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언이 이내 완전히 길을 터 주었다. 청은 그길로 돌아보지도 않고 옥사를 나섰다.
목적지는 우선 순이와 남산댁을 두고 온 궐의 초입이었다. 줄줄이 늘어선 가마들과 데리고 온 사람들이 기다리는 게 보였다.
“아니, 서촌의 아씨는 어찌 이리 서둘러 나오십니까?”
그러나 순이와 남산댁만 보이질 않았다. 다른 처녀를 따라온 이들이 알은체를 하기에 청이 즉각 물었다.
“내가 데려온 이들은 보았는가?”
“아… 예. 아씨들 들어가시고 얼마 안 되어서 가마꾼들이랑 나가던데요?”
“어디로?”
“예?”
“어디로 갔냐고.”
눈 깜짝할 새에 다가서며 매섭게 묻는 청에게서 위압감이라도 느낀 걸까. 송유화의 수모가 흠칫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그, 저 문 밖으로…!”
청은 다음 말을 듣기도 전에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 따윈 중요치 않았다.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저, 저 처녀가 방금 대문 지붕 위를 뛰어넘지 않았어?”
근방에선 순이가 늘 작은 주머니에 들고 다니는 엿 냄새가 나지 않았다. 모시던 세자빈이 자진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담배를 끊어 더는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남산댁의 머릿기름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제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범위 안에 없었다.
마치, 깨끗하게 증발해 버린 것만 같았다.
***
기어이 목숨이 경각에 다다랐다. 그러나 도겸의 입꼬리가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웃어?”
이무기가 어이없다는 듯 팔을 더 높이 들었다. 도겸은 이무기를 내려다보며 작은 손목을 움켜쥐었다.
“강한 자들이란….”
“뭐?”
도겸은 순간 이무기가 치켜든 팔의 관절 안쪽 부근을 후려쳤다. 청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은 기습이었지만 본래 감정이 불안정한 이무기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충분했다. 다행히 관절을 장식으로만 달고 있진 않은지 이무기의 팔이 꺾여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너…!”
“맹점이 한결같지.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하고 있지 않느냐?”
“잔재주 부려 봤자야!”
이무기가 소리치며 재차 손을 뻗어 왔다. 황급히 뒤로 물러난 도겸은 곧장 허리에 매달아 둔 작은 호리병을 꺼내 가차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입구가 단단히 막힌 호리병은 지면과 닿자마자 무력하게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펑! 하는 굉음이 일었다.
“…아악!”
금세 화약 냄새와 함께 방 안에 자욱한 연기가 일었다.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호리병인지라 같잖게 바라보던 이무기가 충격을 받고 소리를 내질렀다.
“너 또 해괴한 것을 들고 왔구나!”
“네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예상을 하였는데 어찌 빈손으로 오겠느냐?”
도겸도 소매로 입과 코를 막은 채였다.
“비몽포와 질려포통을 합쳐 개량한 것이다. 눈은 조금 맵겠지만 살상용은 아니니 걱정 말거라.”
멀리 쏘아 보내 극약을 퍼트리는 화학 무기인 비몽포, 그리고 작은 항아리를 바닥에 내던져 깨지면 안에 들어 있던 마름쇠가 비산하며 적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질려포통은 둘 다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였다.
“…잠시 오감이 괴롭긴 하겠지만.”
그러나 도겸은 두 무기를 개량해 하나로 합치고 휴대하기에 용이하게 크기를 줄이는 과정에서 살상할 수 있는 기능은 모조리 배제했다.
“그저 그 이무기는, 조설아가 되고 싶은 것뿐이라고.”
오로지 청이 원했기 때문이다. 도겸은 이무기에게 어떠한 해악도 끼치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께선 지금껏, 그 용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하셨거든.”
무엇보다 당장 급한 것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청이었다. 조익환이 이루려는 목적의 윤곽이 드러난 지금, 당연히 가장 번거로울 청을 해하려 하지 않겠나. 청이 궐에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당장 궐로 가야겠다. 그는 입구 쪽으로 몸을 피했다.
“이게 뭐야… 아파! 아악!”
상처를 입히진 않겠지만 반대로 굉음과 화약 냄새, 눈이 매운 연기는 인간보다 감각이 비약적으로 예민한 이무기에게 훨씬 자극적일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이런 공격에 면역이 없는 이무기가 괴로워했다.
“도망치지 마! 가면 넌 죽어!”
도겸은 득달같이 쫓아 나오는 이무기를 저지하기 위해 재빨리 항아리를 하나 더 바닥에 내던졌다.
문제는 연기가 제게도 들이닥쳤다는 점이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깊은 숨을 들이쉴 수도 없었다. 청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발을 찾아 신을 틈도 없이 사랑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일찍이 북촌에 오기 전 삼득이와 모든 이야기를 끝내 놓은 참이었다. 도겸이 호리병을 터트리면 그것을 신호 삼아 바깥에서 삼득과 무사들이 진입하기로 했다.
“삼득아!”
삼득이라면 믿을 수 있을 만큼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라 도겸은 그 부분에 있어서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언제든 무사들을 동원할 수 있게 상단과도 이야기가 끝난 상태라 저택을 진압하는 데엔 전혀 무리가 없으리라 예상했다.
“조익환을 찾아야 한다! 어서 궐로…!”
그래서 당연히 삼득이 저택으로 들어와 있을 것이라 믿었거늘. 비로소 충혈된 눈을 뜨며 맑은 숨을 들이쉬었을 때 도겸은 비극적인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다.
“나, 나리!”
생각대로 삼득이 저택의 마당에 들어오긴 했다. 문제가 있다면 들어오자마자 이미 잠복해 있던 조익환 쪽의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점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 내는 검은 복색의 무인이 삼득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이미 삼득은 몸 이곳저곳이 피투성이였다.
“…삼득아, 괜찮은 것이냐?”
굳게 닫힌 수십 개의 방에 무얼 넣어 놓나 했더니, 조익환은 칼을 숨겨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리… 피하십시오.”
삼득에게 검을 겨눈 이가 예리한 날을 더 가까이 들이밀며 도겸을 협박했다.
“모두 무기를 버리도록 하지 않으면 당장 벨 것이다.”
도겸은 별수 없이 아군이 무기를 내려놓도록 했다. 적어도 당장 목을 베지 않는 데엔 대화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이리 과한 호위를 여기에 낭비했다는 건 설마, 좌상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청의 후각을 빌리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도겸은 당황하지 않은 척 입을 열면서도 다시 작은 호리병을 찾아 도포 안 허리춤에 손을 넣었다.
혼란한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런 얄궂은 수에 내가 두 번 당할 것 같아?”
그때 뒤에서 나타난 이무기가 먼저 도겸의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빼앗았다. 아니, 무지막지한 힘으로 뜯어냈다. 그러나 깨지는 동시에 폭음과 함께 화약 냄새가 번지는 것을 알 터라 아무 데나 내 버리지 않고 근방에 있는 물동이에 던져 넣었다.
“아버지가 사람들을 여기에 두고 간 이유가 뭐겠어?”
무인들의 검이 도겸의 사람들을 더욱 매섭게 압박했다. 포위망이 점차 좁혀 들어왔다. 수적 열세야 어찌 돌파해 나가면 된다지만 이무기가 끼어 있는지라 퍽 곤란했다.
“좌상이 사람들을 여기 두고 '간' 이유라.”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도겸은 차분하게 정보를 긁어모았다.
조익환은 이곳에 없다. 무엇보다 좌상은 청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아는 사람이지 않나. 적어도 청의 감각이 읽어 낼 수 있는 범위 바깥까진 나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반역을 도모할 병사들이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아마 초간택에 왕대비가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사실상 간택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래서 삼간택이 아닌 재간택에 기습적으로 일을 벌인 게 아닐까.
도겸은 부러 강하게 나갔다.
“기껏 무사들을 포진시켜 둔들 소용없을 터인데. 이곳은 청이가 단숨에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더냐?”
“말했잖아. 아버지가 원하는 건 용을 사로잡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우릴 인질로 삼아 봤자 청이는….”
“인질이 너희뿐만 아니라면?”
삼득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반격을 노리던 차, 이무기가 말허리를 잘랐다.
“뭐?”
비로소 돌아보는 도겸에게 이무기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심청은 용이라면서 힘도 제대로 못 쓰고 있잖아. 기껏해야 산에 불 한 번 꺼 놓고 며칠을 두문불출했다며?”
역시나였다. 조익환이 도겸 쪽의 최대 전력인 청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조익환은 아마도 청의 힘에 한계가 있음을 짐작한 듯싶었다.
“며칠을 두문불출이라… 그건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느냐?”
“그 총알 빼는데 얼마나 고생한 줄…!”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려던 이무기가 대신 콧김을 뿜으며 홱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재간택에 간 용은 곧 알게 될 거야.”
“…….”
“아끼는 모든 게 사라져 있다는 걸.”
아아, 실책이다. 그제야 도겸은 차라리 혼자 왔어야 함을 깨달았다. 이 싸움엔 결코 많은 사람이 필요치 않았다.
도겸은 삼득에게 시선을 주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금이다!”
이무기가 무어라 말하려던 차, 삼득이 크게 외치자마자 둥글게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 던졌다. 도겸은 즉각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입과 코를 막았다. 여기저기서 화약이 터지며 너른 기와집의 앞마당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별수 없다. 전부 죽여라!”
누군가 도겸의 사람들을 해치라 명령했다. 도겸은 잽싸게 떨어진 장검 하나를 주워 자욱한 연기 속에 쇄도하는 검을 쳐 냈다.
“나리!”
“피하거라!”
호리병을 나누어 주며 미리 주의 사항을 일러 준 탓에 도겸의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고 도겸처럼 입과 코를 막은 채 몸을 움직였다. 독한 연기가 짙어진 틈에 피아 식별이 되지 않다 보니 상대 또한 함부로 검을 내지르지 못했다. 덕분에 도겸이 아군을 지키며 활개 치는 틈에 대부분의 적들이 손쉽게 나가떨어졌다.
카앙! 순간 도겸의 검에 뭔가 부딪혀 강한 충격이 일었다. 손목이 얼얼할 정도였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도록 매운 연기를 모두 버텨 낸 상대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차라리 여기서 눈을 감는 게 편한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