지만, 한편으로는 비정상적으로 내리는 비의 범위가 심상치 않게 넓은 게 불안했다.

“내 나오지 말라 했거늘!”

“송구합니다. 하지만 누가 됐더라도 가만히 있진 못했을 것입니다!”

거기다 즉각 전열을 가다듬은 적들이 다시 압박해 왔다. 미처 피하지 못한 칼끝에 전신이 생채기 투성이였지만 도겸은 행랑아범을 등 뒤에 두고 서서 검을 고쳐 쥐었다.

“…어지간하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없게 하려 했건만.”

죽은 자를 지나치기만 해도 귀신같이 냄새를 맡는 여인이 있지 않나. 도겸은 부디 빗물에 모든 게 씻겨 나가길 바랐다.

“시간이 없어 부득이 급소를 베더라도 양해하거라.”

적들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상황이 별수 없음을 합리화하기 위함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도겸이 먼저 검을 내지를 때였다.

“…으악!”

누군가 몸을 숙이며 깜짝 놀란 듯 비명을 내질렀다. 이유는 직후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알아차리게 되었다. 빗줄기가 갑자기 우박이 되어 쏟아진 탓이었다.

“우박이다!”

손톱만 한 크기도 아니었다. 거의 주먹만 한 것들이 쏟아지는 터라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픽 쓰러지는 이도 있었다. 급하게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아슬아슬하게 우박 덩어리를 피한 도겸은 황급히 행랑아범과 함께 근처 나무 아래로 피했다. 와중에도 끝끝내 도겸에게 검을 겨누는 이가 있었지만 아수라장이 된 마당에 다수보다는 소수 쪽이 더 우위였다. 도겸은 간단하게 몇몇을 돌파했다. 적들을 베면서도 마음이 자꾸만 답답해져 왔다.

무심결에 적의 급소를 베어서? 아니, 갑작스레 내리는 우박 때문이다.

꼭, 분노하면 무리해서라도 얼음 창을 꺼내 드는 그 여인과 같지 않나.

“나리!”

기어이 적의 숫자가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줄어들었다. 그때 행랑아범이 소리쳤다.

“저기 누가 더 옵니다!”

여전히 내리는 빗줄기 너머로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도겸은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적이 아닐세.”

언의 익위사들이었다. 그 틈에 언이 직접 뛰어 올라왔다.

“최 직각!”

“…저하!”

설마 언이 이 거친 산길을 올라왔으리라곤 생각지 못한 도겸이 익위사들에게 둘러싸이는 적의 칼을 아무렇게나 맞받아치며 언에게 뛰어갔다.

“어찌 직접 오십니까?”

“조익환의 집에 남아 있던 놈들을 족쳐서 방향만 알아내고 쭉 수색하여 온 것인데, 이리 만나는군. 많이 상한 것인가?”

“저는 괜찮습니다만… 청이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말도 말게. 그 아이가 100칸에 가까운 조익환의 집을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 놓았다네. 재간택도 치르기 전에 궐을 나서서는….”

“이 비는, 지금 내리는 비며 우박은 다 무엇입니까?”

감히 세자의 말을 끊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언은 대수롭지 않게 답해 주었다.

“응? 이걸 왜 내게 묻는 것인가? 그 아이와 헤어지고 한 식경쯤 뒤부터 내린 것이긴 하다만….”

“그 아이가 어디로 간 것인지는 알지 못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을 찾으러 간다 하였네! 궐 초입에서 기다리던 자네 가솔들이며 집에 있던 이들까지 전부 사라진 탓에.”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굵은 빗줄기 때문에 언이 가까이에 서서도 소리를 쳐 가며 도겸에게 상황을 알렸다.

“…예?”

순간 도겸의 손에서 피 묻은 검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차게 식어 버린 도겸은 휘청하면서도 산 아래쪽을 향했다.

“저하, 소인은 서둘러 가 보아야겠습니다.”

“어? 괜찮은 겐가? 전신이 피투성이인데!”

언이 붙잡으려 했지만 도겸은 한 걸음 더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긁힌 것뿐입니다. 저하… 그 아이가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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