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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80)화 (165/197)

그리고 도겸은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명실상부 내국의 최고 의원들을 두고 사가로 나가다니, 아무리 조익환 본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결정이라 해도 그리 아둔한 결정을 내릴 리가 없다.

“세자 저하께서 급히 연통을 주셔서 안 것도 있다. 좌상의 여식이 재간택에 나타나지 않았다는데 확인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만약 정말 조익환이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면 도겸이 대문에 나타나자마자 이무기가 득달같이 쫓아 나왔어야 맞다. 재간택에 나타나지도 않은 이무기가 위험한 도겸을 가만둘 리가 없지 않나.

“그래서 좌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

조익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고 어색하긴 했다. 그러나 도겸은 주춤대며 밖으로 뛰어나가는 청지기를 뒤로하고 이무기를 몰아세웠다.

“재간택을 포기한 게 오롯이 네 의지는 아닐 테고, 그렇다고 네가 깍듯이 아버지라 모시는 사람을 해쳤을 리도 없을 텐데.”

“너야말로 겁도 없이 어딜 들어와?”

단숨에 움직인 이무기가 도겸의 코앞에 다다랐다. 축지법이라도 쓴 것인지 눈 깜짝할 새였다.

“그 무능한 용은 몰라도 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말이야.”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나도 혼자 온 건 아니라서.”

도겸이 눈짓으로 굳게 닫힌 창밖을 가리켰다.

“소중한 이와 다치지 않기로 약속을 하였거든. 하여 부리는 자들을 미리 보내어 최대한 잠복을 시켜 둔 참이었지.”

아마 궐에 있을 청도 이 사실을 알고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도겸은 침착하게 이무기를 구슬려 조익환의 위치를 알아내고자 했다.

“네 아버지는 대체 어디로 숨은 것이냐? 희한한 일이구나. 약을 적게 먹고 주상 전하보다 일찍 깨어난들 또 다른 누군가를 몰아넣고 피해자 행세를 할 줄 알았건만.”

그러자 여전히 조익환의 얼굴을 한 조설아가 나직이 응수해 왔다.

“…그러니까 더 피했어야지.”

“지금 무어라 하였느냐?”

도겸이 되묻는 순간 조익환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어졌다. 다소 충격적인 모습에 도겸이 설핏 미간을 찌푸릴 무렵 조설아가 무심히 물었다.

“이게 함정이란 생각은 못 해?”

“함정이라니.”

“심청이 널 구하러 올 수 있을 거라 자만하고 있다면, 안타깝지만 그 미련한 용은 오지 못할 거야.”

덥석 도겸의 목을 움켜쥔 이무기가 덧붙였다.

“아버지께선 지금껏, 그 용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하셨거든.”

“크…윽!”

이무기에 불과한들 인간보다는 비약적으로 강한 생물체였다. 그리고 이무기는 도겸을 봐주지 않고 그 손에 바짝 힘을 가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었어.”

숨통이 조일수록 눈앞이 흐려졌다. 몸부림쳐도 소용없었다.

도겸은 또 한 번, 목숨을 빼앗길 위기와 마주했다.

***

“낭자, 이리 가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이오!”

창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청을 바로 앞에 있던 송유화가 간신히 붙들었다.

“이미 조 낭자가 불참하여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낭자까지 무단으로 자리를 비우면 어찌한단 말이오?”

“일각 안으로 온다던 사람이 함흥차사인 건 안 보이는 것이오?”

별다른 수가 없었다. 세자빈이 되는 게 도겸의 소원이라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익환을 사로잡는 게 아니었나. 어차피 조설아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세자빈 간택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청은 여린 소녀들을 둘러보며 당부했다.

“너희들은 내가 나가는 즉시 이 방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병풍처럼 조용히 벽에 붙어 있어.”

“아니, 낭자, 왜 갑자기…!”

느닷없이 하대하는 청에게 송유화를 비롯한 다른 처녀들이 정색하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청은 개의치 않았다.

“어지간하면 숨소리도 내지 마.”

“아니,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것이 낫지 않겠소!”

“입 다물고 있을 자신 없으면 잠깐 기절시켜 줄 수도 있고.”

청이 다시 내려서려 하자 소녀들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저자에서 표낭도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일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낭자가 나간 뒤에 상궁이 오면 어찌 말을 하란 것이오?”

“상궁은 안 와. 아니, 못 와.”

더 이상은 겨를이 없었다. 단호하게 답한 청은 처녀들이 무어라 하는 말을 무시하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점희가 어디에 있는지는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지라 고민하지 않고 방향을 잡았다.

“…확실히.”

이상했다. 사람들의 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바깥을 돌아다니거나 문마다 지키고 있는 별감들조차 없는 건 문제가 크지 않나. 청은 두 발이 지면에 닿는 시간을 줄여 더 빠르게 속도를 내었다. 흡사 날아가는 모양새였다.

점희가 갇혀 있는 의금부의 감옥으로 가는 데까진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어쩐지 바깥을 지키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점희가 홀로 머무는 옥사 안에 여럿의 기척이 느껴졌다. 청은 지체하지 않고 점희의 냄새를 쫓았다.

다행히 점희는 다른 곳이 아닌 옥사 안에 남아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사실이었다. 점희의 숨넘어갈 듯한 신음 소리가 청의 귀를 아프게 찔러왔다.

“끄, 끄흑…!”

청은 괴한들이 돌아보기도 전에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녀석들부터 하나씩 처리했다. 뭔가를 보고 대비를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청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벽에 부딪혀 쓰러지는 사내들뿐이었다. 모두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다.

“뭐, 뭐야!”

마침내 점희를 죽이려던 괴한이 뭔가 대비를 하기도 전에 날아가 나무 창살에 부딪혔다. 얼마나 거센 힘이었는지 나무 창살이 우지끈 부서졌다. 괴한이 죽든 말든 딱히 힘 조절을 하지 않은지라 청은 괴한의 생사 여부도 확인하지 않았다.

“괜찮아?”

대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점희부터 살폈다.

“아, 아씨…!”

막혀 있던 숨통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소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아직 겁에 질려 눈물만 흘려 댈 뿐이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점희는 꽉 쥐고 있던 반쪽짜리 신물만 들어 보였다. 신물이 한데 모이고 싶다며 떼를 쓰고 울기라도 한 건지 점희의 손바닥이 물기로 흥건했다.

그런 줄 알았건만, 퀴퀴한 옥사에서 나는 냄새를 걸러 내고 보니 점희의 손바닥에서 난 땀이었다. 청은 점희의 손에서 신물만 가져오지 않고 그 손목을 잡아 찬 바닥에서 일으켰다.

“가자. 세자가 널 지키기로 했으니까 세자 곁에 데려다줄게.”

그럼 겸사겸사 세자가 괜찮은지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소, 송구합니다, 아씨. 소인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얼마나 놀랐는지 점희가 도통 똑바로 서질 못하고 자꾸만 무너져 내렸다. 세자가 괜찮은지 확인한 뒤엔 그길로 궐의 입구에 두고 온 순이와 남산댁에게 가려던 청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무엇보다, 집에 두고 온 최도겸이 가장 걱정이 됐다. 드물게 답을 내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청이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그 세자가 직접 온 것 같으니까.”

“예?”

아직 숨을 몰아쉬는 점희가 발갛게 충혈된 눈을 들어 보일 즈음, 옥사의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안쪽을 살피고 아이가 무사한지부터 확인하여라!”

“예, 저하!”

많은 사람들의 인기척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옥사 가까이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로 인해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침입이다! 저하를 모셔라!”

아마도 익위사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난장판이 된 옥사를 살피고 먼저 세자를 챙겼다. 그러나 세자는 안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점희를 찾으러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점희야! 안에 있는 것이냐? 네가 어찌 되면 나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

마침내 가장 안쪽으로 들어온 언이 청을 보고는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어스름한 빛으로는 부족했는지 곁에 있던 익위사의 횃불을 빼앗아 재차 확인하기까지 했다.

“네, 네가 어찌 여기에 있는 것이냐?”

“내가 여기 없는 게 더 이상한 것….”

무심코 대꾸하려던 청은 언의 뒤로 도열한 익위사들을 의식하고 말투부터 정리했다.

“아닙니까, 저하?”

“너 혹시….”

옥사 안으로 들어온 세자가 청을 붙잡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무래도 이무기가 둔갑한 것이라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저하와 제가 처음 천변에서 만났던 그날 밤의 이야기부터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

그러자 언이 단박에 한시름 놓은 얼굴을 하며 청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다행이구나. 혹시나 조 낭자인가 하여 경계할 수밖에 없더구나.”

“조 낭자였다면 오히려 저기 널브러진 자들은 필요치 않았을 터인데요.”

“그렇긴 하다만….”

마침 청의 시선이 가는 대로 침입자들을 둘러보던 언이 익위사들에게 침입자들을 추포하라 명령했다.

그리고 청은 언의 손을 떼어 내며 물었다.

“저하께서는 괜찮으신 것입니까?”

얼떨결에 두 손이 덩그러니 허공에 남은 언이 멋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좌상이 누워 있다 한들 그의 여식이 스스로 재간택을 포기할 리 없지 않느냐. 한데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필시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하여 말이지. 혹시 몰라 이 아이부터 확인하려 한 것인데… 점희 너는 괜찮은 것이냐?”

언이 아직 가픈 숨을 몰아쉬는 점희의 안부를 챙겼다.

“예. 소인은 아씨가 와 주신 덕분에….”

“다행이구나.”

“저하께서 무탈하시다면 소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솔직히 언이 무탈하다 하니 더 불안해졌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내어선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대신 청은 점희를 언에게 떠넘겼다.

“안 그래도 소식 듣자마자 서촌에도 급히 연통하였으니 너무 걱정 말거라.”

희한하게도 언이 무표정한 청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위로했다.

“도겸이 그 녀석도 어련히 알아서 움직이려고. 응?”

청은 말없이 입구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언이 즉각 비켜섰다.

“그래. 다시 돌아가려는 것이냐? 내 혹시 몰라 할마마마와 어마마마를 처소에 좀 더 계시라 하였던 것이라 상황이 정리되면 금방 간택도 재개될 터이니….”

“아니요.”

청은 감히 세자의 말을 자르며 품에 갖고 있던 물건을 꺼내어 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무심결에 받아 든 언의 표정이 이내 묘하게 굳어졌다.

“저하의 곁엔 익위사들이 있지만 제가 지키기로 한 이들의 곁은 지금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

“조설아는 소녀가 상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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