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82)화 (167/197)

희뿌연 연기가 가시고 드러난 상대는 아까 삼득에게 검을 겨누었던 이였다.

“그것 참 고마운 조언이다만….”

도겸은 힐끔 주변을 살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눈물과 콧물을 쏟아 내는 사람들이 대부분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인 것을 보면 삼득은 무사히 빠져나간 듯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몇몇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상을 입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절로 목소리에 노기가 섞였다.

“살면서 편한 길은 택하여 본 적이 없어 말이지.”

적잖이 분노한 그가 검에 힘을 실었다. 연기를 가른 칼날이 살벌하게 부딪쳤다. 문인으로 살며 딱히 검을 들 일이 없어 따로 시간을 내 열심히 수련한 보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상대보다 몇 수 아래라는 사실이 실감됐다. 단순히 문무를 겸비하는 것과 목적이 있어 한 우물만 파는 건 당연히 다르지 않나. 역시 조익환은 예사 무인을 고용한 게 아니었다.

그런 무인을 자신의 호위로 쓰지 않고 이곳에 투입함과 동시에 이무기까지 둔갑시켜 둔 것은 아마도.

“큭…!”

검을 다룰 때는 특히나 심기일전해야 하건만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도겸은 금세 밀리기 시작했다.

“심경이 복잡한가 보군.”

그리고 상대가 도겸의 상태를 바로 알아보았다. 확실히 무력으로는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그나마 이무기가 터진 화약의 연기를 피해 멀리 달아났다는 점이었다.

“그대와 달리 나는 지킬 게 많은 사람이라.”

이쯤 되면 삼득과 사람들은 어느 정도 달아나지 않았을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원칙에 따라 도겸은 기세를 높였다. 상대가 빈틈이 없어 여간 쉽지 아닌지라 절로 생각이 비워졌다.

“네가 지켜야 할 주인은 어디에 있지?”

“알 것 없다.”

캉! 다시 한 번 검이 강하게 부딪쳤다. 이대로는 누구 한 사람의 검이 부러질 것 같았다. 도망친 삼득이 더 많은 무사를 데려오기도 겨를이 부족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도겸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빈틈이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다.

“쉽게 찾아낼 수 없는 곳에 있어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관에 누워 있거나?”

“비겁하게도 스스로 명줄을 재촉하는구나!”

열세인 상황엔 비열한 언행도 큰 무기가 됐다. 지킬 것이 하나뿐인 충견은 조금만 도발해도 반응이 오는 법이다. 거친 공격을 피하던 도겸은 긴 칼날에 베인 갓을 벗어 던지며 차분히 대꾸했다.

“이리 숨은 채로 비겁하게 사냥개만 풀어놓는 주인이 될 바에야.”

“어디서 감히!”

슬슬 연기가 가시고 괴로워하던 무인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세에 몰렸다는 의미였다.

“…차라리 명을 단축하는 게 조상님들 뵐 면이 서는 길이 아니겠나.”

제가 죽으면 반드시 조익환도 죽는다. 그것은 어떤 명제와도 같았다. 제가 죽는 순간 청은 돌아갈 길을 잃게 될 테고 폭주할 테니까. 조익환에게는 분명 확실한 보복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도겸은 더 이상 청을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제 목숨을 이 거대한 복수에 먹을 갈듯 갈아 넣었겠지만 이제는 제게 청이라는 용의 안위가 달려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살아야 했다. 가까스로 버티던 검이 마침내 두 동강 나던 순간, 도겸은 다음 무기를 선택했다.

“조 낭자! 지금 나를 돕는다면 그대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바른길을 알려 주겠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란 치맛자락이 눈앞에 펄럭였다. 어디선가 뛰어 내려온 이무기가 도겸에게 눈을 부라렸다.

“지금 나더러 널 도우라고?”

“설마 내 말을 못 들을 만큼 귀가 나쁘진 않을 테니 두 번 말하진 않겠소.”

도겸은 무용지물이 된 반쪽짜리 검마저 내던졌다.

“그대가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은 조익환이 아닌… 조 낭자니까.”

“…….”

그 말을 들은 이무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씨.”

겉모습만 조설아인 이무기의 앞을 가리고 선 사내가 도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주인님께서 이자를 죽이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도겸은 제 목덜미에 드리워진 검이 아닌 조설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

청이 바라고 믿는 것을, 저도 믿고 싶었으니까.

그사이에 귓가에서 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이자는.”

이윽고 조설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데려갈 거야.”

“아씨! 어르신의 명령을 잊으셨습니까?”

사내가 나직이 겁을 주었지만 조설아는 눈만 깜빡였다.

“그건 네가 받은 명령이잖아?”

“아니, 어찌…!”

황당해하는 이를 내버려 둔 채 도겸은 조설아의 손아귀에 잡힌 채로 저택을 벗어났다. 아무리 검술이 뛰어난 무인이라 해도 공중으로 뛰어올라 담을 넘는 도겸을 잡을 순 없었다.

왠지 긴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

궐을 빠져나온 청은 쉬지 않고 남산댁과 순이의 흔적을 따라 움직였다.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은 활짝 열어 둔 채였다.

“…뭐지?”

자연스레 서촌 쪽으로 움직이던 청은 얼마 가지 못하고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리에 떠도는 앵속각 냄새 탓에 가뜩이나 선명하게 느끼기도 어렵건만, 순이나 남산댁의 흔적이 너무 여러 곳에서 느껴진 탓이었다. 방향조차 중구난방이었다.

청은 우선 가장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흔적을 따라갔다. 미처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인 터라 도달하는 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령 순이와 남산댁이 납치를 당했다 한들 멀리 가진 못했으리라는 오만함으로 가득했다. 그저 감히 제 사람들을 건드린 자들을 어떻게 응징해 주면 좋을까 하는 가벼운 생각뿐이었다.

“…….”

어느 골목 구석까지 찾아 들어가서 찾은 게 순이가 아니라 고작 순이의 짚신 한 짝이었을 때까지는 그랬다. 사대문 안을 돌아다니는 동안 번번이 허탕을 치며 순이의 저고리와 치마, 그리고 댕기 따위를 찾아낸 청의 표정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곳이 물속이었다면….”

아주 적은 냄새만 있어도 이렇게 헛수고할 필요 없이 바로 순이를 찾아갔을 텐데 말이다. 감각을 어지럽히는 장애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찾아낸 것들이 아까 전 헤어진 남산댁과 순이가 걸치고 있던 게 아님을 알아차린 청은 우선 집으로 향했다.

도겸에게 인간의 방식을 묻고 그와 함께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 청은 파문이 일어 울렁이는 마음의 감정을 차분히 다스리기로 했다.

“이 댁 아씨 아니신가?”

늘 빠르게 과정을 짚어 내고 차근차근 설명하는 도겸이 순조롭게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집 앞에 다다라 어쩐지 열린 대문 앞을 기웃대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청은,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아씨, 얼른 들어가 보셔요! 아주 그냥 난리가…!”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면 그만이다. 구경꾼들에게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청은 더 묻는 대신 무심히 사람들을 지나쳐 집 안으로 향했다.

“아… 아이고, 아씨!”

그리고 청은 엉망이 된 집 앞마당에 흠씬 두들겨 맞고 쓰러져 있다 깨어난 청지기와 마주했다. 울먹이며 일어난 청지기가 절뚝이며 청의 앞까지 다가와서는 기어이 바닥에 엎어졌다. 순간 진하게 풍겨 오는 피 냄새에 청의 미간이 구겨졌다.

몰골을 보아하니 엉망으로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기절해 있는 청지기를 흔들어 깨웠더니 청을 보고 지레 놀라 다시 졸도하려 하기에 청은 별수 없이 가볍게 뺨을 때려 주어야 했다. 덕분에 청지기의 뺨은 두 배로 부어올랐으나 다급한 상황이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웬 놈들이 들이닥쳐서 이 집의 호위들을 전부 쓰러트리고 화월 객주님을, 객주님을…!”

뺨을 감싼 채로 횡설수설하며 정신이 없는 청지기를 대신해 청이 말을 정리해 주었다.

“납치라도 했어?”

“예? 예, 그… 예!”

해가 중천에 다다르기도 전에 벌어진 해괴한 납치 사건이었다.

“오라버니는?”

물으면서도 어느 정도 가늠은 하고 있었다. 도겸이 집에 없는 사이에 당했으리란 것을.

“아씨가 궐에 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궐에서 사람이 왔었습니다. 연통을 받으신 나리께서 그길로 나가신 뒤에… 이리되었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놈들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요!”

“그리고 오라버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거지?”

“예. 그, 일단 관아에 가서 이 일을 알려야 할 듯싶습니다.”

“…….”

청은 귀중품으로 그득한 안채가 멀쩡하고 난도질당하듯 온갖 물건이 사라진 사람들의 방을 둘러보았다. 그 눈이 마치 맑은 얼음을 깎아 끼워 놓은 듯 투명하고도 차가워진 것을 알지 못하는 청지기가 이유 없는 한기에 팔을 쓸어내리며 버벅거렸다.

“그리고 그, 놈들이 가기 전에 아씨께 말을 전하라고….”

청지기라도 숨통이 붙어 있는 이유는 청에게 경고를 남기기 위함이었을까. 청이 스르륵 돌아서자 왠지 모르게 움찔 놀라 어깨를 움츠린 청지기가 조심스레 전했다.

“사라진 사람들은 모두, 해가 중천에 뜨는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였구나. 물건들을 사방에 흩뿌려 놓고 혼선을 준 게.”

청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자가 벌인 짓이고 그자가 바로 조익환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점희를 건드린 건 증인을 제거하려는 수작이었을 테고.

그렇다면 납치된 사람들도 한곳에 모여 있진 않을 것이다. 청은 슬슬 억누르던 분노가 마음 밖으로 비집고 나오는 불쾌함을 느꼈다.

“너는 관아로 가지 말고 궐로 가서 세자 저하께 이 사실을 알려.”

“예? 저, 저하께요?”

“그래.”

이 땅의 법도를 전부 깨우친 건 아니었지만 힘의 논리는 모르지 않았다. 적어도 조익환이 조선의 실세라면 관아에 알려 봤자 절차며 체계를 따지며 어영부영 시간을 날릴 게 뻔했다.

“어떻게든 알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했으니 적어도 세자가 뭔가는 해 주겠지.”

그 말과 함께 청은 거추장스러운 저고리와 치마를 벗어 던졌다. 깜짝 놀란 청지기가 돌아섰다.

“아, 아씨, 어찌!”

겹겹이 걸치고 있을수록 귀찮아질 뿐이다. 혹시 움직이는 도중에 사람들의 눈에 띄어 세자나 도겸이 곤란해질 일이 없게 만들 필요도 있었다.

“오시까지 한 시진 남았어. 그 사이에 전부 찾아야 해. 너는 궐에 알리면 상단으로 가서 그곳에도 사정을 알려. 단주의 일이니까 아마 거기서도 인력을 더해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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