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때 써먹으면 되잖아?”
그러자 화월이 황당해하며 반문했다.
“다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에 대한 답을 모르는 청이 멀뚱히 눈만 깜빡이자 화월이 덧붙였다.
“다음에 아씨를 단장해 드릴 이는 세자빈 궁의 궁녀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
사실상 세자빈 간택이 무의미해진 상황이었다. 청의 입장에선 차라리 간택이 중단되길 바랐건만, 왕실이 굳건하다는 것을 안팎에 내세워야 한다는 왕대비의 결정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왜일까. 도겸의 소원을 이루어 주어야 하는지라 화월의 말에 들떠야 맞는데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눈 감으십시오. 미안수부터 발라 드리겠습니다.”
손끝으로 미안수를 찍어 청의 얼굴에 바르자 금방 뽀얀 살결이 반짝였다. 가만 미안수를 바르던 화월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한데… 돌아보니 근래 도성의 유행을 만들고 있는 이가 누군지 알겠더군요.”
“누군데?”
가볍게 묻자마자 뺨을 가볍게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 뒤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기어이 청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말 모르냐는 듯이 저를 바라보는 화월의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쳤다.
“아씨께선 평소에 유난히 푸른 색감의 옷, 그리고 장신구들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즐겨 입으시는 것 같던데.”
이미 보인 것을 두고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옷감을 파는 가게들도 그렇지만 장신구를 다루는 가게들이 부쩍 비취나 청옥처럼 파란 빛깔의 물건들을 많이 가져다 두었더군요. 원래 이맘때쯤엔 딱히 누군가 선도하지 않아도 개나리며 진달래 같은 꽃잎의 빛깔과 같은 옷이 자연스레 유행하기 마련인데… 계절에도 맞지 않고 뜬금없게 말이지요.”
그 눈에 든 사람이 답이었나. 청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봄에 파란색 입는 게 뭐가 어때서?”
“파란색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린 느낌을 주어 주로 여름에 입습니다.”
화월은 청이 욕심을 냈던 푸른 장신구를 보며 말했다.
“적어도 제가 살아온 이 조선 땅에서는요.”
“앞으로는 사시사철 입게 되겠지.”
“글쎄요. 아씨께서 궐에 들어가신다면 세간의 여인들은 더 이상 구중궁궐 안에서 아씨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장신구를 하시는지 보지 못할 텐데요.”
그동안 이 땅의 법도에 대해 수없이 익히고 공부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청이 재차 확인했다.
“궐에 들어가면 못 나와?”
“모르셨습니까? 세간의 여인들도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마당에 지체 높은 내명부의 여인에게 궐이란 자못, 감옥처럼 느껴질 만큼 호화롭지만 벽이 아주 높은 곳이라는 것을요.”
가만 듣던 청이 나직이 읊조렸다.
“…최도겸.”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다. 답답한 것은 딱 질색인지라 청은 일의 해결이 늦어져 정말로 궐에서 생활하게 된다면 입궐하기 전에 괘씸하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도겸부터 얼음에 가둬 두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상관없어.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오가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럼 다행입니다만.”
화월은 미안수를 마저 바른 뒤 면약이나 백분, 연분은 모두 생략하고 바로 연지를 집어 들었다.
“지난번엔 중간에 다른 것도 바르지 않았어?”
“지난번에 보니 아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때 가장 어여쁘시더군요. 색을 낸들 아주 옅게 낼 것입니다.”
허술하거나 대충 하려는 건가 생각하던 차엔 또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내놓았다.
“걱정 마십시오. 소인은 아씨가 이 간택에서 반드시 세자빈이 되셨으면, 그리 바라고 있습니다.”
“…….”
“그리고 오래도록 세자 저하와 해로하셨으면 좋겠고요.”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세자빈이 되는 건 그저 최도겸의 소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필요한 일이지 않나. 소원이 이루어지고 제가 문제의 반지를 다룰 수 있게 되면 그만이었다.
“왜, 너도 최도겸이 갖고 싶어서?”
화월이라면 당당하게 긍정의 답을 내놓을 것이라 여겼건만, 의외로 반대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요. 어차피 저는 결코 나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어차피 나리께선 단순히 몸이 동한다고 이미 거절한 여인을 함부로 안을 만큼 한심한 사내도 아니시고….”
“…너를 거절했어?”
청이 되묻자마자 연지가 든 작은 단지를 만지작거리던 화월이 날선 눈을 들었다.
“그런 분이 아니시니, 아무도 나리의 이부자리를 데울 수 없게 할 것입니다.”
요구하는 답 대신에 화월은 제 의지만 더 분명히 했다.
“아무도 안 됩니다.”
“…….”
“그러니 아씨는 반드시 세자빈이 되셔야 합니다.”
단순히 인간의 한마디일 뿐이었지만, 어쩐지 화월의 눈에 도는 광기에 언뜻 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순간 위대한 신수인 용이 한낱 인간에게 기가 눌렸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 한양 물 다 버렸네요. 연지 하나도 제대로 못 찍어 내는 건지, 유행을 만드는 사람이 깐깐하질 못한 건지.”
연지를 이것저것 찍어 제 손등에 대고 몇 번 섞어 발라 본 화월이 마뜩잖다는 듯이 수건으로 닦아 내 버렸다.
“연지도 생략하겠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자리보전을 면치 못하고 계신 와중에 처녀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니지요. 아마 다른 처녀들 모두 최대한 색을 죽이고 시국에 맞추어 검소한 복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근데 왕실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이고자 일부러 간택을 강행하는 거라며.”
“그렇습니다.”
“그럼 색을 전부 빼는 건 오히려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이 땅의 인간들은 초상이 났을 때나 그렇게 입는 거 아니야?”
아무리 교육을 받았다 해도 미묘한 구석에서 인간과 괴리감이 있는 청을 어여삐 여기는 왕대비는 확실히 독특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모두가 한결같이 내놓는 정답보다 오답을 내고도 뻔뻔하게 이유를 대며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을 더 선호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봤을 때 다른 처녀들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건 왕대비가 원하는 답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지나침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것을 압니다. 당연히 예에 어긋나지 않는 정도로 준비해 드릴 것입니다.”
화월이 자신했지만 청은 왠지 고집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럼 네가 해 주는 대로 갈 테니까, 이거 하나만 더 하게 해 줘.”
청은 아까 내려 둔 머리 장신구를 다시 집어 들었다. 유난히 파란빛이 도는 비취에 진주와 은으로 장식된 머리꽂이였다.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도겸이 장터에 따라 나왔다가 몰래 사서 꽂아 준 것이기도 했다.
청의 끈질김에 결국 화월이 포기하며 허락했다.
“그것 딱 하나여야 합니다, 아씨.”
벼르고 준비한 것에 비해 대단치 않은 단장이었지만, 가장 본연 그대로에 가깝게 꾸민 청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그렇게 은은하게 오가는 기싸움 끝에 다시 한번 궐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
“지 어때유? 이 정도면은 아씨 따라 궐에 갈 수 있겠쥬?”
“그래. 곱구나.”
도겸은 오랜만에 이리저리 뻗친 잔머리까지 곱게 정리해 댕기를 내린 순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의 앞에서 한 바퀴를 돌아 보인 순이가 몸을 빌빌 꼬아 댔다.
그때 화월에게 단장을 맡기고 나온 남산댁이 걱정 어린 투로 슬쩍 물었다.
“정말 이런 와중에 아이를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오늘 순이는 남산댁과 함께 궐에 가는 청을 수행해 따르기로 했다. 그저 궐의 초입까지만 가는 일인 데다 만약 오늘 삼간택을 생략하고 세자빈을 선발한다면 순이에겐 더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도겸은 잔뜩 기대에 찬 순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순이라면 잘할 테니 맡겨 보게.”
위쪽에서 남산댁과 도겸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길이 없는 순이는 어린아이답게 들뜬 나머지 혹시 모를 상황을 걱정하기 바빴다.
“이러고 나갔다가 갑자기 누가 시집오라구 허면 어쩐대유?”
도성 안팎으로 심란한 와중에 치러지는 재간택이었다. 당연히 청의 입궐을 배웅하는 분위기도 다소 엄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순이가 없었다면 더 삭막하기만 했을 것이다. 도겸은 아이에게 본분을 지키라며 나무라기보다 장단을 맞춰 주는 쪽을 택했다.
“그럼 당장 내게 데려오거라. 내 어떤 녀석인지 알아보고 엄히 다스리마.”
“됐슈. 그런다구 혀두 나리 때문에 지 눈이 저 하늘만큼 높아져서 데려올 사내도 없을 것이구먼유.”
도겸은 새침하게 구는 아이가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그는 혹여 아이의 머리가 망가질까 손을 물리며 나직한 어조로 답했다.
“그렇지 않다. 누가 언제, 어찌 마음에 들어오는지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예?”
“아씨가 나오십니다.”
그즈음 안채 쪽에서 청이 화월과 함께 걸어 나왔다. 청이 어떤 모습을 하든지 함부로 반하지 않도록 단단히 마음을 먹었더니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도겸은 청을 보며 얼이 빠진 멍청한 사내의 낯짝을 하지 않는 데에 간신히 성공했다. 다만 어쩐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아씨, 소인이 모시겠구먼요.”
그런 와중에 청을 따라갈 수 있게 된 순이가 진지하게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여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아이를 내려다본 청이 탐탁지 않은 듯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너도 간다고?”
“지만 딱 믿어 보시라니께요? 그동안 지가 을매나 준비혔는데… 요.”
저마다 진지한 얼굴로 지켜보던 어른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태도는 제법 준비한 것 같다만, 말투는 왜 그런 것이냐?”
순이 덕분에 웃긴 했다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겸이 묻자 순이가 두 손을 모으며 우물쭈물했다.
“궐에 가려면은 그, 이 말투부터 우째 바꿔야 하지 않을까 혀서 그렸…습니다요.”
“순이야, 그건….”
“그럴 거면 따라오지 마.”
그러자 도겸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청이 정색하며 나무랐다.
“예? 우째 그러신대유?”
“너 죽은 사람 기억하려고 그 사람이 썼던 말투 쓰는 거라며.”
“그… 그렇기는 허지만유.”
순이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아마 축 처지지 않았을까. 당장 기가 죽은 아이를 제 쪽으로 데려온 도겸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몸을 낮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