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84)화 (169/197)

그러나 청은 삼득의 귀에 재차 사실을 넣어 주지 않았다. 그저 문득 재간택을 위해 떠나는 저를 배웅하던 도겸을 떠올리고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그 녀석이 갑자기 가지 말라고 했던 건 혹시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였을까.”

“아씨!”

삼득이 외치기도 전에 청은 가볍게 한쪽으로 비켜섰다. 누군가 갑자기 휘두른 검 때문이다. 보지도 않고 피한 청은 눈을 들어 상대를 응시했다. 검은 복색을 한 사내는 여지를 두지 않고 몰아쳤다.

청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서 피하다 이내 하얀 손을 들어 검을 붙잡았다. 곧이어 손이 닿은 부분을 중심으로 양옆에 하얀 서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검을 든 사내의 두 팔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얼마 못 가 결국 튕겨 나가듯 물러서야 했다. 청의 힘을 감당할 수 없는 탓이었다.

“……!”

그리고 검이 부서지듯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살생을 위한 검이구나. 온갖 부정으로 더러운 걸 보니.”

움찔 놀란 상대를 두고 청은 담담하게 손을 털어 냈다. 싸우다 말고 청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언제 한 몸이 되었는지 동시다발적으로 청을 피해 물러났다.

“삼득아.”

청의 부름에 그제야 숨통이 트인 삼득이 바로 섰다.

“예, 예! 아씨!”

“사람들을 데리고 가. 나머진 내가 처리할 테니까.”

삼득은 빠릿빠릿한 사람이었다. 당혹스러운 순간에도 청의 명령에 의문을 품거나 불응하지 않고 즉각 움직였다. 그 순간 검을 포기하고 물러난 사내가 소리쳤다.

“궁수!”

혼이라도 나간 듯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움직였다. 활을 든 자들이 청을 향해, 그리고 삼득과 사람들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아씨, 저것은 쉽게 피할 수 없으실…!”

활을 든 자는 어림잡아 열이 넘었다. 그리고 청은 삼득이 말을 잇는 동안 몸을 움직여 활을 든 자들이 시위를 놓기도 전에 하나씩 쓰러트렸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한 이들조차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작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한 청은 태연하게 기절시킨 사람들을 지나쳐 명령을 내린 자 앞에 섰다.

“웬만하면 인간들의 세상에선 인간처럼 굴고 싶었는데.”

애초에 인간과 다른 세상을 보고 사는 청인지라 작은 물고기도 아닌 피라미 정도에 해당하는 인간들과 싸울 의욕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화풀이로 조익환의 집을 모조리 가루로 만들고 싶을 뿐인데 귀찮게 구는 이들이 많아 성가셨다.

조선 땅에서 지내며 일벌백계라는 말을 배운 청은 더 이상 사람들을 괴롭히는 대신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멱살을 잡고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말해.”

청에게 함부로 검을 휘둘러 스스로 화를 자초한 사내는 허공에 매달린 채로도 겁을 먹지 않았다.

“무엇을?”

“네가 살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것.”

“내 주인께서 네가 겁박하리란 것도 고려치 않으셨을까?”

부질없는 충성에 화도 나지 않았다. 청은 말없이 팔을 더 바깥쪽으로 뻗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죽음을 각오했는지 초연한 얼굴이었다.

“설령 내 목을 자른들 나는 알지 못한다. 여기 있는 그 누굴 붙잡고 도륙을 낸들 너는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네가 잃은 자들 또한…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얼굴이 퍼렇게 질려 가면서도 남자는 청을 굴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 각자가 하달 받은 명령이 다르고 이 많은 이들을 하나씩 고신하여 얻어 낸들, 그사이에 오시가 지나지 않겠나?”

“…….”

“그럼 여기저기 흩어진 이들은 전부 죽을 테지.”

청은 미련 없이 사내를 뚝 떨어트렸다. 어딘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남자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너 이 자식, 입 열어. 우리 객주님 어디 계셔. 우리 나리는 어디 계신 거냐고!”

삼득이 득달같이 달려와 사내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너희들은… 이제 끝이다!”

화가 난 삼득이 부러진 다리를 짓누르자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미처 막을 틈도 없이 품에서 꺼낸 단도로 자결을 시도했다.

“함부로 죽을 생각 하지 마.”

하지만 뛰어내려 온 청이 칼을 쥔 사내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부러트렸다. 살려 두어야 했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라 여겼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인간에게 죽음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갖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자의 경우, 감히 죽음으로 도망치게 두어선 안 됐다.

“죽게 둬선 안 돼. 다른 인간들보다 죽음의 기운이 끔찍하게 들러붙어 있는 게 조익환과 비슷한 걸 보면 심복이라도 되는 것 같으니까.”

“예? 심복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어쩐지 무예 실력이 보통이 아니더라니….”

도겸이 천덕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알고 있지 않나. 인간은 고통스럽게 살려 두는 것이 가장 큰 형벌이라는 것을 배운 뒤였다.

“으윽…!”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남자가 이번엔 혀를 깨물었지만 눈치 빠른 삼득이 힘을 써 직접 입을 벌리고 대신 제 피 묻은 머리띠를 쑤셔 넣어 재갈을 물게 했다.

“전부 잡아라.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예!”

청에게 무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려다 삼득의 명령을 받은 이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전세가 역전된 셈이었다.

“아씨, 소인이 이놈들을 가마에 넣어 삶든지 볶든지 해서라도 숨기고 있는 것들을 싹 다 불게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전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삼득이 울분 섞인 목소리로 의욕을 불태웠다. 인간이 아닌 모습을 수두룩하게 보였음에도 아직 청은 삼득에게 아씨인 모양이었다.

“다시는 칼 한 자루는커녕 숟가락조차 들지 못하도록 손가락을 하나씩 끊어 줄 것이다. 그리되기 전에 아는 것을 불어라!”

한바탕 고문을 하느라 소란이 일어나는 틈에 홀로 뭔가를 생각하던 청은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맑아.”

하필이면, 용이 사는 세상의 제 하늘과 유난히 빛깔이 유사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흡족하게 올려다보느라 청의 눈빛이 반짝였겠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사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거기다 해가 점차 중천에 다다르고 있지 않나.

가만 하늘을 바라보던 청이 문득 부서진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을 이런 때 했던 것 같은데.”

나직이 중얼거릴 즈음, 예전에 도겸의 집에 쏟아져 들어왔듯이 대문의 잔해를 넘어온 포졸들이 삼득과 사람들을 향해 뾰족한 창을 치켜들었다.

“좌상 대감댁 침입자들을 추포하라!”

“무기를 버려라!”

“누가 감히 벌건 대낮에 지체 높은 정승의 집에 침입한단 말이더냐!”

그 말을 들은 삼득이 울컥하며 버럭 소리쳤다.

“이자들이 수많은 사람을 먼저 납치하여 죽이겠다 겁박을 하였는데 어찌 자력으로 상황을 타개하려 하는 우리더러 침입자라 할 수가 있소!”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청은 가만 삼득의 앞으로 나서서 포청에서 나온 종사관에게 물었다.

“서촌에 있는 전 규장각 직각인 내 오라버니의 집에 침입자들이 들어 살림을 훔치고 가솔들을 납치하였는데, 거기도 관아의 사람들이 나간 것입니까?”

“뭐?”

그러자 청의 무력을 미처 목격하지 못한 종사관이 눈을 흘기며 청을 업신여겼다.

“어디서 겨우 파직당한 관리의 집안 따위를 좌상 대감보다 앞세우려 하는가! 대문을 부순 것도 모자라…!”

“겨우?”

그때까지 애써 이성의 끈을 붙들고 있던 청이 종사관을 뒤로하고 맞은편의 건물 위로 올라섰다.

“그럼 이 집이 더 하찮아지게 만들어 줄게.”

직후 북촌 일대에 포탄이 연달아 떨어진 듯한 굉음이 일었다. 기어이 분노한 청이 저택을 전부 부숴 버린 탓이었다. 포청의 사람들은 물론 근방의 백성들까지 놀라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공포에 떠는 동안 청은 멈추지 않고 눈에 보이는 조익환의 것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무너진 건물만 수십 채에 이르렀다. 한양에서 궁궐 다음으로 가장 커다란 저택이 단숨에 부서지고 무너지는 광경은 마치 재앙과도 같았다.

“그만!”

작은 발로 기와 한 장 온전치 못하도록 부수던 차, 익숙한 목소리가 청의 귀에 들어왔다.

“청아, 그만 하거라!”

“…….”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한가운데 서 있던 청에게 누군가 겁도 없이 다가와 덥석 붙들었다.

“그만… 그만 하거라.”

언이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온 그는 포졸들을 물리고 섰다.

“네가 보낸 이에게서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아직 오시가 되지 않았으니 진정하거라. 나도 있는 힘껏 병사들을 풀어 최 직각과 네 가솔들을 찾을 테니.”

“…….”

“결코 조익환의 뜻대로 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청은 가만 언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잠깐 화풀이 좀 한 것뿐이야.”

그러자 언이 와중에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잘했다. 속이 다 시원하구나.”

누가 들을까 작게 답한 언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청을 가리고 섰다.

“이제부터 우리는 소중한 이들을 되찾을 것이다.”

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하며 또한 단호했다.

어쩐지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할 테니, 청에겐 용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 덕분에 청은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이무기. 이무기는 어디에 있지?”

주변을 둘러보며 신경을 집중하는 동안 언이 답을 내주었다.

“이 집의 대문 근처에 심어 두었던 감시인의 보고를 듣자 하니 분명 재간택 입궐 전엔 조익환이 아직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했지. 이후 최 직각이 문병을 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던데 나오는 것은 보지 못하였더군.”

“내가 왔을 땐 최도겸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한데 조익환은 그 시각에 이미 도성 밖으로 나가 있었다 하니, 아마도 이무기가 조익환으로 둔갑하여 누워 있던 게 아니었겠느냐? 아마도 최 직각은 바로 알아보았을 테고.”

모습을 들킨 이무기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용과 세자는 각자 이무기와 도겸의 행동 방향을 예측하느라 잠시 대화를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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