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78)화 (163/197)

송현익의 추론에 임 씨의 입이 떡 벌어졌다. 다소 충격을 받은 듯 굳어 있던 임 씨가 이내 스스로 납득하며 덧붙였다.

“일찍이 유서는 자식들 외에 다른 이들에게까지 공개될 수 있으니 거기에 자네 이름을 떡하니 적을 수 없었겠지. 또 듣기로는 도승지의 장남이 물욕이 많다고 하였어. 자네에게 주라고 하였다면 물건이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었음을 염두에 둔 게 아니었겠나?”

“그나마 차남에게 주며 '빌려주라' 한 것도 그 점을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겠지.”

“허어….”

하나씩 맞춰 갈수록 전신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마찬가지였는지 임 씨가 무의식적으로 도포에 가려진 팔을 쓸어내렸다.

“그럼 이제 우리는 이 그림에 숨겨진 답을 풀어내야 하는 것인가? 보자, 이 그림이….”

두 직제학은 도승지가 범상치 않은 이야기를 남겼음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답을 찾아야 했다.

임 씨가 다시 한번 겸재의 경이로운 그림을 보며 반은 감탄하듯, 그리고 반은 뜯어보듯 설명했다.

“이 금강내산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겸재의 역작 중 하나라 볼 수 있는데,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 아니야.”

그러나 송현익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도승지가 우리에게 단서를 남긴 방식과 이유엔 추론이 필요했지만 아마 그 이후로는 필요치 않을 듯하네.”

“어찌하여?”

“그림을 해석하는 방향은 모두 다르지 않나. 누군가는 그린 이가 그린 방식을 따질 테고, 누군가는 그린 것의 의미를 따질 테고, 또 누군가는 그린 이 그 자체를 따지려들 터인데 어찌 답이 하나로 모일 수 있겠는가?”

“그럼 어찌하라는 것인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임 씨가, 송현익은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아, 때론 숲이 아니라 눈앞의 나무를 봐야 하는 것이지. 구태여 도승지가 이런 족자를 빌려준 이유가 무엇이겠느냔 말이야. 애초에 도승지는 내게 이 그림이 서둘러 전해지도록 애쓴 사람인데 설마 내가 세월아 네월아 그 뜻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허송세월을 보내도록 두었겠나? 그런 사이에 때를 놓칠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숲이 아니라 나무라면….”

그러자 곧 송현익의 말을 이해한 임 씨가 경악하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자네 설마, 지금 이 그림을 뜯어내자는 말인가?”

“그래서 이 다급한 와중에 자네를 부른 게 아니겠나?”

송현익은 비장한 표정으로 서안에서 단도를 꺼내어 임 씨의 앞에 꺼내 놓았다. 그즈음 임 씨는 하얗게 질린 채였다.

“자네, 자네, 어찌… 내게 이런 짓을 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예문관 부제학이자 규장각 직제학의 나이 지긋한 양반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 땐 송현익도 비로소 친우에게 못 할 짓을 시키게 되었음을 인지했다.

그러나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자네도 알지 않나. 누군가 버젓이 궐의 우물을 더럽혀 역모를 꾀하고 있는데도 그 진상을 좀처럼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을!”

“그, 그렇지만….”

“자네 손에 달려 있는 것이네. 내가 조심성 없이 뜯었다가 아예 그림이 망가지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그건 안 될 일이지만!”

“자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할 수밖에 없네. 그래도 되겠나?”

송현익이 단도를 뽑아 들자 임 씨가 기겁하며 송현익을 붙들었다.

“내, 내가 하겠네!”

송현익은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칼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임 씨는 심호흡을 하며 무릎을 굽히고 공손히 앉았다.

“…겸재 선생님, 혹여 제가 그림을 망치더라도 나라를 구하기 위함임을 살펴봐 주십시오.”

그림을 그린 이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넨 임 씨가 이윽고 그림과 비단 사이에 조심스레 칼끝을 밀어 넣었다. 덧붙인 부분을 얼마간 뜯어내다 소매까지 걷어붙일 정도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쥐었다가 펴길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굉장히 급한 상황인 것은 맞지만 최대한 천천히 하게, 천천히. 응? 숨은 쉬고 있는 것인가?”

지켜보는 송현익은 그림을 뜯기도 전에 친우를 잃을까 조마조마해졌다. 임 씨가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움직였다.

“내가 과거를 치를 때도 이리 집중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림을 뜯어내고 나서 심약한 사람이 기절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송현익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임 씨에게 부채질을 해 주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 속에 뭔가 든 게 있는지만 살피면 되니까 약간만 뜯어내면 돼. 응?”

“근데 약간 쉽게 뜯기는 것도 같단 말이지.”

“그래?”

“흠, 꼭 이미 한 번 뜯었던 부분을 다시 뜯는 것 같기도….”

송현익의 부채질이 느려졌다. 그만큼 기대감이 커졌다.

이윽고 한 자(30cm)보다 짧은 만큼을 뜯어낸 임 씨가 조심스레 그림과 비단 사이를 슬쩍 들췄다.

그리고 주름진 눈이 희번덕하게 뜨였다.

“어! 정말로 뭔가 있네!”

“그래? 어디, 어디!”

표구된 족자 안으로 조심스레 손을 넣은 임 씨가 작은 종이 두 장을 꺼냈다. 하나는 반쪽짜리, 그리고 하나는 온전하지만 한쪽 면이 뜯긴 희한한 모양새였다.

송현익은 짧은 숨을 들이켜며 당장 임 씨가 펼쳐 놓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각각 하나씩 그 출처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임 씨가 약간 흥분한 투로 반쪽짜리 종이를 가리켰다.

“이건 이 그림을 판 서화사의 보증서일세. 이리 귀한 그림은 위작이 워낙 많다 보니 진품을 팔 때는 서화사에서 보증을 단단히 해 두거든.”

보증서를 꼼꼼하게 살핀 임 씨가 확신하며 나머지를 덧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보증서를 남기는 곳은 나도 알고 있네. 광통교 근방의 서화사들 중 가장 큰 곳이기도 한데, 아마 간인(間印, 함께 묶인 서류의 종잇장 사이에 걸쳐서 도장을 찍음)된 나머지 반 토막은 그곳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야.”

송현익은 나머지 하나, 어디선가 뜯겨 나온 책지를 가리켰다.

“…이건.”

내용을 보자마자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아마도 도승지가 날조하였다던 약방 일기의 일면 같네.”

“무어?”

화들짝 놀란 임 씨는 헛숨을 들이켜다 목에 걸렸는지 거칠게 기침을 해 댔다. 송현익은 말없이 일어나 임 씨의 등을 두드려 주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도승지가 내의원의 도제조로 있을 당시의 약방 일기를 모두 뒤져 본 적 있다 하지 않았나.”

“그, 그랬지?”

“…그래. 그이는 성균관 시절에도 짧은 적록(摘錄, 참고를 위해 간단히 적어 둔 글)까지 모두 보관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도제조가 적었던 약방 일기를 모두 읽어 본지라 필체도 익숙했다. 아마도 누군지 말해 준들 증좌로 남지 않을 터이니 이리 남겨 준 게 아닐까.

그때 가만 지켜보던 임 씨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한데, 이것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날조하였다는 증좌는 되겠지만 누구의 명인지 그 배후는 찾기 어려울 것인데.”

“그렇긴 하지. 아마 이것만으로는….”

가만 수긍하며 한숨을 내쉬던 송현익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임 씨가 확인해 준 서화사의 보증서였다.

그리고 그 보증서를 흐뭇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임 씨까지.

어쩌면 도승지는 송현익이 임 씨에게 이 그림을 보여 줄 것까지 고려하지 않았을까.

“자네, 혹시 이 보증서의 남은 반쪽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아는가?”

“그야 이 그림을 산 사람이나, 혹은 매도인과 매수인이 적혀 있지. 그 서화사가 종종 값비싼 그림의 매도를 중개하고 수수료를 챙기기도 하거든. 그러다 혹 그림을 보증할 일이 생기면 그림의 주인부터 확인하여 그 신분이 확실한지 파악해야 할 터이니….”

거기까지 설명하던 임 씨가 별안간 다른 의문을 제기했다.

“한데 그저 날조된 약방 일기를 전달 줄 목적이었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을 터인데, 왜 하필 이리 귀한 그림을 뜯게 만들었냐는 게지.”

그 말에서 단서를 얻은 송현익이 마침내 답을 내었다.

“아마도 반드시 이 그림이었던 이유가 있는 것 같지 않나?”

직후 두 직제학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갈 채비를 갖추었다.

평소엔 엉덩이 무겁게 굴었지만 조금도 지체할 겨를이 없는 탓이었다.

***

“어찌 오셨습니까?”

육중한 북촌의 저택 대문 앞에 선 도겸은 뒷짐을 지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전 규장각 직각 최도겸이라 하네. 일전에 좌상께서 차를 마시러 북촌에 오라 여러 번 말씀하신 바가 계셨는데 이제야 겨를이 생겨 와 보았네. 애석하게도 대감께서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도움이 될 만한 약재를 가져왔는데 혹 잠시 뵐 수 있겠는가?”

도겸은 거대한 약 보따리를 들어 보였다. 북촌의 청지기가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어르신께선 아직 뚜렷한 차도가 없으신지라 의식조차 없으십니다. 하여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익환이 임금처럼 아직 자리보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건 모르지 않았다. 이미 집주변에 사람들을 심어 두고, 집 안으로 물건을 들이는 사람들까지 포섭해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얻어 내고 있으니 말이다.

청이 직접 확인하기까지 했지만, 용과 이무기가 모두 궐에 들어 있는 틈에 제 눈으로 확인해 두고 싶었다.

“잠시면 되네. 혹 나라서 불안한 것이라면 자네가 함께 들어 지켜봐도 좋아.”

“하지만….”

“그도 불안하다면 내게 무어 날붙이가 있는지 먼저 살피겠는가?”

조설아도 궐에 가 있는 지금, 집 안엔 객의 출입을 허락할 주인이 아무도 없었다. 도겸은 느긋하게 굴었다.

“혹시 아는가? 내가 이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면 대감께서 벌떡 일어나실지.”

막무가내로 청지기에게 보따리를 떠안긴 도겸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어찌 이리!”

“일각이면 되네. 아, 대감께선 내게 찻잎 한 장 내어 주고 싶지 않으실 터이니 차도, 물도 되었네.”

“전엔 차를 마시러 오라 하셨다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사람이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같단 말인가. 대감께서 그사이에 내게 실망이 크신 듯하여 어서 털고 일어나시라는 뜻으로 찾아뵌 것이니, 일어나시거든 꼭 좀 전해 드리게.”

오래도록 언의 벗으로 지내며 그 염치없이 뻔뻔한 성정을 모르지 않았다. 당연히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따라 할 수도 있었다. 도겸은 청지기가 안내하지 않아도 성큼성큼 걸어 먼저 사랑채로 향했다.

“대감, 잠시 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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