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해야 할 피부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여기저기 긁어서 만든 생채기며 피딱지에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유 내관은 큰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우물쭈물거렸다.
“그, 그것이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가려움증이 시작되었습니다. 약을 처방 받아 써 보아도 효험이 없었다만 저하께서 걱정하실 만큼 심한 것은 아닌지라 그저 괜찮아질 것이라 여겼나이다.”
“그런 가려움증이라 하면… 그러고 보면 유 내관, 얼마 전엔 무릎이 쑤시던 일이 줄어들어 살 만하다 하지 않았나?”
“예, 그랬지요.”
“…허.”
언은 뭔가를 눈치챈 듯싶었다. 유 내관의 팔의 상처를 내려다보던 청이 돌연 이 모든 상황을 황망한 눈으로 지켜보던 금위대장에게 다가섰다.
갑자기 거리를 좁히는 어린 처녀 때문에 놀란 금위대장이 세자의 눈치를 살폈다. 언은 마찬가지로 금위대장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협조를 요구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영감께서는 궐에 있는 우물 물을 드신 적이 있으십니까?”
“당연한 게 아닌가? 거기다 전하께서 간혹 함께 담배를 태우자 하셔서 함께 피운 적도 있고….”
담배 이야기가 나올 즈음엔 청을 마뜩찮게 바라보던 금위대장의 표정도 심각하게 굳어졌다.
“아니, 그래도 내가 주상 전하를 모시는 사람인데 설마 그걸 못 알아차릴 리가 있나!”
온전히 청이 냄새로만 찾아내고 있는 터라 금위대장은 쉽게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않나.
그 때문에 청의 몇 마디만으로 영리하게 상황을 파악하던 언이 대신 물었다.
“혹시 요즘 조갈(입 안과 목에서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는 증상)을 자주 느끼진 않았나?”
“그… 거야 날이 점차 따듯해지니 훈련을 하면 갈증이 심해지는 게 정상이지 않겠습니까?”
와중에 유 내관은 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소인은 그랬습니다. 하지만 소인만 소갈을 느끼는 게 아닙니다. 요즘 물을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진 것이….”
그 답을 들은 언과 청의 눈이 마주쳤다. 청은 마지막 확인 차 언에게 다가섰다.
“나, 나도?”
마찬가지로 언의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조금 더 대범하게 그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으려 하자 소매를 정리하던 유 내관이 헛숨을 들이켰다.
주변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청이 입술을 깨물었다.
“…예. 저하의 예체에서도 같은 냄새가 납니다.”
“나, 나는 유 내관처럼 가려움증이 생기거나 심한 조갈을 느끼진 않았는데?”
“미약하지만 확실합니다. 저하의 살결에서도 약의 냄새가 나고 있으니까요.”
그러자 언이 대번에 정색하며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이런 이야길을 어찌 일찍이 하지 않은 것이냐?”
“그거야….”
청은 유 내관과 금위대장을 슬쩍 등지고는 업신여기는 눈빛과 함께 다소곳하게 답했다.
“이미 도성 안의 공기가 그것을 태운 냄새로 자욱하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그것도 모르냐는 의미였다. 청의 기세에 잠시 위축되는가 싶던 언이 억울한 듯이 응수했다.
“그래도! 집엔 그런 사람이 없느냐? 다른 이들에게선 이런 내음을 맡지 못한 것이냐고.”
“예. 오라버니께서 변고를 당하신 이후로 저희 집은 외부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일절 집에 들이지 않고 있으니까요. 물조차 집에 있는 샘물만 쓰고 있으니 당연히 안전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긴, 신 상궁이 보통 꼼꼼한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리 세자라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도성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도겸의 집이라는 것을.
“실은 나도 며칠 전부터 탕약을 마시지 않고도 두통이 사라져 가뿐하다,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부정할 수가 없어.”
세자의 확언에 금위대장도, 동궁의 내관도 경악할 뿐 결코 반박하지 못했다. 왕의 침전엔 무거운 공기만 흘렀다.
하지만 이대로 세상이 오염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청이 정리에 나섰다.
“아무래도 앵속각이라는 것에 중독된 사람은 비단 저기 누워 계신 분만 해당되는 게 아닌 듯합니다.”
청은 일찍이 가리켰던 담배함을 한 번, 그리고 고스란히 가져다둔 항아리와 주안상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항아리에서만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상 위에 남은 음식에서까지 약간이나마 느껴지는 것을 보면….”
그즈음엔 언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쉬이 청이 내놓을 정답을 유추해 냈다.
“…우물.”
언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는 아주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받아들인 듯 심란한 얼굴이었다.
“당장 궐 안의 모든 우물을 살펴봐야겠네.”
***
“아주매, 무우 여기 남은 거랑 저기 시금치도 있는 거 다 줘 보셔유.”
“뭐? 이걸 다?”
상인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순이는 덤덤했다.
“여기 있는 것도 부족허지 싶은디, 더 없대유?”
며칠째 순이는 장터의 큰손이 되어 있었다. 짐꾼들까지 대동한 채로 장터를 거의 쓸어 가다시피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평소 혼자서 보따리를 달랑달랑 들고 다니며 남산댁의 심부름을 다니던 모습과는 판이한지라, 주변 상인들의 시선이 절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때에 서촌에선 날마다 잔치라도 하는 거야 뭐야?”
순이가 마음이라도 바꿀까 싶었는지 아이가 가리킨 푸성귀들을 주섬주섬 짐꾼의 지게에 올려주며 상인이 넌지시 물었다.
“아니, 저기 궐에선 나라님이 위중하시다 하여 세자 저하께서 대리청정인가 뭔가까지 하신다잖어. 이리 어수선한 때에 서촌 나리라면 곡기를 끊어 가며 통탄해하실 분이 아닌가?”
“맞지, 맞지! 거기다 요즘 툭하면 천변에 죽은 사체가 떠다니기까지 하잖아?”
“어쩐지 중천에 뜬 해가 빛깔이 탁한 것만 봐도 영 조짐이….”
“그런 말씀일랑 마셔유.”
평소 순이가 물건을 사던 상인이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아 별수 없이 다른 상전으로 왔더니 서촌의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옆에서 두릅을 팔던 상인까지 가세하기에 순이는 간략하게 대꾸했다.
“며칠 전부터 나리의 먼 친척 되시는 손님들이 멀리서 오셔 가지구 서촌에 머물고 계셔유. 이것들 전부 손님상 차릴 것들이구먼유.”
“아, 그런 거였어? 손님이 많은가 보네.”
“칼 찬 무사 아자씨들만 혀두 여럿이니 그렇쥬.”
“아유, 그럼 국 한 솥 끓이는 걸로도 부족하겠네!”
웬만하면 바깥에 나가 상인들과 떠들지 말라는 남산댁의 당부를 들었다. 그러나 요 며칠 통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도겸을 생각하니 갑자기 속이 상하는지라, 순이는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 나리가 어디 임금님 편찮으신데 두 다리 뻗고 물 한 모금 편히 넘기실 분이시래유? 당연히 이 시들시들한 시금치마냥 잔뜩 야위어서는 매일 궐이 있는 쪽에다 절하고 계시쥬.”
“아유, 내가 언제 나리께서 그런 분이라고 했대?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그랬지.”
손님들이 머무는 동안 자주자주 오라며, 상인은 순이가 고르지도 않은 더덕과 냉이를 넣어주기도 했다.
“이건 입맛 돋우는 반찬이라도 해서 나리 진짓상에 올려 드리라구, 응?”
“이렇게 많이 주셔두 된대유?”
혹시 장터에서 상인들이 무리하게 끼워 넣어주는 물건은 되도록 받지 말라는 도겸의 당부가 있었다. 그리고 도겸의 말이라면 법처럼 여기는 순이인지라 아무리 공짜라 하여도 아이는 조심성 있게 굴었다.
“얼마 안 돼. 나야 뭐 오늘은 떨이 안 해도 되고 좋지.”
“…그럼 감사히 받을게유.”
주섬주섬 돈을 꺼내는 순이를 바라보던 상인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엽전을 어디서 꺼내는 거래?”
갑자기 쪼그리고 앉아 버선 속에서 엽전을 꺼낸 순이는 손바닥에서 엽전을 셈하기 시작했다.
“아주매는 처음 보시쥬? 지가 염낭 간수가 잘 안 돼 가지구.”
한 번 표낭도에게 염낭을 빼앗겨 본 뼈아픈 기억이 있는 순이는 나름의 수를 쓰기 시작했다. 바로 돈을 분산시켜서 몸 여기저기에 숨겨 두는 식이었다.
“원래 야채 팔던 아자씨는 자주 봐서 아는데, 아주매는 처음 나와서 모르는구먼유.”
그러자 상인이 난색을 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우리 아저씨는 몸이 좀 안 좋아서. 이제 내가 나올 거야.”
“많이 안 좋으시대유? 얼마 전만 혀두 갑자기 기운이 나서 일할 맛 난다구 허시든데.”
순이가 아쉬워하며 물건값을 치르는 동안 한산한 와중에 끼어들었던 상인이 이번엔 청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서촌엔 재간택까지 든 아씨가 계시지 않아?”
순이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했다.
“우리 아씨는 왜유?”
“그야, 이 난리 통에 간택은 제대로 치러지는 건가 궁금하니까 그렇지.”
그렇게 오래 고생했는데 간택이 흐지부지되면 아씨 성격에 도성이 쑥대밭이 되지 않을까. 순이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재간택은 예정대로 한댔어유. 궐에서 사람이 와서 그랬구먼유?”
“그래. 이게 다 세자빈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 국혼 한 번 치르고 나면 다 괜찮아지겠지.”
“그래야지. 동궁에 달빛이 들지 않아 전부 메말라 가고 있었다고 했잖아?”
상인들이 저들끼리 떠들어 댔다. 잔돈을 받아 헤아리던 순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래유?”
“못 들었어? 나라꼴이 이리된 게 글쎄 세자 저하가….”
“크흠! 거, 애 앞에서 별소릴 다 하는구만.”
상인이 막 뭔가를 말하려던 차, 순이가 물건을 사는 걸 묵묵히 지켜보던 짐꾼이 입을 열었다.
“거, 다 샀으면 서둘러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곧 끼니때인데.”
풍채 좋은 사내가 눈을 부라리자 상인들이 갑자기 제각각 딴청을 피웠다. 순이는 지게에 쌓인 물건들을 바라보며 손을 꼽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샀슈.”
그러자 마찬가지로 지게를 내려다본 짐꾼이 혀를 찼다. 지게는 가득 차 있었지만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여간에 팔도가 메마르니 한양 물건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