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74)화 (159/197)

다른 때 같았다면 학문적인 근거들을 내세웠겠지만, 이쪽은 도겸도 그다지 확신이 없는 분야였다. 하물며 청이 살던 세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지라 그는 딱히 반론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나도 하늘나라엔 가 본 적이 없는지라.”

“그래도 여기랑 크게 다르진 않네.”

도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이 새로 변해 저 높은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서야 어찌 저 하늘 위로 올라가 보았겠느냐. 그저 선대의 누군가가 그려 낸 바람직한 이상의 나라일 테고, 후손인 우리는 그 이상을 따르려 노력하는 것이겠지.”

차분히 답하며 책의 내용을 생각하던 그가 문득 떠오른 다른 책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칠정산내편'을 보면 그곳에는 해와 달이 오가는 길을 따라 이어진 별자리 이십팔수를 동북서남의 네 방향으로 나눈 다음 각 방향을 지키는 신수, 즉 사신수가 존재한다고 적혀 있다. 저 하늘나라와 겹치기도 하지.”

“사신수?”

“그래. 바로 동방의 청룡, 북방의 현무, 서방의 백호, 남방의 주작이지. 각각 별을 일곱 개씩 갖고 있어.”

청의 눈이 커졌다. 이미 신물에 대한 단서가 있을까 싶어 탐독했던 도겸은 어렵지 않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중에 가장 권위가 높은 신수가 바로 청룡인데, 알고 있었느냐?”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거북이나 호랑이, 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신물에게 그리 당한 것이냐 대꾸하려던 도겸은 간신히 혀를 잡아 눌렀다. 제가 지붕 위에 앉아 있음을 잊어선 아니 되었다. 언제든 담장 너머로 던져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했다.

“그…래. 그리고 청룡은 봄을 불러오는 신수이기도 하지.”

“봄?”

청이 의아하다는 듯 봄을 되뇌며 갸웃거리다 '아' 하고 뭔가를 떠올렸다.

“죽은 무당이 나한테 그랬는데. 메마른 대지에 봄을 불러오는 자라고.”

그 내용은 도겸도 의외였다. 봄을 불러온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근데 이 땅은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매일 계절이 달라지고 있잖아?”

“그렇긴 하다만….”

도겸은 문득 청을 처음 만나던 날을 되새겼다.

“그러고 보니 네가 부용지에 나타났던 날이… 입춘이었지.”

그날까지 도겸이 마쳐야 할 일이 있던지라 확실했다. 또한 그날 전 성수청의 무녀들이 밖에서 입춘을 맞이해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나.

묘하게 들어맞는 사실에 절로 소름이 일었다. 도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무당이 너를 단박에 알아본 것이로구나.”

적어도, 제 시린 마음엔 청이 그야말로 봄이 되었으니 말이다. 도겸은 곁에 앉은 청에게 일찍이 하지 못한 답을 전해 주었다.

“전에 네가 내게 고맙지 않느냐, 그리 물은 적이 있었지.”

하늘을 바라보던 청이 도겸을 바라보았다. 마치 별을 머금은 듯이 그녀의 눈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너야말로 당연한 것을 묻더구나. 처음 약조하였던 것 이상으로 너는 내게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는데 어찌 단순히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그것을 전부 보상할 수 있을까.”

도겸은 손등을 간질이는 청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아 어루만졌다. 마치 맑게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근 것처럼 시원했다. 절로 웃음이 났다.

“처음엔 네 손에 몇 번이고 죽을 뻔하였지. 그때만 해도 너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다.”

청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는 도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 생명을 아끼는 줄 알았다면….”

“되도록 죽이지 않는 거지 필요하면 죽일 수 있대도.”

다소 서늘하고도 무심한 대꾸가 돌아와 푸른 머리칼을 매만지던 도겸이 멈칫했다. 곧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청은 태연하게 도겸이 이무기를 죽이려 했던 일을 상기시켰다.

“아니면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이라 상관이 없던 거야?”

“너라서 그랬다.”

도겸은 청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려다, 이내 반대로 거칠게 쥐었다.

“그 순간에 생각한 건 복수나, 다른 목적 따위가 아니었어.”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기실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음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그저, 너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제 감정의 색이 부디 의리나 우애 따위로 보이길 바랐다. 그러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려 버린 터라 자신이 없었다. 청이 말이 없는 틈에 도겸은 다급히 몸을 뒤로 물리며 급히 이유를 덧붙였다.

어쩐지 저를 바라보는 청의 시선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기 때문에 더 당혹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처음엔 위장이었다 한들 너는 이제 정말 내 가족이나 다름없지 않느냐? 상대가 이무기라 쉽게 본 게 아니라 사람이었다 해도 너를 지켰을 것이다… 어떻게든.”

“가족?”

“그래! 가족.”

“…그래. 가족이니까.”

말간 눈으로 도겸을 바라보던 청이 순순히 수긍하며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알았어. 내일도 가서 열심히 세자빈이 되고 싶은 척할게.”

“…….”

“그 아이에게 노란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혔을 때 못 느꼈나? 설마 제 손으로 원삼을 입혀 다른 사내의 빈으로 궐에 들여보낼 만큼 냉혹한 사내인 것이라면….”

순간 술에 취한 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와를 짚은 도겸의 손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기어이 퍼석하고 부서져 버리는 터라 청이 흠칫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살폈다.

“뭐야?”

“아, 너무 과한 힘으로 짚은 모양이구나.”

“…나한테 힘 조절 하라고 할 땐 언제고.”

“그래. 이리 쉽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네게 너무 가혹했던 것 같구나.”

깨진 기왓장을 내려다본 도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불시에 차오른 마음이 그대로 쏟아지려 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

“그래야 네 소원이 이루어질 거 아니야.”

원하지 않는다면 내일 재간택에 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청이 한숨을 폭 내쉬며 중얼거렸다.

“네 소원이 이루어져야 나도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다 깨져 가는 이 심장을 어떻게든 살려 볼 수 있을 테고.”

“…뭐?”

멈칫한 도겸이 청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다 깨져 가다니.”

그러자 작게 한숨을 내쉰 청이 그제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죽은 무당은 내게 비를 내려 달라고 했지만, 그러려면 나는 정말 죽어야 해.”

주작의 신물을 다루기 위해 한 번은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에 반드시 속뜻이 있을 것이라 믿었던 도겸에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대단히 충격을 받은 도겸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청이 내친김에 제 몸 상태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금 내 심장은 손만 대도 구멍이 날 수 있을 만큼 불안정하거든.”

“너…!”

“맞아. 산에 불을 끄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쓴 게 문제였어. 그 뒤론 작게나마 힘을 써도 무리가 오니까.”

틈만 나면 쉬던 게 그럼,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인가. 새삼 깨달은 도겸에게 청은 도통 틈을 주지 않았다.

“내일 재간택, 궐의 상황이 좋지 않아 삼간택을 대신 할 수도 있다며.”

태연히 자신이 죽기 일보 직전이라 말한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먼 하늘로 향했다.

“그러니까 반드시 세자빈이 되어 궐에 들어가서 확실히 물을 더럽힌 자도 잡아내고, 아마도 그 끝에 있을 조익환까지 사로잡아야지. 이 조선의 법도대로 말이야.”

도겸이 부릅뜬 눈을 감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담담한 목소리는 지독히도 차분했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냐면, 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내가 약해졌다는 걸 밝힌 적이 없거든. 뭐…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게 강하기도 했지만.”

“…….”

“그리고 네가 알아서 날 걱정해 줬으니까.”

석상이라도 된 듯 굳어 버린 도겸의 속도 모른 채 청은 멋대로 웃었다.

함부로, 웃었다.

“감히 인간 주제에 나를 걱정하고… 가당찮은 짓이지만 나쁘지 않았어. 가족이라 느껴서 그런 거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

“그래서 나도 어쨌든 가족인 너한테 내 상황을 알려 주는 거야. 여기 와서 이 집에 사는 인간들과 가족이 되기 전에, 내가 전에 살던 세상에서 가졌던 유일한 가족이 그랬거든.”

처음으로 저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약한 구석을 드러낸 청에게, 도겸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

드디어 재간택의 날이 밝아왔다.

“저를 보고 앉으시지요.”

물론 도겸의 집 안은 해가 뜨기도 전부터 부산했다. 청이 아직 졸린 눈을 깜박이는데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꾸민 화월이 언젠가처럼 화장품을 늘어놓고 청을 불러 앉혔다.

청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온갖 화장품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무엇이 필요할지 모르다 보니 남산댁이 바리바리 사 둔 화장품이 한가득인 탓이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오늘 입으실 옷이 어찌 지어질지 몰라 소인이 가능한 한 여러 가지로 준비해 달라 일렀습니다.”

결과적으로 청은 옷을 새로 짓지 않았다. 남산댁이 어렵게 침모까지 구했지만, 도겸이 새로이 짓더라도 재간택에 입고 가는 옷은 가장 수수한 옷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리께서 짚어 주신 방향대로 소인도 단장은 기본적인 것만 하겠습니다.”

화월이 고른 것들은 예전에도 청을 단장해 주겠다며 꺼냈던 것들과 같았다. 최대한 화려한 색을 빼고 장신구는 일절 고르지 않았다. 대신 이미 갖고 있던 옷에 같은 색으로 수를 놓아 우아함을 강조했다.

“이거 하나만 하면 안 돼?”

청이 푸른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머리꽂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나 화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주상 전하께서 위중하신 와중이니 단장도, 태도도 모두 경건해야 하지요. 안 됩니다.”

먼저 미안수를 집어 드는 화월도 아쉬워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리께 호언장담한 게 있어 소인도 기회가 될 때마다 밖에 나가 요즘 도성의 여인들은 어찌 꾸미고 다니나 살펴보고 이것저것 궁리한 게 있습니다. 한데 생각해 둔 것들이 전부 물거품이 되었으니 아까운 것으로만 따지면 아씨보다는 제가 더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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