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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76)화 (161/197)

“청이를 모시겠다고 억지로 말투를 바꿀 필요까진 전혀 없다, 순이야.”

아마도 궐에서 오래 일한 남산댁이나 도겸이 한양 말씨를 쓰기 때문에 왠지 그래야만 궐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기특하고도 안타까웠다.

“사람의 교양이란 단순히 말씨에서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궐에서도 겨우 그런 것으로 네가 청이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치는 않을 테니 걱정 말거라.”

혹시라도 청이 세자빈이 되어 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수발을 들 사가의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남산댁은 이미 상궁까지 지낸 궁인이기에 다시 들어가기 어려운지라 한두 사람 정도는 미리 물색을 해 두긴 했건만, 아무래도 한참 전 청을 모시겠다 굳게 다짐한 게 아직 확고한 것 같았다.

비록 방식엔 조금 문제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참으로… 그려두 되는 것이어유? 지헌테 뭐라구 허는 사람은 없겠쥬?”

순이가 걱정스레 되물었고, 도겸은 아까와 같이 답했다.

“혹여라도 그리 경우 없이 구는 이가 있거든 내게 데려오거라. 못 배운 사람은 단단히 가르쳐야 하니 말이다.”

그러자 비로소 자신감을 얻은 순이가 야무지게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예, 그럴게유!”

왜 다짐하며 입술에 부단히 힘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도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기어이 동백기름에 눌려 있던 잔머리가 비죽이 올라왔지만 어른들은 애써 모른 척했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거라.”

처음 청을 데리고 장터가 아닌 궐로 가게 된 순이는 걸음걸이마저 뻣뻣했다. 그러느라 도겸은 대문 앞에 다다르도록 아이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냥 따라가서 기다렸다가 다시 오면 되는 건데 왜 그래? 하던 대로 해.”

결국 가마에 오르려던 청이 한 소리 할 정도였다.

“그런 소리 마셔유. 이제 시작이구먼유?”

제법 다부지게 대꾸하는 순이 덕에 도겸을 비롯해 화월은 물론 배웅을 위해 나온 삼득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만발한 꽃들이 흩날렸다.

그리고 도겸은 비로소 가마 앞에 서서 가만 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는 청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바다처럼 푸른 빛깔의 저고리에 하얀 치마를 걸친 채 봄바람을 맞는 청은 그야말로 파도를 훔쳐다 뭍에 세워 둔 것처럼 청량하고, 또 아름다웠다. 하얀 치맛자락이 포말처럼 나부꼈다.

“지금 내 심장은 손만 대도 구멍이 날 수 있을 만큼 불안정하거든.”

그리고 도겸은 뭍으로 올라온 파도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있다.

“아씨, 이제 가마에 오르시지요.”

남산댁의 안내를 받은 청이 가마에 오르려던 차,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도겸이 청의 손목을 잡았다.

“…뭐야?”

제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분명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순순히 손목을 내어 준 청이 손목을 한 번, 그리고 도겸을 올려다보았다.

“왜.”

“원하지 않으면.”

도겸은 정말 청이 뭍에 올라온 파도처럼 부서져 버릴까 덜컥 겁이 났다.

“가지 않아도 된다.”

“뭐?”

기껏 단장을 다 해 놓고 무슨 소리냐는 듯 청이 대번에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잡은 손목이 그대로 부서질까 걱정이 된 도겸은 청을 놓아주지 않았다.

“가지 않아도 된다. 아니….”

슬쩍 잡힌 팔을 빼내려는 청을 재차 붙잡은 도겸의 숨결이 먼저 부서졌다.

“가지 말거라.”

“그게 무슨 소리… 세요, 오라버니.”

그 순간엔 청이 훨씬 사람다웠고 이성적이었다. 단박에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며 손을 뿌리친 청이 도겸에게 가까이 다가와 소곤댔다.

“어제 내 심장 상태를 이야기한 것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리 이 심장이 다 부서져 있어도 포기할 생각은 없으니까.”

“…….”

“아직 너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조건에 대한 다른 해석 못 찾았잖아?”

청이 도겸의 손을 가볍게 떼어 내며 물러났다.

“애써 살려 둔 궐 안의 우물들이며 연못들은 괜찮나 확인도 해 보고 싶고, 정말 세자빈이 된들 나야 못 나오는 것도 아니고.”

“…….”

“설마 고작 인간들이 두려워서 안 가면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무려 이십팔수 중 가장 위대한 신수이자 동방을 수호하는 청룡인데.”

간밤에 지나가듯 해 준 이야기가 생각보다 훨씬 더, 애석하게도 청에게 큰 울림을 준 모양이었다.

청은 공수 자세를 취한 뒤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늘 무심한 얼굴엔 맑은 미소를 띤 채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오라버니.”

인사를 마친 청이 가볍게 가마에 올랐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리.”

“다녀올게유!”

청을 태운 가마가 들렸다. 단정하게 걷는 남산댁을 순이가 뒤따랐다. 평소와 달리 최대한 신남을 억누른 것 같았지만 그래도 두 발이 바닥에서 약간 떨어진 듯 동동거렸다.

“들어가시죠, 나리.”

곁에 선 화월이 도겸을 집 안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그는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가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씨께서 꼭, 세자빈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화월의 말에 그제야 도겸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다. 그러자 화월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저렇게 의젓한 분께서 세자빈이 되지 않으신다면 누가 되겠습니까?”

“…그래, 뭐.”

도겸은 씁쓸한 얼굴로 못내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안으로 들어섰다.

어쩐지, 벌써 행랑 마당부터 텅 빈 것 같았다.

***

“주인 어르신, 누가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휴무였다. 그리고 느지막이 일어난 송현익이 막 재간택에 든 송유화를 궐로 보내 놓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금방 방문을 닫아 주고 나간 청지기가 금방 돌아와 고하기에 송현익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엉거주춤 일어나야 했다.

“음? 아침부터 누가 찾아왔다는 게야?”

“저 그것이, 돌아가신 도승지 영감의 자제 분이시라고….”

“무어?”

깜짝 놀란 송현익은 당장 제 차림새부터 살폈다. 다행히 시간을 끌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당장 모셔라. 어서!”

“예!”

명령을 내리자마자 문이 열리고 상복 차림을 한 젊은 사내가 들어왔다. 손엔 웬 함이 든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직제학 영감. 정가 윤석이라 합니다.”

“아… 그래, 전 도승지의 장남, 아니 차남이던가?”

도승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집에 찾아가 사람들을 본 적이 있기에 송현익은 어렵지 않게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알아보자마자 밀려오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지던 차,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이리 찾아뵌 이유는….”

정윤석은 시원시원한 사내였다. 거두절미하고 보따리부터 송현익의 빈 서안 위에 올려 두었다. 가까이서 보니 제법 큰지라 송현익의 눈도 커졌다.

“이것 때문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제게 남겨 주신 유산 중 하나입니다.”

전 도승지가 아들딸 가리지 않고 유산을 공평하고도 꼼꼼하게 나누어 유언으로 남긴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였다. 당연히 알고 있던 송현익이 되물었다.

“한데?”

“어제 형제들끼리 아버지가 남기신 말씀대로 유산을 정리하였는데….”

유교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르느라 핼쑥한 정윤석이 보따리를 풀고 긴 목함을 열어 보였다.

“제게 주신 겸재의 그림에 웬 서찰이 끼워져 있었습니다. 읽어 보니 아버지께서 제게 이것을 직접 영감께 보여 드리라는 부탁을 남겨 두신지라 이른 아침부터 찾아뵌 것입니다.”

가만 듣던 송현익은 얼이 빠진 채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무어?”

“다시 설명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제게….”

“아, 아니. 되었네.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네.”

떨리는 손으로 목함을 끌어온 송현익은 왠지 함부로 안에 든 그림 족자를 꺼내 볼 수가 없었다.

“이걸 내게 남겼다고?”

“예. 함께 성균관에서부터 수학하고 궐에서도 존재부터 든든하였던 동방(같은 때에 과거에 함께 급제한 사람)인지라 충분히 이 그림을 볼 자격이 있다 하셨습니다.”

이상했다. 제게 뭔가를 남긴다면 처음부터 유언에 남기면 될 일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 전에 부러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서야 따로 교류하는 일도 없던 도승지가 왜?

이후엔 아예 연을 끊자던 사람이 어째서?

“이 그림을 볼 자격이라고?”

하지만 골동품이나 그림 따위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은 송현익이 아닌 임 씨였다. 설마 도승지가 그것을 헷갈렸거나 정윤석이 잘못 지시를 받은 게 아닐까. 송현익은 혹시 몰라 다시 물었다.

“그, 전 도승지가 말하는 사람이 내가 맞는 것인가? 규장각 직제학이라면 나 말고 다른 이도 있는데 말이야.”

“설마 제가 그것을 헛갈렸겠습니까. 아버지께선 정확히 규장각 직제학이자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고 계신 영감을 말씀하셨습니다.”

송현익은 다소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귀한 겸재의 그림인지라 함부로 만질 수도 없어 곱게 말린 족자를 내려다보기만 하는데 정윤석이 덧붙였다.

“영감께서 겸재의 그림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생전에 구경할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이 아쉬우니 얼마간 빌려주라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유지가 있으셨던 만큼 영감께서 충분히 두고 보시다가….”

“잠깐, 무어?”

“예?”

서로 되묻는 통에 송현익과 정윤석의 사이에 잠시간 정적이 생겼다.

먼저 말씀하시라는 듯 공손히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예를 보이는지라 송현익이 헛기침을 하며 차근차근 물었다.

“아니, 그… 빌려주라니?”

“제가 드린 말씀 그대롭니다. 아버지께서는 영감께 이 겸재의 그림을 무상으로 '대여'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다만 그림에 손상이 생길 시 엄밀히 따져 보상을 받으라 하셨지요.”

“…허.”

죽은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쪼잔한 성정은 어디 가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송현익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며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러니까 자네의 아버지가 이 그림을 내게 무상으로 대여해 주라, 그런 유언을 남겼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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