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72)화 (157/197)

“이게 비싼 거래유?”

순이의 입장에선 다소 충격적인 소리였다. 나름 한양의 온갖 상전들을 꿰고 저렴하고 신선한 먹거리들을 잘 사 왔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내 사는 곳에서는 네가 쓴 돈이면 지게 두 개가 뭐냐? 네 개는 너끈히 채울걸.”

“예?”

“무어, 온갖 것이 전부 모여드는 한양이니 그러려니 하긴 한다만… 어쨌든 그만 가자꾸나.”

순이를 따라 나온 짐꾼은 다름 아닌 삼득이었다. 대낮의 저자라 해도 위험할 수 있다는 도겸의 우려에 직접 따라나선 것이었다.

삼득은 마찬가지로 짐꾼을 가장한 호위무사에게 눈짓했다. 순이가 알기로는 바로 옆에 선 짐꾼 말고도 삼득이 부리는 무사들 몇몇이 근방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쫓아오고 있었다.

“평소에도 혼자 장을 보러 다닌 것이냐?”

늘 소란하던 장터는 얼마 전 삼짇날의 북적이던 풍경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살풍경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문을 닫아 스산하고 황량하기만 했다. 괴물처럼 변한 사람들이 갑자기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괴상한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처음엔 소문이라 여겼건만, 상인들의 말대로 도성 안팎에서 흉측하게 죽은 사체가 심심찮게 발견되는 터라 발 없는 소문은 벌써 팔도 사방으로 퍼졌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장터에 들어오는 물건들조차 하루가 다르게 질이 나빠지는 것만 같았다.

순이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랬는데… 며칠은 못 나왔쥬. 나리께서 되도록 아씨 곁에 붙어 있으라고만 하셔 가지구. 아자씨 아녔음 오늘도 못 나왔을 것이어유.”

“하기야, 매일 뛰어다니다 갑자기 집에 갇혀 있다시피 했으니 퍽 답답하긴 했겠구나.”

“집 안 분위기도 어째 뒤숭숭한 것이….”

순이는 문득 억울한 바를 삼득에게 툭 털어놓았다.

“나리께서 천자문을 다 떼면은 꽃놀이에 데려가 주시겠다고 허셨는데, 하필 지가 책을 딱 떼자마자 나라님이 드러누우신 게 아니것슈?”

“무어? 그럼 꽃놀이도 가지 못한 게냐?”

갈 수 있을 리가. 솔직하게 순이는 요즘 집에서 발소리, 숨소리도 제대로 내기 어려웠다.

매일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어른들, 문이 잠긴 광에 갇혀 매일 흐느끼는 사내, 말을 걸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않고 꼭 붙어 있기만 하는 광연과 석이도 순이에겐 어렵기만 했다. 가장 아끼는 공간이었건만, 요즘은 매일 밖에 나가고 싶을 만큼 삭막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곁에 붙어 있어도 부쩍 말수가 줄어든 청이 아씨며 책을 읽다가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기만 하는 주인 나리까지. 어쩐지 사랑의 나리와 안채의 아씨가 서로 전혀 왕래를 하지 않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순이는 어쩐지 그저 울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산댁이 아씨를 모시기 위해서는 함부로 눈물을 보이지 말라며 엄포를 놓지만 않았어도 벌써 진이 쏙 빠지도록 울었을지 모른다.

울적한 생각들을 애써 접어 넣은 순이가 힘없이 대꾸했다.

“지가 아무리 이제 겨우 낫 놓고 기역 자 읽는다고는 혀두 꽃놀이 가자고 조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어유.”

시무룩한 순이를 보며 삼득이 때에 맞지 않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그 약조 잘 간수했다가 꽃이 져 버리도록 원을 풀지 못하거든 후일에 아예 나리께 푸른 동해 바다를 보여 달라 떼를 써 보거라.”

“바다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이를 보며 삼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꽃구경이라고 해 봤자 울긋불긋한 꽃나무가 늘어선 한때에만 가능한 것이지만 바다는 사시사철 언제나 푸르게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바닷사람답게 그을린 피부를 지닌 삼득이 자랑스레 자랑하는 바다의 모습이, 어쩐지 순이의 안에선 잘 그려지지 않았다.

“바다라면… 푸른 꽃밭을 보는 거랑 같겠쥬?”

“음?”

바다를 본 적 없는 아이의 상상력에 삼득이 지게를 고쳐 지며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지팡이마저 다른 손으로 옮긴 사내가 투박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 답답한 숨이 탁 트일 만큼 시원한 꽃밭이지.”

“나리께서는 지가 오래 걷기 힘들 거라구 안 데려가 주셨구먼유.”

그러자 삼득이 '오가는 길이 험하긴 하지'라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번 일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같이 가겠느냐? 네가 다리가 아프다면야 내가 널 업어 주면 될 일이니.”

“참말이어유?”

터지기 직전의 꽃봉오리처럼 부풀었건만, 순이는 금세 풀이 죽고 말았다.

“그럼 뭐해유. 아씨가 세자빈이 되셔서 궐로 들어가시면 영영 같이 못 갈 텐데.”

“아씨와 같이 보고 싶은 게냐?”

“그럼유. 원래는 꽃구경두 이 손에 아씨 손 잡구, 이 손에 나리 손 잡구 가려구 혔구먼유?”

순이가 자그마한 두 손을 하나씩 펼쳐 보였다. 그러자 삼득이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였다.

“무어… 거기까진 나도 어찌할 수 없다만.”

멋쩍게 주변을 둘러보던 삼득이 별안간 갑자기 빠르게 걸어 나가더니 과자를 파는 상전 앞에 섰다.

“나는 그 손에 과자를 가득 쥐여 줄 수는 있으니 골라 보거라.”

“…사 주시는 것이어유?”

울적해하던 아이가 엽전 뒤집듯이 반색했다. 삼득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에 있는 다른 녀석들 몫까지 넉넉하게 담아라.”

그러자 단숨에 뛰어간 순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과자를 고르기 시작했다.

“딱 기다리셔유. 오늘 이 상전 아자씨도 일찍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게 해 드릴 거구먼유?”

삭막한 와중에 아이의 밝은 목소리는 마치 봄바람처럼 따스한지라, 얼어붙어 가던 상인들의 냉랭한 시선들조차도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그럼에도 봄이라는 듯이.

***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선 머리색을 바꿀 필요도 없었다. 청은 머리카락을 짙게 만드는 힘조차 아끼며 밤그늘을 타고 북촌으로 향했다. 거대한 구름이 지나가는 중인지 달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아 사방이 어둡기만 했다.

그리고 북촌에서 가장 큰 저택에 다다를 즈음, 청은 벌써 마중을 나온 이와 눈이 마주쳤다.

“왜 왔어?”

조설아는 어둑한 저택의 대문 지붕에 선 채였다.

“왜, 너 없는 사이에 조익환을 죽이기라도 할까봐 지키고 있었어?”

“…….”

청의 물음에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얼마 전 불시에 기습해서 건물을 부수고 조익환을 죽이려 했던 게 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맞은편의 담벼락 위를 가볍게 걸어간 청이 조설아가 서 있는 곳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그러자 조설아가 낯빛을 굳히며 청의 앞을 재차 막아섰다.

“왜 왔냐고 물었잖아.”

“죽이려고 온 거 아니야.”

“인간은 네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만 튕겨도 죽을 수 있어.”

“그게 바로 내가 이 땅에서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이었긴 하지.”

가볍게 대꾸한 청은 스스로 팔짱을 끼며 조설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너도 코가 있으면 알 텐데, 여기 인간들 뭔가 괴상하고 불쾌한 것에 물들어가고 있는 거.”

조설아는 보란듯이 소리가 들릴 만큼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그래서?”

“조익환도 그래서 누워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알면서 너는 왜 왔냐고. 몇 번을 물어야 해?”

조설아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상당히 날이 서 있었다. 지체할 생각이 없는 청은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짜로 똑같이 물들어서 의식이 없는 건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이 땅의 왕과 한 자리에서 쓰러졌다던데.”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여의주 돌려준 거 보면 몰라?”

“그거야 멋대로 가져갔다가 돌려준 거고!”

울컥했던 조설아가 다음 순간 침착하게 숨을 죽였다.

“어쨌든 안 돼. 더 이상 아버지가 너와 가까이에 있게 하지 않을 거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예상과 조금 어긋난 부분이 있다면 예전엔 입을 꾹 다물었던 질문에 대해 이제야 답을 내놓았다는 점이었다.

“…네 말이 맞아. 진짜 조설아에게 은혜를 입었어. 그걸 갚는 중이고.”

모든 소리가 가라앉는 칠흑의 밤이라 아주 작은 소음이라도 크게 번질 법 하건만, 조설아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어지간히 밝히기 싫었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크게 궁금한 것은 아니었던지라 청은 캐묻는 대신 방향을 틀었다.

“나한테는 갚을 생각 없어? 네 망가진 여의주도 대신 품어줬는데.”

“누가 품어달래? 네 기운이 담겨서 기분 더럽기만 한데.”

이무기의 여의주에 용의 기운이 담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건 사실 청도 알지 못했다. 딱히 어떤 결과를 노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약한 인간에게 휘둘려 여의주를 더럽힌 어리석음을 한 번쯤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아이들에게 시간은 기회이자, 형벌이 되는 것이다.”

이무기의 여의주에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한 건 그즈음부터였다. 아마 바닷가에서 어린 아이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도겸의 생각을 듣지 않았다면 청은 이무기에게 기회를 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다시 내놓든가. 애써 불어넣은 기운 다시 가져오면 나야 좋으니까.”

“누구 마음대로?”

조설아가 몸을 반쯤 돌아서며 청을 경계했다. 청은 그런 조설아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조익환한테 여의주 안 줬구나?”

“그야 네가 언제 빼앗아갈지 모르니까.”

이번엔 미리 생각해두기라도 했는지 즉답이 돌아왔다. 청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은혜를 다 갚고 나면, 그 뒤엔 뭘 하려고 했어? 어차피 인간은 너나 나보다 훨씬 짧은 생을 살잖아.”

“그런 생각은….”

그러나 다음 질문은 미리 염두해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한 이무기가 자신 없이 덧붙였다.

“안 해봤어.”

청은 이무기의 답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긴, 그래봤자 구렁이인데 다음 식사로 뭘 먹을 지 미리 골라둘 만큼 생각이 많진 않겠지. 어차피 배고플 때 눈에 보이는 거 잡아먹을 텐데.”

“…뭐?”

있는 사실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는지 눈을 부릅뜨는 조설아의 동공이 세로로 길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눈 하나 깜짝하진 않았지만 청은 너그럽게 한 걸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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