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83)화 (168/197)

불행 중 다행이라면 오시까진 아직 시간이 있었다. 아마도 청이 재간택 전에 알아차릴 것이라고까진 계산하지 못한 듯했다.

“아씨는 어디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돌아선 청에게 청지기가 물었다. 그즈음 청은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안채의 샘물을 물동이로 퍼 올려 그대로 들이켜고 있었다.

“아씨…!”

지켜보던 청지기가 기함했지만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하게 몸집만 한 물동이를 비운 청이 북쪽을 바라보며 짧게 대꾸했다.

“난 일단 화풀이 좀 하러 가려고.”

“화풀이라니요?”

잃어버린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와중에 시간은 없었다. 수많은 장애물을 걸러 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설명하긴 시간 아까우니까 너는 시키는 대로 해.”

청은 땅을 박차고 올라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꽤 바쁜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

“빨리 말해. 은혜를 갚을 방법이 뭔데?”

이무기는 도겸을 데리고 깊은 산 속의 높은 돌벽의 중턱까지 올라갔다. 도무지 맨손으로는 내려갈 수도, 더 올라갈 수도 없게 험준하고 가파른 곳이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 도겸은 아찔한 높이에 질색하며 최대한 벽에 붙어 섰다.

“어찌하여 이리 먼 곳까지 와 버린 것이냐?”

“빨리 대답이나 해!”

조급한 이무기가 발을 구르며 답을 종용했다. 겨우 작은 발로 땅을 통통 두드리는데도 좁은 공간이 잘게 진동했다.

“아니, 그 조금 진정하고….”

“설마 단순히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라면 각오해야 할 거야.”

이무기가 도겸을 가두고 압박하기 충분한 곳이기도 했다. 도겸은 조금이라도 허튼소리를 하면 그대로 던져 버리겠다는 듯이 다가오는 이무기를 의식하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우선 네가 꾸며 낸 조설아와 진짜 조 낭자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지 않느냐?”

그러자 조설아가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불쾌해했다.

“그게 뭐?”

도겸은 등 뒤로 훤히 보이는 벼랑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자칫 떨어졌다간 뼈도 추리기 어려워 보였다.

궐의 상황은 어떤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사한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조급했지만 도겸은 옷소매 속에 꽉 쥔 주먹을 숨겼다.

“어릴 때의 일이라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다만, 내 기억이 맞다면 조 낭자가 원하는 '조설아의 참모습'은 비단 아버지인 조익환의 꼭두각시가 되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 애가 원하는 게 뭔지나 알고 그렇게 겁도 없이 떠들어?”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진짜 조 낭자가 얼마나 바른 사람인지는 안다.”

이번엔 도겸이 먼저 이무기에게 한 걸음을 다가갔다. 이무기는 눈만 굴려 도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바른 사람이라면 조익환처럼 밥 먹듯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를 결코 돕진 않았을 테지.”

“아버지잖아! 아버지를 돕는 훌륭한 딸이 되고 싶다고 했단 말이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람의 융통성을 지니지 못한 이무기는 조설아가 죽기 전 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내키지도 않는 일을 해 왔을 테니까.

“아버지가 이미 훌륭한 사람의 됨됨이를 가지지 못하였는데 어찌 단순히 돕는다 하여 결과까지 훌륭해지겠느냐?”

“그래도!”

이무기가 무어라 말하려던 차, 도겸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리고 너는 조 낭자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숙부를 죽이지 않았고, 번번이 기회가 있었음에도 날 죽이지 않았으니까.”

겁도 없이 이무기가 손만 뻗으면 다가갈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간 도겸이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따지고 보면 조 낭자와 네겐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지.”

결국 청이 옳았다. 만약 산이 불에 타고 있을 때 이무기를 죽였다면 도겸은 조익환의 대궐 같은 집에서 끝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 음식을 들고 숙모의 모습으로 변하기까지 했으면서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이무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기본'을 지키고 있던 것이 아니겠나. 그때 조익환의 명령에 불복한 이무기의 결정이 지금 이렇게 제가 살아 있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으니 도겸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정 조 낭자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면, 너는 조익환을 막아야 한다. 조 낭자의 아버지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말이다.”

“…….”

“그게 바로 아버지를 돕는 훌륭한 딸이 되는 길이지. 살생을 일삼는 죄인의 길을 걷지 않게 하는 것이니 말이다.”

도겸은 침착하게 이무기를 설득했다.

“내가 도울 수 있다. 그러니 말해다오. 조익환이 어디에 있는지. 그가 어떤 식으로 청이를 사로잡으려 하는지.”

그러자 도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무기가 어쩐지 눈을 피하는 게 아닌가.

“…늦었어.”

“뭐?”

“늦었다고. 아버지는 너희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까지 가신 뒤고, 심청은 흩어진 자들을 절대 찾을 수 없을 거야.”

“흩어진 자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납치라도 됐다는 말인가? 어째서… 어찌하여 청이가 사람들을 찾지 못할 것이란 말이냐?”

도겸은 이무기가 '절대'라는 말을 붙여 단정 짓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너희 집 가솔들뿐만이 아니야. 아마 지금쯤 그 집을 털어 온갖 물건들까지 사방에 흩뿌려 놨을걸.”

“물건들까지….”

도겸의 표정이 굳어졌다. 후각을 이용하는 청을 혼란케 하려는 것이다.

“소리로도 찾을 수 없을 거야. 오늘 도성 안의 장터마다 사당패들이 나타나 북이며 꽹과리를 쳐 댈 테니까. 여기저기서 불을 피워 연기를 내고 탁한 냄새를 내어 정신없게 할 텐데 그럼, 심청이라 해도 못 배겨 내지 않겠어?”

“…….”

도겸이 말을 잇지 못하는 틈에 이무기가 이실직고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이었어. 아버지로 변해 누워 있기만 하는 것. 그걸로 시간을 끌면 내 할 일은 끝이라고. 남은 조설아의 몸을 전부 내게 주겠다고.”

“어찌 그런 사람을 믿는다는…!”

기어이 화를 내려던 도겸은 차마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순수한 이무기의 눈을 봐 버린 탓이었다.

어리석게도 이무기는 인간의 거짓된 약속을 믿은 것이었다.

“일단, 나를 이 벼랑 아래로 내려다오. 당장 가 봐야 한다. 청이를 찾고 다른 사람들을 찾아야 하니까.”

도겸이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목으로 향했지만 이무기가 거칠게 붙잡아 세웠다.

“늦었다니까? 그리고 너는 한양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죽어. 다른 이들은 그나마 오시까지 가둬두라 하였지만 너는!”

이무기가 입술을 깨물었다.

“…너도 들었잖아. 너는 발견 즉시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그래서 북촌의 집을 벗어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것 때문이라면 내게 답을 구하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있었을 터인데.”

“약속했으니까. 그래서 난 확실히 널 도운 것뿐이야. 심청이… 아니, 용이 그랬던 것처럼.”

별것을 다 의심한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던 이무기가 이내 그 눈에서 독기를 빼며 덧붙였다.

“…나는 조설아가 아니라 조설아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는 이무기니까. 사람이 아니니까.”

“…….”

“그래도 이 이상으로 널 도울 순 없어. 아무리 조설아가 아니라지만 진짜 조설아라 해도 아버지의 가장 큰 적인 너를 위해 움직이진 않았을 거야. 나는 이미 너를 구한 순간부터 아버지를 배반한 거나 다름없어.”

이무기는 도겸을 벼랑 위에 올려 두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너는 여기 있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뭐?”

이야기가 끝나면 당연히 함께 산을 내려가리라 생각했던 도겸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무기가 벼랑 끝으로 향했다.

“네가 내 배에 쐈던 거,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허를 찔린 도겸은 다급히 반박했다.

“아니, 그, 그건 네가 청이의 몸에 나뭇가지를 찔렀으니…!”

“그게 화가 났다면 심청이 보복할 일이지.”

그 말을 끝으로 이무기가 미련 없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놀란 도겸이 끄트머리로 달려 나갔지만 소녀를 따라 몸을 내던질 순 없었다. 도겸이 멈칫한 틈에 점처럼 작아진 이무기의 노란 치맛자락이 바닥에 살포시 내려앉는 게 보였다.

“하….”

홀로 절벽 위에 덩그러니 남은 도겸은 허탈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얼쑤! 좋다!”

거리는 오랜만에 장터를 도는 남사당패로 떠들썩했다. 제법 멀찍이서 악기를 두드리고 있었지만 청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풍물놀이를 하질 않나, 외줄을 타며 소리를 내지르니 호응하는 어른들과 아이들로 인해 귀를 활짝 열고 사람들을 찾아야 하는 청으로서는 마치 공격을 당하는 것과 같았다.

거기다 무슨 조화인지 집마다 솥을 올려 뭔가를 끓여 대느라 바쁘기도 했다. 지붕 위 굴뚝들이 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푸른 하늘과 청의 감각을 흐리게 만들었다.

“설마 오시까지라는 말이 거짓일 것 같진 않으니까….”

그럼에도 청은 함부로 힘을 낭비하지 않고 묵묵히 북촌으로 향했다.

이번엔 대문에서 그냥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쾅!

대문부터 부수고 들어간다면 몰라도.

“으악!”

“웬 놈이냐!”

단단하고도 거대한 문이 맥없이 안쪽으로 넘어갔다. 와르르 무너진 잔해 안쪽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난장판이 되어 싸우던 이들은 청이 낸 소음에 놀라 모두 무기를 든 채로 굳어 있었다.

누가 보든 말든 대문을 걷어차 파괴하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청은 눈으로 단박에 삼득을 찾아냈다. 진한 피 냄새에 미간을 구긴 채였다.

“아, 아씨?”

뭘로 얻어맞은 것인지 삼득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살아 있는 누군가를 하나는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청은 무너진 대문을 등지고 서서 물었다.

“저 녀석들이야? 오시에 남산댁도, 순이도, 객주도, 최도겸까지 전부 죽이겠다고 감히 나한테 겁박질한 인간들이.”

구태여 사람이 아닌 것을 숨길 의지도 없었다. 청의 말을 듣고 경악한 삼득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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