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73)화 (158/197)

“그럼 갈 테니까 너도 시간 있을 때 가서 뭐라도 잡아먹어.”

그러자 화를 내려던 조설아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뭐야? 진짜… 그냥 간다고?”

“넌 인간들 사이에서 살더니 쓸데없이 의심만 배운 모양이구나.”

청은 보란 듯이 멀찍이 물러나 아예 옆집의 담벼락 위를 딛고 섰다.

“어차피 확인은 다 했거든.”

이무기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끈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주변의 모든 냄새를 들이 마시고 귀를 기울이며 사랑에 조용히 누워있는 인간의 호흡과 냄새가 정말 조익환이 맞는지 분별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던 탓이었다.

“그럼 갈게.”

그리고 정말로 조익환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청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서둘러 서촌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청은 잠시간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곧장 돌아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대문 위에 우두커니 홀로 남은 조설아가 제 등 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는 건 알지 못한 채였다.

***

모두가 잠든 밤이었건만, 며칠을 내리 불면의 밤으로 보낸 도겸은 홀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것 참… 미칠 노릇이군.”

책을 읽지도, 서신을 쓰지도 않고 얌전히 이불을 덮고 누워 잠을 청했건만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의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한밤을 헤매던 도겸은 기어이 일어나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통이 쏟아져 내렸다. 지끈대는 머리를 꾹꾹 누른 그는 남산댁이 가져다둔 물을 찾아 마셨다.

“…아니. 그럴 만하기도.”

날이 밝으면 청은 재간택을 위해 궐로 향할 것이다. 여러모로 심란할 궐 안이 괜찮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막상 꽃단장을 한 청을 고스란히 궐로 보내야 하는 마음이 편치 않기도 했다. 명치를 파 보면 화로가 하나 들어 있지 않을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피어오른 열은 도통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하….”

결국 오늘도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랑 밖으로 나섰다. 그는 되도록 발소리에 주의하며 집 안을 넓게 돌았다.

잠에 들지 못하니 좋은 점도 있었다. 불 꺼진 방 안을 채운 이들이 숙면을 취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산댁과 순이가 함께 지내는 방을 지날 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가 도롱도롱 코를 고는 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까. 착잡한 와중에 잠시 만난 평온이었다.

“나리, 어찌 깨어 계십니까?”

혹시 몰라 호위무사들은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칼집을 품은 채 남산댁이 야식으로 만들어 준 주먹밥을 먹던 이가 벌떡 일어났다.

“괜찮으니 앉아서 천천히 먹게. 체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그럼 고생하게.”

먹는데 괜히 불편하게 한 것 같아 도겸은 서둘러 자리를 비워 주었다. 집 바깥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는 호위들은 잘 있을까 살펴보고 싶었지만 감시하는 꼴이 될까 주저하게 됐다.

언제 순이의 코골이를 듣고 웃었냐는 듯 도겸은 다시 복잡한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집을 넓게 한 바퀴 돈 그의 걸음은 슬슬 안채 쪽으로 향했다.

청이라면 당연히 물속에서 잠을 청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예상과 함께였다.

“…….”

“…….”

그러나 도겸은 조심스레 중문을 넘자마자 지붕 위에 앉아 있는 청과 눈이 마주쳤다.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아주 오랜만에 푸른 머리칼을 그대로 드러낸 채였다.

순간 후 불면 청이 그대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청은 밤하늘에 녹아들어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급하게 발을 들이던 도겸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멈칫했다.

“아… 쉬고 있던 것이라면 지나가마.”

단 며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고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었다. 도겸이 몸을 물리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이 예의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쉬고 있던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청의 얼굴이 달빛에 비추어 유난히 하얗게 반짝였다. 물결 같은 머리칼도 더 차가워 보였다.

“그럼?”

“인간들은 잠들면 무방비해지니까.”

도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러니까, 낮에 자고 밤에 나와 경계가 허술해지는 순간에 모두를 지키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낮에 틈만 나면 그리 잠을 자 두려 했던 것이냐?”

“그건 그냥 물 밖에서 숨 쉬기 싫은 것도 있고….”

아무래도 도성 안팎에 양귀비 중독자가 속출하고 있는 문제 때문인 듯싶었다.

그런데 청이 말끝을 흐리며 도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홱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게 아닌가. 슬슬 멀찍이서 대화를 나누는 게 답답해지기도 한 터라, 도겸은 성큼성큼 안마당을 가로질러 가까이 다가갔다.

“숨 쉬기 싫은 것도 있고, 그다음은?”

“그다음은 뭐, 네 말이 맞아. 힘을 비축해 둬야 하니까.”

언을 따라 궐에 간 청이 밤을 지새우고 돌아온 이유는 물론 모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한지라 궐 안의 모든 우물을 살피고 직접 정화까지 했노라 들었으니까.

“하긴 우물을 정화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무릎을 모으고 기와 위에 앉아 있는 청의 어깨가 유독 가녀리게만 보였다. 가만 올려다보던 도겸은 여인을 향해 불쑥 손을 뻗어 올렸다.

“청아, 나를 전처럼 지붕 위로 올려 줄 수 있겠느냐?”

“…왜? 화월이 그 여자랑 밤에 같이 돌아다니는 거 아니었어?”

청에게서 돌아온 물음이 뜻밖의 내용인지라, 도겸은 조금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청이 투기 같은 것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제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생각한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해명했다.

“그야 그날은 잠자리가 바뀌어 쉬이 잠에 들지 못하여 나왔다가 우연히….”

이후 화월이 한 이야기가 있는지라 과연 우연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잠깐 멈칫했지만 곧 남은 설명을 이었다. 되도록 화월의 마음을 다치게 한 일은 배제한 채였다.

“마주쳐서 함께 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 방으로 데려다준 것이 전부였지. 그때 보았다면 듣지 않았느냐?”

“몰라. 곧장 물에 들어간 다음에 귀 닫아 버려서.”

그럼에도 청은 도통 손을 내어 주지 않았다. 싫다는 여인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도겸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청이 제법 흥미를 가질 만한 미끼를 던졌다.

“나를 올려 준다면 저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을 읽는 법을 알려 주마.”

“별을 읽는다고?”

그리고 도겸의 예상대로 청이 발끈하며 관심을 보였다.

“저게 마구잡이로 뿌려 놓은 게 아니라는 뜻이야?”

“어찌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어떤 것도 허투루 생기는 법이 없지 않느냐. 저 별 하나하나에 모두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특히 저 별이 모인 곳엔 하늘나라도 존재하는지라….”

“하늘나라?”

벌떡 일어난 청이 푸른 눈으로 하늘을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그럼 내가 저 별에서 왔다는 건가? 인간들은 보통 용이 하늘나라에 산다고 한다며.”

도겸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끝까지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부아가 치민 청이 음산한 경고와 함께 결국 몸을 낮추고 손을 뻗어 주었다.

“올라와서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저 담장 너머로 집어 던질 테니까.”

“걱정 말거라. 저 하늘의 별들을 기록해 둔 책이라면 '천상열차분야지도'부터 '천동상위고'까지 이 머릿속에 전부 들어 있으니.”

전과는 달리 확연히 조절이 된 완력에 수월하게 지붕 위로 올라간 도겸이 청과 나란히 앉았다. 겨우 처마 위에 올라갔을 뿐인데도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비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둘은 잠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저 별 보이느냐?”

“…전부 다 별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라….”

청의 손을 가져간 도겸이 하얀 손끝으로 밤하늘의 가운데쯤을 가리켰다.

“자, 지금부터 네 손끝으로 짚는 별을 이으면 어떤 모양이 되는지 보거라.”

청의 손을 잡은 도겸이 유난히 밝은 별 일곱 개를 가리켰다. 천천히 별을 잇는 동안 둘은 자연스레 더 가까이 붙어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뭔데?”

국자 모양으로 이어지는 별을 본 청이 결국 도겸에게 답을 구했다. 도겸은 느긋하게 별자리를 읽는 첫걸음을 떼었다.

“바로 북두성이다. 별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다 하여 북두칠성이라고도 하지. 부엌에서 쓰는 국자를 닮지 않았느냐?”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이 북두성을 찾으면 북극성을 찾기는 더 쉽지.”

“북극성?”

“그래. 하늘나라의 중심에 위치하는 별이다. 북두성이 음양의 근원이라 한다면, 북극성은 만물이 태어나는 자리지. 북두칠성의 천추와 천선을 잇고 그 길이의 꼭 다섯 배 거리에 있는 별이 바로 북극성인데, 보이느냐?”

“북두칠성보다 작고 어두운데 저게 만물이 태어나는 별이야?”

“그래. 비록 유난히 밝진 않아도 저 별은 쉬이 움직이지 않거든. 그리하여 중심이 되고 기준이 되는 것이다.”

차츰 흥미를 보이며 눈을 빛내는 청의 옆모습에는 영락없이 호기심이 그득한지라, 도겸은 조금 웃고 말았다.

“이 북두성이 바로 음양의 근원이 되는지라 모든 별자리는 이것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 편하지. 하늘나라도 바로 이 근처에 모여 있으니까.”

청의 기억력엔 의심할 구석이 없기에, 도겸은 북극성을 기준으로 하늘나라를 이루는 모든 별을 하나씩 짚어 주었다. 청은 인간들이 하나의 하늘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별자리를 모아 하늘나라를 지어 놓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늘나라의 궁궐이 있는 자미원과 백성들이 사는 천시원, 자미원과 천시원을 이으며 문무백관이 일하는 태미원에 대한 설명이었다.

“뭐야. 그거라면 나는 저기서 온 게 아닌데.”

도겸의 설명에 귀 기울이던 청이 퉁명스럽게 반박했다.

“내가 살던 곳엔 그런 게 없단 말이야. 내가 다스리던 땅이랑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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