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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77)화 (162/197)

한편으로는 굳이 그런 유언을 남긴 도승지가 뭔가를 말하고자 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예. 만일 원치 않으신다면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아니, 아닐세! 그, 겸재에 특히 관심이 많은 벗이 하나 있어 함께 보면 좋을 듯하네.”

정윤석이 다시 상자를 닫으려 하기에 급히 제지한 송현익은 아닌 척 수염을 쓸어내리며 느긋하게 굴었다.

“대여할 테니 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찾아왔으니 그림을 돌려받지 못할 부담은 없을 것일세. 혹여 내 부주의로 그림이 상한다면 내 당연히 보상을 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예. 그럼 이 자리에서 함께 먼저 그림을 확인하면 어떻습니까?”

“좋네.”

왠지 그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예상했지만, 정윤석이 펼친 족자 안엔 싱겁게도 그저 훌륭한 겸재의 그림이 담겨 있었다. 값비싼 그림인지라 포개어 배접한 비단도 보통의 품질은 아닌 듯싶었다.

“보시다시피 딱히 상한 곳은 없지요.”

정윤석이 그림을 살피는 동안 송현익은 상자 안을 더 살폈다.

“한데, 이게 끝인가?”

“무어 다른 게 더 필요하십니까? 아버지께서 남기신 서찰의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만.”

“아, 아니, 아닐세. 나도 확인하였네. 잠깐 보았지만 참… 훌륭하군.”

겸재의 그림이라니 그런 줄 알지, 사실 어떤 그림인지도 알지 못했다. 술이 아니고서야 이런 서화엔 관심이 없으니 당연했다. 송현익은 모르는 분야에 있어선 최대한 말을 아껴야 함을 알았다.

“이런 그림은 두고 두고 볼 때마다 그 감상이 달라지는 법이지. 고맙네.”

“예.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미 갑자기 죽은 전 도승지의 상을 치르느라 다소 정신이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 탓인지 정윤석은 어딘가 겸재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부족한 송현익을 면밀히 살피지 못하고 그대로 일어났다. 죽은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조심히 가게.”

송현익은 사랑 밖으로 나가 정윤석을 배웅한 뒤 바로 청지기를 불렀다.

“박 서방, 박 서방!”

“예, 부르셨습니까?”

“자네는 지금 당장 직제학 임 씨의 집에 연통을 넣게. 내 전갈을 듣는 즉시, 최대한 빨리 내 집으로 와 달라고!”

“예, 알겠습니다!”

청지기를 보내 놓고 다시 방으로 들어온 송현익은 귀한 그림을 앞에 두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제부터 죽은 도승지가 남긴 과제를 풀어야 했다.

***

“아씨, 지는 여기서 기둘리고 있을게유. 다녀오셔유!”

기어이 순이는 단정치 못하게 두 손을 마구 흔들어 대며 인사했다. 청은 즉각 순이의 행동을 교정하는 남산댁을 뒤로하고 상궁을 따라 재간택이 이루어질 전각으로 향했다.

청을 제외한 여섯의 처녀들은 수수하고 실박한 차림새였다. 다만 청이 예상한 대로 다들 간택에 임하는 정성을 다하되 어느 정도 격식과 예의는 차린 듯했다. 초간택 때 왕대비가 갑작스레 나오긴 했어도 아마 왕대비의 성정까지 모르진 않을 터라 재간택은 다들 나름의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서로 다른 색의 옷을 곱게 차려입은 처녀들이 줄지어 상궁을 따르는 모습이, 청의 눈엔 어쩐지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는 색색의 꽃잎들처럼 보였다.

“…흠.”

문제가 있다면 그 꽃잎 같은 치마를 걸친 처녀가 단 여섯이라는 점이었다.

“예서 잠시 준비하고 계십시오. 일각 안으로 다시 모시겠습니다.”

상궁은 여섯의 처녀를 데려다 한 방 안에 넣어 두고 사라졌다. 방 안에는 어른들을 만나기 전에 다시 한번 꾸밈새를 살피라는 의미인지 경대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처녀들은 즉각 저마다 경대 하나씩을 꿰차고 앉아 떠들기 시작했다.

“이 중요한 날에 불참이라니요. 그럼 조 낭자는 대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조설아가 갑작스레 간택에 참여하지 않았다. 도겸이 알고 있었다면 일찍이 이야기를 했을 테고, 세자도 일찍 소식을 들었다면 당연히 어떻게든 서촌에 전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조차 모르고 있었다면 추측건대 오늘 아침에 통보를 받았거나 무단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일 가망이 컸다.

“좌상 대감이 그리 위중하신데 어찌 여기 올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간택에 불참하는 게 말이 되냔 말이지요.”

당혹스럽기로는 그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슬쩍슬쩍 청의 눈치를 살피는 것까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청은 모른 척했다. 어차피 화월이 알아서 잘 꾸며 주었겠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한 척하기 위해 관심도 없는 경대를 만지작댔다.

“혹, 우리를 이곳에 두고 대감댁에 연통을 보내어 조금 더 말미를 주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조 낭자가 오지 않는다면요? 이리 제때 입궐하지 않은 데엔 필시 무슨 사달이 난 게 아닙니까?”

“설마… 좌상 대감께서….”

처녀들의 목소리가 한층 더 작아졌다. 저들끼리 헛숨을 들이켜며 눈빛을 주고받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조익환이 죽은 최악의 상황까지 예상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조익환은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무기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럼 어찌합니까?”

“저희 아버지께서는 조용히 조 낭자 뒤에서 병풍이나 하라고 하셨는데.”

“그러니까 우리 넷이 병풍 한 폭씩을 맡고 있던 게 아니겠소?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니!”

“억지로 저 심 낭자의 면전에 대고 비방까지 하지 않았소?”

“조 낭자가 오지 않으면 우리는….”

역시 송유화는 조설아 병풍 무리에서 제외되었나 보다. 그녀는 홀로 떨어져 앉아 경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편을 나누듯 송유화와 떠들고 싶진 않은지라 청은 네 폭짜리 병풍을 뒤로하고 경대를 보는 척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필요했다. 이대로 조설아로 둔갑한 이무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저 또한 더 이상 여기 앉아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아마 지금쯤이면 조설아가 궐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언이 듣지 않았을까. 임금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고 있다 하니 누구보다 먼저, 가장 우선하여 자세한 소식을 들었을 테고 그럼 입궐한 제게 어떻게든 알려 주기 위해 수를 쓸 텐데 말이다.

하지만 언의 냄새는 당장 근처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우물을 정화했어도 중독된 사람이 워낙 많아 냄새를 분별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했다.

문득 답답함을 느낀 청은 벌떡 일어나 굳게 닫힌 창을 열었다.

“어, 어찌 그러시오?”

난데없는 청의 행동에 둥글게 모여 속닥이던 처녀들이 흠칫 놀라 물었다.

“허락되지 않은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소?”

창밖의 고요한 상황을 주시하던 청이 되물었다.

“창은 마땅히 열라고 있는 것인데, 어찌 이 행동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란 말이오?”

“뭐, 뭐요?”

“걱정 마시오. 혼이 나거든 낭자들은 원치 않았는데 독단적으로 굴었다고 고할 테니.”

공기를 한 움큼 들이쉰 청은 그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조 낭자는 안 올 모양이오.”

이무기의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 그것을 어찌 아시오? 무어… 따로 연통이라도 받은 것이오?”

“아니, 그보다는….”

조설아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처녀를 두고 일어난 다른 처녀가 주저하며 다가와 말을 붙였다.

“일전에 북촌에서 우리가 서로 얼굴을 붉힌 일에 대하여 말인데.”

“나는 얼굴을 붉힌 기억이 없는데.”

“기억이 없다니.”

“낭자들은.”

창을 닫고 돌아선 청이 송유화를 제외한 처녀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응수했다.

“병풍을 보고도 얼굴을 붉힌단 말이오?”

“…….”

어떻게 할까. 먼저 일어날까, 언이 행동하길 기다릴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재간택을 제대로 치를까.

“그보다 낭자들은 느끼지 못했소?”

병풍 같은 처녀들이 입을 꾹 다문 틈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송유화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무엇을 말이오?”

“뭔가 지나치게….”

미간을 좁히며 마지막까지 가늠하던 청이 마침내 눈을 들어 덧붙였다.

“조용한 것 같은데.”

그러자 청을 제외한 처녀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궐이 시끄러운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송유화가 점잖게 되물었다. 그러나 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새들조차 날아들지 않을 정도로….”

그때였다. 청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는가 싶더니 저고리 안으로 손을 쏙 집어넣는 터라 처녀들이 기겁하며 돌아섰다.

“어, 어찌 그러는 것이오?”

“…….”

품에서 뭔가를 꺼낸 청이 손을 펼쳤다. 그 위엔 반쪽만 남은 신물이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신물이 요동치는 바는 명확했다.

점희가 위험하다.

***

“겸재 정선의 그림이 확실하네. 관서(款書, 낙관을 쓴 곳에 적는 글)며 인장도 모두 정확하고.”

송현익의 부름에 득달같이 달려온 임 씨가 내놓은 답이었다.

“역시 애호가답게 보관도 잘하였네. 바로 어제 그린 그림이라 하여도 믿겠어.”

나이가 들어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눈을 반짝이는 것은 남녀노소 공통이었다. 임 씨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그림을 내려놓았다.

“한데 도승지가 이것을 자네에게 '대여'하여 주었다고?”

“그렇네. 차남에게 이것을 남겨 주어 살펴보던 와중에 내게 빌려주라며 따로 적은 서신을 발견하였다고 전했지.”

“차남에게 주며 따로 빌려주라니… 하지만 이리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좋네만.”

아쉬운 듯 족자 끄트머리를 만지작대는 임 씨에게서 족자를 빼앗은 송현익이 대꾸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남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림을 잘 알고, 빌려주기만 해도 만족할 테니 말이야.”

“아무래도… 그렇지?”

“한데 도승지 그이는 이걸 구태여 내게 남겼네. 그 이유가 무엇이겠나?”

가만 생각하던 임 씨가 순간 정색하며 눈을 부릅떴다.

“…설마.”

송현익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그럴 바에야 그냥 빌려주지도 말지 그랬나 싶다가도, 뜻 모를 위화감이 단초처럼 느껴졌네. 하여 생각해 보았지.”

송현익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자 임 씨가 경대에 비추듯 그와 같이 슬쩍 목을 빼며 거리를 좁혔다. 덕분에 송현익은 한껏 나직한 어조로 은밀히 제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도승지 그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이 자식들에게 꼼꼼하게 재산을 분배해 둔 것이었지. 아마도 장남은 본인의 장례를 치르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 가망이 높지 않겠나?”

“그렇지. 어느 자식에게 어떤 재산을 물려줄 것인지 적어 두지 않았다면 자식들은 감정인을 불러 귀중품들을 감정하게 한 뒤 시세를 따져 순서대로 나누었을 테니까.”

“바로 그것일세. 도승지는 이 그림과 함께 넣어 둔 서신을 반드시 차남이 먼저 보게 하고 싶었던 게지. 그래야 이 그림이 남의 손을 타기 전에 반드시 내 손에 들어오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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