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같이 평온하다 느끼던 시간들이 말 그대로 일장춘몽이었음을 느끼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파루가 치기도 전, 은밀히 서촌을 찾은 언이 전한 소식은 다분히 충격적이었다. 의복을 갖춰 입지도 못하고 세자를 맞이한 도겸은 그대로 파리하게 굳어졌다.
“주상 전하께서 위중하시다니요?”
“하….”
평소와 달리 급하게 말을 달려 서촌으로 온 언은 한숨도 자지 못한 낯빛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설명했다.
“오랜만에 전처럼 좌상과 한잔하신 것 같은데, 사담을 나눈다며 사관도 내관도 물린 게 문제였어.”
거기까지 들었을 땐 기어이 조익환이 제대로 일을 쳤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갖고 있던 모든 패를 내어놓고 조익환이 빠져나갈 수 없이 압박해야겠다, 거기까지 단숨에 계산하고 있던 참이었다.
“심상치 않게 조용하다 느낀 내관이 뒤늦게 들어갔을 땐 아바마마께서, 그리고 좌상까지도 의식이 없이 쓰러져 있었다더군.”
“…예?”
순간 붓으로 휘갈기듯 적어 나가던 머릿속 답안지에 먹물이 엎어진 것만 같았다.
“커다란 항아리 하나에 가득 담은 술을 함께 마셨거든.”
“독입니까?”
“아니. 당연히 주안상도 술독도 깐깐하게 확인하였네. 자네가 겪은 바도 있지 않나.”
대사례 때 도겸이 죽을 뻔한 일이 아무래도 궐에 한바탕 큰 경각심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하면….”
그동안 궐에선 안팎의 경계를 삼엄하게 유지하며 늘 유사시에 대비했다고 들었다. 왕실로 들어가는 모든 물품들을 두 번 세 번 검수하는 것은 물론이요, 궁녀들과 내관들까지 철저히 단속했다. 심지어는 내부적으로 의심스러운 인원들을 상당수 교체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조익환이 뭔가 저지른 게 아닙니까?”
“일단은 좌상도 같은 술을 마시고 지금 아바마마처럼 의식이 없어서 혐의점이 제3자에게 넘어가 있는 상태야. 사온서를 비롯해 그 술동이를 옮기는 데 관여한 모든 내관과 궁녀들을 하옥시키고 문초 중이긴 한데….”
무의미한 일임을 언도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의 미심쩍은 표정을 도겸이 바로 읽어 냈다.
“조익환이 자충수를 둔 것일까요?”
“그것까진 확신할 수 없지. 하지만 아주 아니라고 배제할 수도 없어. 주변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야. 우리가 다른 사건의 증인들을 모으고 증좌를 찾고 있던 것도 알 테고 조익환의 집을 뒤진 일을 두고 밖에선 심심찮게 조익환이 역모를 꾸민다, 그런 소문까지 나돌고 있지 않았나.”
한마디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위험 부담이 너무도 큰 사건을 꾸몄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자신의 목숨을 걸어 가며.
“성후(임금 신체의 안위)가 많이 좋지 않으신 것입니까?”
“어의가 급히 진맥하고 처치는 하였는데, 한동안 지켜봐야 한다더군. 우선은 그것 때문에 잠시 청이를 데리러 온 것이네.”
역시 도겸은 언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은수저에도 반응하지 않는 독이라면 이전에도 청이 찾아낸 바 있지 않나.
“이번에도 앵속각으로 벌인 짓인지 확인해 줄 이가 필요해.”
증거보다는 옥체의 보전을 위해서라도 두 번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도겸이 바로 움직였다.
“당장 가서 청이를 불러오겠습니다.”
도겸이 막 일어나던 차, 청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럴 필요 없어.”
“전부 들었느냐?”
그 어느 때보다 청을 보며 반색한 언이 물었다. 청은 고개만 끄덕였다. 심각한 상황에 대하여 두 번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언은 일각이라도 시간을 아끼려는지 곧바로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도겸도 뒤를 따랐다.
“어쩐지 요즘 도성 안이 그 냄새로 절어 있다시피 하더라니, 거기까지 들어간 건가.”
두 사내가 문가에 다다를 때까지 가만 기다리고 있던 청이 뭔가를 생각하다 중얼거렸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언과 도겸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 엄중히 단속을 하였는데도?”
언이 억울하다는 듯이 물었지만 청은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의 답을 주지 않았다.
“처음 이 냄새를 맡았을 때보다 진해진 건 확실해. 별로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을 만큼.”
도겸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단순히 집에 군식구가 늘어난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앵속각 냄새 때문에 부쩍 물에 들어가 있으려고 했던 것인가.
“…맞아. 포청이며 한성부도 인원을 충원해 가며 단속하고 있다지만 근래 이런저런 범죄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기도 하였지. 그것도 앵속각에 중독된 자들에 의하여 말이네.”
도겸이 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때, 언이 나직이 현 실정을 고백했다.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아바마마께서 어지간히 골치를 썩이고 계셨지. 좌상과 직접 대작하신 것도 하나의 백성이라도 살리기 위해 좌상에게서 뭔가 얻을 정보가 있나 하셨던 것이라….”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전보다 두 배는 많아진 익위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대문 쪽으로 향했다.
“어쨌든 자네도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게. 아는 이들이 있다면 조심하라 일러 주고. 도성 안팎이 심상치 않으니 말이야.”
“예.”
도겸에게는 궐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리 은밀히 움직여도 눈과 귀가 많을 것이기에 도겸도 구태여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급하게 나온 남산댁이 청의 장옷을 챙겨 주었다.
언이 말에 오르기 전 도겸에게 나직이 인사를 건넸다.
“청이는 금방 돌려보낼 테니 걱정 말고.”
“…예. 조심히 가십시오.”
장옷 바깥으로 눈만 드러낸 청과 시선이 마주친 도겸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녀오거라.”
“네, 오라버니.”
무뚝뚝하게 대꾸한 청이 돌아서자 먼저 말에 오른 언이 손을 내밀었다.
“자, 내 손을 잡거라.”
도겸은 청이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며 언의 손을 잡지 않고도 혼자서 말에 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을 깨고 청은 언의 손을 잡고 사뿐히 말 위에 올랐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언이 돌아보았다.
“무어 할 말이 있느냐?”
“아… 아닙니다.”
차라리 청이를 따로 은밀하게 궐에 보냈다면 혹시 모를 시선조차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청이 몰래 후원에 들어갔던 일로 분노했던 과거의 제가 본다면 비웃을 일이었다. 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청을 보는 게 불편한 나머지 어떻게든 청이 언과 닿지 않을 방법을 떠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다못해 청을 보고도 난동을 부리지 않고 얌전한 말을 원망하고 있지 않나.
도겸은 새삼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속이 좁다 못해 투기에 충심까지 흔들리고 만 못난 사내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럼 서둘러야겠어. 자네는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말게. 알겠나?”
“…예.”
단단히 당부한 언이 말을 호령하며 땅을 박차고 나아갔다. 많은 익위사들이 말을 이끌어 세자의 앞뒤를 벽처럼 둘러싸고 지키며 속도를 맞추었다.
그리고 홀로 남은 도겸은 세자의 일행이 골목에서 아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나리, 그만 들어가시지요.”
곁에서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남산댁조차 기다리다 지쳐 조용히 권할 정도였다. 그러나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도겸은 결코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조익환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술수 외에도 머리와 가슴이 각기 다른 이유로 복잡하게 굴러가는지라 더욱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청은 동이 트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새벽닭이 울기엔 아직 달이 하늘을 유영하던 시각, 청은 언의 안내를 받아 무려 임금의 침전에 들어가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조익환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어의가 급히 진맥한 뒤에 사가로 옮겼지. 아직 의식이 없다 들었다.”
거대한 건물 안엔 세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최소한으로 줄여 놓은 인원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좋은 일로 왔다면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겠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제대로 둘러볼 틈도 없었다.
“청아.”
청이 고요히 잠든 임금을 가만 지켜보는 동안 언이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정적을 깼다.
“그래서 전하께선 어떠신 것 같으냐?”
언을 따라 밖으로 나온 직후부터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청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언이 고스란히 남겨 둔 주안상과 항아리도 확인한 뒤였다.
청은 먼발치서 지켜보는 동궁의 내관과 금위대장의 눈치를 살피며 말투를 꾸며 냈다.
“냄새가 진합니다. 살아 계신 것이 신기할 정도로요.”
“…하.”
언이 낙담하는 틈에 청은 멋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그러느냐?”
“냄새가 느껴지는 곳이 또 있습니다.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뭐? 아니, 괜찮긴 하다만….”
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곧바로 따라 일어났다. 방 한쪽에 마련된 서안 앞에 선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엔 뭐가 들어 있습니까?”
청이 가리킨 것은 서안 옆에 놓인 작은 자개함이었다. 언은 답하는 대신 직접 열어 보여 주었다.
“여긴 주로 아바마마께서 피우시는 담뱃잎과 곰방대가 있는데.”
그리고 뚜껑이 열리자마자 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담배라면 남산댁도 많이 피우는데 어째서.”
언은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청에겐 두통이 일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다. 불쾌감이 진해져 당장이라도 몸을 씻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충격을 받은 언이 상자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전하께서 평소에도 앵속각에 노출되고 있으셨단 말이냐?”
“…아니요.”
“그럼 무어란 말이냐?”
“그러니까 소녀의 말은 정확히, 전하께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뭐?”
청은 입구 쪽에 서 있던 언의 내관에게 대뜸 다가가 킁킁댔다.
“어, 어찌!”
가만히 서 있다 놀란 내관이 뒤로 물러났지만 언이 단호하게 저지했다.
“이 아이를 믿고 가만히 있어 보게, 유 내관.”
세자의 명령에 내관이 입을 꾹 다물고 청의 눈치를 살폈다. 청은 유 내관의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며 감각을 집중시켰다. 그러다 덥석 긴 옷소매에 가려진 유 내관의 손을 잡아 꺼냈다.
“아니, 어찌 이러는…!”
유 내관이 당혹스러워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청이 놓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소매를 걷어 팔을 드러냈다.
“아니, 유 내관… 자네 살결이 어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