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이 나리를 따라 뒤에서 기습을 하려 하였는데,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리께서 시간을 버시는 동안 소인은 우선 달아나 칼 쓰는 자들을 더 데리고 왔사온데….”
“한데?”
“다시 와 보니 저자들만 남아 있고 나리께선 보이질 않았습니다.”
“조설아도?”
청의 물음에 삼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데 저놈이 도통 입을 열질 않으니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청은 비로소 답을 낼 수 있었다.
“…조설아가 구한 거야. 최도겸을.”
“이무기가, 최 직각을?”
가만 듣던 언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청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온통 자기편이 널려 있는데 구태여 최도겸을 데리고 사라졌잖아.”
“그렇다 한들….”
언이 아직 미심쩍어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오시에 가까워지고 있는 탓이었다.
마찬가지로 해의 위치를 확인한 청이 돌아섰다.
“남은 사람들을 찾아야 돼.”
“한데 이상하구나. 어찌하여 가솔들까지 데려다 납치극을 벌인다 말이냐?”
가만 이곳에 오면서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복기하던 청이 곧 답을 내었다.
“…나.”
“무어?”
“나 때문이야.”
죽일 것이었다면 집에 침입하였을 때 죽이는 게 간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익환은 일부러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솔들의 물건을 이곳저곳에 흩뿌려 놓는 수고로움을 더했다. 그제야 오늘따라 요란하게 꽹과리며 장구를 치는 사당패도, 굴뚝마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짙은 연기도 우연이 아닌 계획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건 그러니까, 내가 거슬리기 때문이지.”
청은 쌓인 건물의 잔해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역겨웠지만 다시 한 번 모든 감각을 활짝 열었다.
고작 냄새며 시야를 방해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감당해 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당패도 지칠 테고 사람들도 하루 내내 음식을 할 게 아닐 테니까.
“난 일단 나가서 다른 흔적을 찾아볼게.”
저를 바라보는 세자에게 청이 말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할 테니까 너도 네 방식대로 해.”
“그래. 병사들을 도성 안팎의 산에 보내 두었다. 아마 수색해 줄 것이다.”
그리고 세자는 자세히 묻는 대신 그저 굳은 믿음으로 화답했다.
“너도 무리하지 말고 다치지 말거라.”
다만 마지막 당부에 청은 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아무래도 조익환이 제 힘의 한계를 알아차리고 그 부분을 파고들어 저를 해치기 위해 이런 술수를 꾸몄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청은 완전히 파괴된 저택을 떠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하늘은 지나치게 푸르기만 했다.
***
절벽의 작은 턱 위에 갇힌 도겸은 내도록 안절부절못한 채였다. 그는 이무기에게 들은 말들을 반추하며 정보를 솎아 냈다.
“늦었다니까? 그리고 너는 한양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죽어. 다른 이들은 그나마 오시까지 가둬 두라 하였지만 너는!”
이무기와는 저 자신의 생사 여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무기가 쏟아 낸 말 중엔 '다른 이들'도 있었다.
“오시까지 갇혀 있다는 건 무슨 뜻인지를 알아봤어야 하거늘.”
도겸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함이었다면 결코 '다른 이들'이 저와 아주 거리가 먼 이들은 아닐 터. 도겸은 괜히 돌아다니다 작은 턱이 무너져 버릴까 싶어 차분히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생각했다.
“…나는 즉시 죽이라 하였다면.”
그런 함정을 놓는 목적은 아마도 세자인 언이거나, 청이거나 또는 둘 다일 것이다. 문제는 시간적인 제한을 두고 누군가를 가둬 두라 한 이유였다. 시간 안으로 조익환의 입맛에 맞는 어떤 일을 해내야 한다는 의미일 텐데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시간 안으로 해내지 못했을 때 어떤 후환이 닥칠지도 걱정이 됐다.
초조했다. 생각할수록 아무래도 세자인 언보다 청에게 고난이 닥쳤을 가망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언이야 주변에 익위사며 금군이 포진해 있다지만 청은 아니었다. 비록 청에게 홀로 수백, 수천의 군사를 너끈히 이길 수 있는 무력이 있다 한들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가둬 둔다는 대상이 설마 청이라는 예상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조익환이라 하여도 이 땅에 청을 가둘 수 있는 곳을 마련할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 내 심장은 손만 대도 구멍이 날 수 있을 만큼 불안정하거든.”
그렇다 한들 아무리 생각해도 청이, 그리고 제 사람들이 위험할 것 같았다. 집에 호위를 넉넉히 두고 왔다지만 하필 순이를 궐에 보낸 것도 불안했다. 청이 목적이 아니고서야 조익환이 이렇게 철저히 준비를 했을 리가 없다.
도저히 가만 앉아 있을 수 없게 된 도겸은 벌떡 일어나 절벽을 벗어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가 오시에 가까워져 가는 게 보였다.
다급한 마음에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인간의 힘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무기가 앙심을 품은 게 분명해 보였다. 도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리 갇혀있을 바에야 차라리 조익환의 집에 남아 칼을 맞는 게 더 나을 뻔했군.”
또 다른 수렁에 빠진 셈이었다. 이래서야 목숨을 약간 더 연명할 뿐 죽는 건 매한가지지 않나. 위로 올라갈지, 아니면 아래로 내려갈지를 잠시 고민하던 그는 우선 도포 안쪽의 적삼 고름을 뜯어내 제 손바닥에 단단히 감았다. 그리고 미끄러운 가죽신을 내버린 채 버선발로 단단한 돌벽을 더듬었다. 신중한 성격답게 짚고 오를 틈을 골라 가며 살살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점차 그림자가 사라져 갔다. 해가 하늘의 중심을 향해 가는 탓이었다.
오시라 하면 아마도, 청이 재간택을 마치고 나올 즈음이 아닐까. 가둬 둔 다른 이들을 말하는 게 청이와 다른 처녀들일 수도 있겠다. 절벽 꼭대기에 거의 다다른 도겸이 비교적 희망적인 예상을 할 즈음이었다.
꽈르릉!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순간 발을 헛디딘 도겸은 한 팔로 간신히 매달려 몸을 지탱했다. 하마터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건만,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청아!”
차곡차곡 생각을 정리하던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손발이 바빠졌다. 급하게 올라가려다 미처 제대로 두드려 보지 못한 돌부리가 힘없이 빠져 버린 탓에 손이 미끄러졌다. 디딜 곳을 잃은 몸이 맥없이 허공으로 내몰렸다.
아차 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뭐야?”
조익환과 약속한 일도, 여의주를 지켜 준 심청에게 작게 보답하는 일도 전부 끝냈다 생각했다. 그래서 이무기는 이대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들 작정이었다.
아주 깊은 곳으로.
“뭐긴. 조익환 머리카락 한 번 먹더니 나도 못 알아보는 거야?”
그런데 숨기도 전에 심청과 맞닥뜨렸다. 이무기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피였거든!”
“어쨌든.”
심청은 무표정하게 이무기에게 다가왔다. 연을 날리던 날 밤의 온화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단단히 화가 난 채였다. 고요한 눈망울 속에 한바탕 폭풍우가 일고 있었다.
인간들은 미처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이무기는 기실 당장 자리를 뜨고 싶을 만큼 생존의 위협을 느끼던 차였다.
“잃어버린 사람들이나 찾을 것이지 나는 왜?”
그러곤 들고 있던 것들을 와르르 쏟아 냈다. 신발이나 댕기, 옷가지 따위였다.
“반 시진 동안 사대문 안팎을 전부 뒤져서 찾아낸 것들이야.”
“…….”
“그래서 별수 없이, 쉽게 찾을 길을 만들어 볼까 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뭔지 알고 있었다. 이무기는 심청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봤자 난 몰라. 너희들과 단 하룻밤 어울린 일로 아버진 더 이상 나를 믿지 않았다고.”
“조설아에게 물어보려고 온 거 아니야. 그랬다면 이무기의 물비린내나 쫓아오진 않았을 테니까.”
아마도 평소 달고 다니던 가솔들의 물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심청이 고개를 들었다.
“난 이무기에게 부탁을 하러 온 거야.”
그 말엔 이무기도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탁? 용이, 이무기인 나한테?”
“조익환은 내가 힘을 전부 못 쓰는 걸 알고 있잖아.”
“…….”
“그러니까 이따위 짓을 벌인 거겠지.”
그동안 조익환은 조선 팔도를 이 잡듯이 뒤졌다. 그뿐만 아니라 최도겸이 관직을 내려놓기 전의 행적을 모조리 좇았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하늘에 있어야 할 용이 지상으로 내려온 이유를. 용은 지금 목에 칼을 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무기로서 네게 말하지 않았다고, 지금 나더러 사과라도 하라는 거야?”
이무기는 그 사실을 용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됐다면 이무기는 눈앞에서 조익환이 조설아의 관에 불을 지르는 것을 목도해야 했을 테니까.
“…사과 못 해. 조설아의 관을 지켜주는 대신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으니까.”
조설아의 항변에 심청은 화를 내지 않았다.
“이미 내 편이 아니었던 네가 내 편이 되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않아. 그냥 지금 딱 한 번만.”
대신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며 재차 자신이 원하는 사항만 낼 뿐이었다.
“더 이상의 불필요한 죽음이 생기지 않게 해 줘. 네가 조설아를 지키고 싶었던 것처럼 나도 아끼는 인간들을 지키기 위함이니까.”
이무기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아직 가늠하지 못한 탓이었다.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구름을 모아 줘.”
“구름?”
“비를 내릴 거야.”
“비를 내린다고…?”
“그래. 지금으로선 없는 구름 끌어모으다 비를 내리기도 전에 심장이 터져 죽을 테니까.”
도통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기만 하는 어리석은 이무기를 바라보던 심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처럼 어지러운 상황에서는 못 찾아. 하지만 물속이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흔적을 따라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 세상을 물에 담가 버리겠다고.”
“…뭐?”
“네가 넓은 범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구름만 모아. 최대한 넓게.”
“야!”
듣던 중 화가 난 이무기가 무어라 화를 내려 했지만 용은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