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네 능력 평가나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
딱 잘라 말하는 통에 멋쩍어진 이무기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을 구름도 없는데.”
“천 년 가까이 산 이무기가 여의주 갖고 그런 것도 못 해?”
“그런 것도 못 해서 나한테 부탁이나 하는 용인 주제에!”
“그래서 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어쩐지 휘말려 버린 이무기는 제 실력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할 수 있지, 당연히!”
힘을 약간 끌어냈을 뿐인데도 미약하게나마 용의 힘이 담긴 여의주라고 벌써부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푸르기만 하던 하늘에 점차 먹구름이 거품처럼 모여들어 쨍한 햇볕을 가렸다.
“근데 너… 비 내릴 수 있어?”
할 수 있는 한 가장 너른 범위를 구름으로 채워 나가던 이무기가 물었다.
“겨우 산불 난 거 잡고도 며칠 못 움직였다며.”
그러자 무표정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용이 나직이 답했다.
“정기를 담지 않고 그저 냄새와 소리를 잠재우는 용도니까. 뭐… 그래서 죽는다면 별수 없고.”
“…뭐?”
“겨우 구름 모으는 데에 뭐 이렇게 오래 걸려? 오시 다 된 거 안 보여?”
아마 최도겸의 행방도 찾았을 텐데. 북촌에서부터 찾은 거라면 제가 최도겸을 데리고 사라진 것도 알지 않을까.
“최도겸은 안 찾아?”
그러자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을 가늠하던 심청의 눈빛에 일순 초점이 흐려졌다.
“네가 데려갔다면 죽이진 않았을 테니까 됐어. 네게서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니 확실하고.”
“죽이지 않았지만 죽을지도 모르는데?”
“최도겸은… 나를 안 보는 게 나아.”
비정상적으로 과하게 모인 구름을 지켜보던 심청이 양손을 펼쳐 높이 들었다.
“지금부터 그 녀석과의 약속을 깨트릴 거니까.”
하얀 손 주위로 희뿌연 물안개가 생기는가 싶더니 하늘을 가린 구름이 새카맣게 짙어졌다. 천둥소리는 마치 포효하는 용의 울음소리 같았다.
“너…!”
깜짝 놀란 이무기가 소리치며 한 걸음을 나섰다. 심청의 얼굴에 흐르는 한 줄기의 코피를 발견한 탓이었다.
그러나 심청은 꿈쩍도 하지 않고 용의 힘을 개방하며 대꾸했다.
“오지 마. 너는 거기서 힘을 아끼고 있다가….”
이내 두 눈까지 시뻘겋게 충혈될 즈음, 심청이 잠시 이무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비록 흰자는 피로 물들었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푸르게 변해 세로로 길게 트인 채였다.
“혹시라도 내 심장이 터져서 폭주하면 그때, 나를 막아.”
“뭐?”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비를 내리는 게 아니라 이 땅이 바다가 되는 수가 있으니까.”
이무기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용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리 목숨을 쉽게 포기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가 왕이라며. 왕이 왜 인간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그러자 울컥 피를 토하면서도 심청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글쎄… 신물을 남긴 용이 왜 여기서 죽었는지 알 것 같다고나 할까. 어여쁜 것들이 그 자체로 어여쁠 수 있게 두고 지켜보고만 싶어.”
“…….”
“더 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지만 이무기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굵은 빗줄기가 하나둘, 대지로 떨어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차가운 자극에 흠칫 놀란 이무기는 실로 성체로 변하지 않아도 용은 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힘을 제대로 쓰지 않는 용에게 비아냥거린 것에 큰 죄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실로 경이롭고, 경외감이 절로 끓어오를 만큼의 굉장한 위력이었다. 만약 그 힘이 저를 향했다면 감히 도망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 존엄한 힘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영광스러울 테니까. 이무기는 정기가 없어도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하게 느껴지는 비를 멍하니 맞으며 한계 이상으로 힘을 방출하는 용을 지켜보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용은 휘청하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아… 아아악!”
이윽고 용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꺼내어 세상을 비로 채웠다.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땅속의 수맥까지 터져 올랐다. 마른 땅 여기저기에 용천수가 솟구쳤다. 마치 수많은 용이 승천하는 것과도 같았다. 하늘로 솟구친 물기둥은 더 많은 비가 되어 세상을 적셨다.
“…안 돼!”
발밑에서 솟구친 물기둥 하나가 심청을 집어삼켰다. 깜짝 놀란 이무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차마 함부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이미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힘을 내뿜는 근처로 이미 어마어마한 압력이 결계처럼 장벽을 이루고 있었다. 예민한 감각이 절대 저기에 가까이 가선 아니 된다고 적신호를 켜고 있기도 했다.
“야! 너, 아니, 그…!”
어쩐지 마음대로 부를 수도 없을 것 같아 다급한 와중에 말을 고르던 이무기는 저도 모르게 울컥 소리쳤다.
“그대로 죽어 버릴 거냐고!”
용이 내린 비는 소란을 피우던 사당패들도 허겁지겁 처마 아래로 숨어들게 했고, 집마다 피워 올리던 연기도 모두 잠재웠다. 세상은 용이 내린 비로 고요히 젖어 들었다. 이무기도 한결 숨을 쉬기가 편해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심청을 집어삼켰던 물기둥이 모두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땅 위엔 물 한 방울 젖지 않은, 그러나 새하얗게 질린 소녀만 눈을 감은 채였다.
“사, 살았어?”
용은 심장이 박동하지 않는다. 원하면 얼마든지 살아 있는 기척을 숨길 수도 있는 존재인지라 이무기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심청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눈을 감은 채로 손만 들어 보였다. 물에 씻어 낸 건지 새하얀 얼굴에 얼룩졌던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흘릴 수 있는 피가 한 방울조차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찾았다.”
여전히 세찬 비가 내리는 와중에 스르륵 눈을 뜬 심청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무기의 시각으로는 간신히 빗물을 헤치며 나간 잔상만 읽어 냈을 뿐이었다.
용은 물기로 세상을 채우고 그 안에서 필요한 흔적을 찾아 떠난 것이었다.
“…누굴 찾은 건진 모르겠지만.”
가만 얼음장 같은 빗물을 맞고 선 이무기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편에 선 걸 후회하게 되겠네.”
그 말을 끝으로 이무기는 쏟아지는 비에 녹아내리듯 천천히 뱀의 모습으로 몸을 낮추고 빗줄기를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
거센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
“지, 지, 지 같은 거 잡아 놓는다구 우리 나리랑 아씨께 뭐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 줄 알어유?”
좁은 굴에 웅크리고 앉은 순이는 까만 어둠이 지독하게도 무서웠지만 꿋꿋하게 소리쳤다. 아이는 훌쩍이면서도 겁먹지 않기 위해 애썼다. 차라리 눈을 감으면 어두운 곳에 갇혔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할 수 있기에 작은 두 손으로 눈두덩을 감싼 채였다. 얼마나 오래 소리를 내질렀는지 목이 다 잠겨 갔다.
“아자씨들이야말루 각오혀야 한다니께유. 우리 아씨가 얼마나 무서운 분인 줄은 알고 지를 이래 가둬 둔대유?”
그렇다고 코로 들이치는 고약한 메주 냄새까진 막을 수가 없었다. 대체 땅을 파고 만든 굴 속에 왜 메주를 넣어 놓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에 두고 장작을 때야지 왜 저와 함께 굴에 쏟아 넣은 것일까.
“뭐라는 거야?”
“조용히 안 해? 어차피 조금 있으면 죽을 년이.”
아무래도 여기서 죽나 보다. 순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꿋꿋하게 심호흡했다. 애써 차려입은 옷이 축축한 흙에 더러워져서 속상한 거라고, 그래서 울음이 나는 거라 생각했다. 결코 무덤처럼 땅을 파고 저를 파묻었기 때문에 정말 곧 죽을 것 같아서 눈물이 나는 거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따라오지 않으면 최도겸이 죽는다.”
“나리….”
도겸을 생각하니 또다시 울컥 눈물이 솟았다. 아씨를 안전하게 집까지 모셨어야 했는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은 한두 방울이 아니라 두 줄기, 세 줄기가 되어 쏟아지고 말았다. 점차 공기가 희박해져 숨이 가빠 오기도 했다.
“뭐야, 비 오는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도성 쪽엔 웬 번개까지 치는데.”
“…괜찮겠지?”
유일한 출구를 깔고 앉은 사내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도 순이의 마음을 아는지 갑자기 비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투둑투둑, 머리 위에 놓인 두꺼운 나무판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 우박 아니야?”
“악, 뭐야!”
움찔 놀란 순이는 몸을 더 움츠렸다. 뭔가가 거칠게 나무판을 두드려 실로 두려웠다. 턱이 달달 떨릴 정도였다. 호흡조차 불안정하게 흐트러졌다.
“사, 살려 줘유, 살려 주셔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벌떡 일어난 순이는 콩콩 뛰며 주변에 잡히는 메주를 마구 천장으로 던졌다. 어지러웠다. 아이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숨을 쉬는 게 점차 벅찼다.
“저 애는?”
“어차피 오시 다 됐잖아. 죽든지 말든지. 안 그래도 애라서 께름칙했는데 그냥 죽게 둬.”
“그래도 돼?”
“안 그럼 우리가 죽는데 어째! 어서 가자고. 이렇게 큰 우박에 잘못 맞으면 머리통 깨지는 거 몰라?”
무슨 소린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지만 왠지 순이에게 희망적인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어감으로나마 전부 전해졌다.
“살려 주셔유….”
결국 메주 하나를 들 힘조차 없어진 순이는 털썩 주저앉아 벽에 기대었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아이가 견디기엔 너무도 큰 충격과 고통이었다.
“나리. 아, 아씨….”
한 손엔 뜨겁고 큰 나리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차갑고 보드라운 아씨의 손을 잡고 함께 꽃을 보러 산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작은 소망조차 이루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의식이 멀어져 갔다. 순이는 눈을 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