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은 고요한 사랑 안으로 들어섰다. 불안했는지 역시나 청지기가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왕실 송림의 나무를 받아 새로 지은 사랑에서는 진한 나무 향이 물씬 풍겼다.
“어찌 이리 누워 계신 것입니까, 예?”
거대한 방의 비단 금침 위에 누운 조익환은 미동조차 없었다. 도겸은 조익환의 곁에 앉아 청지기에게 물었다.
“의원은 꾸준히 들고 있는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텅 빈 두 손을 청지기에게 들어 보인 도겸이 조익환의 손목을 잡아 직접 맥을 짚어 보았다.
“내가 의서도 꽤 보아서 말이네.”
잠깐이었다. 깜짝 놀란 청지기가 득달같이 다가오려다 뒤로 물러났다. 도겸은 안심하라는 듯 마찬가지로 한참 물러나 앉았다.
“의원들은 무어라 하던가?”
“송구하지만, 소인이 함부로 주인 어르신의 상태에 대해 입을 열 수는 없습니다.”
“아, 그렇겠군.”
자리에 앉은 지 일각도 되지 않았지만 도겸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약은 전혀 문제없으니 아깝게 불에 태울 필요는 없다. 설령 우물에 푼다 하여도 백성들을 결코 골병들게 할 일은 없을 테지.”
“예?”
갓을 제대로 쓴 도겸은 부채를 펼쳐 들었다. 그러곤 눈앞의 청지기가 아닌 뒤쪽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조익환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조 낭자?”
그러자 조익환이 스르륵, 감고 있던 눈을 떴다.
***
“영감 나리께서 어찌 이리 갑작스레 오셨습니까?”
가마를 부를 틈도 없이 두 직제학은 허둥지둥 광통교로 향했다. 대광통교의 서남쪽 천변에 죽 늘어선 서화사들 중 몇 곳은 문을 닫아건 채였지만 개중에 가장 큰 서화사는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깜짝 놀라 달려 나온 주인에게 임 씨가 급한 기색을 숨기고 침착하게 굴었다.
“주인장, 오랜만일세. 인사하게. 이쪽은 나와 함께 규장각의 직제학을 맡고 있는 홍문관의 부제학일세.”
자연스레 송현익을 소개하자 나이 지긋한 주인이 반색하며 눈을 빛냈다.
“아이고, 이리 귀하신 분들께서 직접 찾아주실 줄 알았다면 소인이 미리 좋아하시는 서화들로 쫙 준비를 해 두었을 텐데요! 평소엔 서화 모임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그림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임 씨에게 그림을 팔 생각으로 가득할 주인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 좋아하는 것만 보겠는가. 한데 오늘은 좀 긴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직접 들렀네.”
“그럼 일단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차라도 드시면서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지요.”
다행히 대화는 임 씨가 이곳의 단골인 탓에 수월하게 흘러갔다. 내심 그림이든 글이든 하나 사면서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던 송현익은 어색하게 웃으며 임 씨가 하는 대로 따랐다. 임 씨가 송현익에게 슬쩍 눈짓하기에 송현익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는 귀가 많아서 좋을 것은 없었으니까.
“…그래. 그게 좋겠네.”
임 씨의 허락이 떨어지자 주인이 당장 점원에게 좋은 차를 내어오라며 지시했다. 그러곤 귀한 손님들을 안쪽의 응접실로 이끌었다.
“아, 오신 김에 말씀드리자면 일전에 말씀하셨던 그림의 주인이 마침 매도의 의사를 내어 곧 거래가 성사될 듯싶습니다. 따로 매도를 약속한 이가 없어 최대한 값을 후하게 쳐 주는 매수인에게 넘기겠다 합니다.”
“호오, 내 드디어 겸재 선생의 그림을 하나 더 얻게 되는 것인가?”
마침 겸재의 그림 이야기가 나왔다. 임 씨는 저도 모르게 이곳에 온 목적도 잊고 그림을 매수할 생각에 잔뜩 들떠 있다 송현익이 팔꿈치로 슬쩍 건드리자 흠칫 놀라며 헛기침을 해 댔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 안 그래도 이 서화사에서 중개했던 겸재의 그림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인데.”
“예?”
뜻밖의 이야기였는지 주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송현익은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 간 그림을 꺼내 보였다.
“이 그림, 이 서화사에서 판 그림이 아닌가?”
“흠, 일단 이리 희귀한 비단으로 족자를 만드는 곳은 우리 서화사밖에 없긴 합니다만….”
주인이 서화사를 자랑하면서도 확신이 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임 씨가 보증서를 꺼내 보였다.
“이것이라면 이 서화사에서 보증하는 진품이라는 게 확실하지 않겠나?”
그러자 주인이 얼떨떨하다는 듯이 품에서 안경을 꺼내어 썼다. 그러곤 보증서를 들어 세심하게 살폈다.
“예… 맞습니다. 겸재의 그림 '금강내산'을 거래하였다며 소인이 직접 간인을 찍은 흔적이 있습니다.”
“기억하는가?”
“'금강내산'이라면 소인이 거래한 그림 중 손에 꼽을 만큼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었던지라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요.”
그러나 도통 남은 반쪽에 대해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았다.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송현익이 나섰다.
“실은 내가 이 그림을 전 도승지가 남긴 유언으로 잠시 받아 두게 되었는데 이 그림이 진품인지 확인하고자 하여 말이야.”
“예? 이 그림은….”
주인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작은 행동으로 인해 송현익은 주인이 알고 있는 원래의 매수자가 전 도승지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바로 요구 사항을 들이밀었다.
“자네가 이 그림이 이 서화사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긴 했다만 나머지 보증서를 확인할 수 있겠는가?”
그 틈에 마침 점원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주인은 내친김에 점원에게 보증서를 따로 모아 둔 함을 가져오라 일렀다.
“한데 이 그림을 전 도승지께서 갖고 계셨다는 말입니까?”
주인이 손수 두 직제학에게 차를 따라 주며 넌지시 물었다. 이미 대충 그 의중을 알아차린 송현익은 부러 불쾌한 내색을 드러냈다.
“못 믿겠다면 이 그림을 유산으로 받은 그이의 차남에게 다시 확인하여 줄 수도 있네만. 그리하겠나?”
“아이고, 아니요. 어디 감히 소인이 직제학 영감을 의심하겠습니까? 그저 한 번 더 여쭌 것뿐입니다.”
송현익이 언짢게 여긴다는 것을 눈치챈 임 씨가 주인을 대신해 설명했다.
“자칫 매수인의 정보가 새어 나가면 도둑들의 표적이 될 수 있지 않겠나. 물론 우리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저이는 그사이에 이 그림이 장물이 되었나 확인하려 했던 것 같네.”
“뭐, 그런 것이라면 내가 무지하여 생긴 오해 같군.”
송현익은 차를 홀짝이면서도 탐탁지 않은 듯이 굴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주인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이 서화사를 꾸려 나가려면 찾아주시는 손님들과의 신뢰를 지켜야 하는지라… 송구합니다, 영감.”
평소 양반으로서의 위계를 드러내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확실히 나머지 보증서를 확인하여야 했기에, 송현익은 까탈스럽게 굴어 댔다.
“그래서 남은 보증서는 언제 볼 수 있는 겐가?”
“예, 금방 올 것입니다! 워낙 귀한 것이라 깊숙한 곳에 두었더니만….”
그러자 혹시 모를 손님을 더 언짢게 할 수 없는 주인이 큰 소리로 점원을 불렀다.
“아이고, 늦어서 송구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윽고 점원이 자개로 장식된 함을 가지고 들어왔다. 귀하다면서 본인이 직접 찾아오지 않아 의아하다 여기던 차, 서화사의 주인이 품에서 열쇠를 꺼내 함에 달린 자물쇠를 열었다.
“송구합니다. 설령 도둑이 들어도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같은 상자를 여러 개 둔 탓에 저놈이 찾아오는 데 한참 걸린 듯싶습니다.”
“거, 설명은 됐으니 서두르게.”
“예!”
상자를 연 주인이 한데 놓인 반쪽짜리 보증서들을 이것저것 들춰 보고는 이내 하나를 찾아 꺼내 들었다.
“이것이군요. 자, 보십시오.”
그러곤 두 직제학이 제시한 것과 잘린 부위가 맞닿도록 나란히 두었다.
“제가 알기로는 이 그림을 정식으로 매수한 분이 이분이라 알고 있습니다만.”
마침내 찾은 나머지 보증서를 내려다본 두 직제학은 곧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매수인은 좌의정 조익환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산 사람이 조익환이라고 하여 세자빈 살인 사건의 배후에 조익환이 있었다고까지 연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억울하게 관직에서 물러난 최 직각의 복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시 대감께서 하신 말이 기억이 나는군요.”
그때 뜻밖에 주인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뭐?”
송현익이 관심을 보이자 주인이 보증서를 보여 주기 전과는 달리 득달같이 답을 내놓았다.
“좋은 자리에 선물할 그림이라 하셨습니다. 누군지는 정확히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큰일을 부탁할 사람이라 하셨었지요.”
“…….”
“…….”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송현익이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틈에 임 씨가 서화사 주인에게 나직이 경고했다.
“자네, 당분간 몸조심하게.”
“예?”
“그… 무어, 요즘 도성 안팎이 흉흉하지 않나? 한데 귀한 그림들을 취급하고 있으니 위험하지 않을까 하여 말이지.”
그저 치안을 걱정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실상 속내는 따로 있었다.
또 귀한 증인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어떻게 알았지?”
조익환의 모습을 한 조설아는 바닥을 짚지도 않고 그대로 상체를 수직이 되게 일으켜 앉았다. 놀란 청지기가 털썩 뒤로 주저앉는 것을 본 도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거 보게. 날 보면 좌상께서 벌떡 일어나실지도 모른다고 했지 않나.”
그리곤 여유로운 얼굴로 돌아서서 이무기와 마주했다.
“청지기를 시켜 부정하며 시치미나 뚝 뗄 줄 알았건만, 의외로 곧장 인정하는구나.”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내 손을 만져 본 이상 확신한 거 아니야?”
청의 손을 만질 때와 같이 얼음장이었다. 역시나 진짜 조익환은 일찍이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래.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보다 차가울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