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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69)화 (154/197)

“아… 내가 그랬나.”

자꾸 화월과 닿는 듯하여 조금씩 거리를 벌린다는 게, 대각선으로 걷는 꼴이 되어 있었다. 도겸은 멋쩍게 웃으며 제겐 별달리 필요치 않은 겉옷을 내어주었다.

“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화월은 거절하지 않고 냉큼 도겸의 옷을 걸쳤다. 도겸도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차라리 제 옷을 화월이 걸친다면 화월과 조금 닿아도 냄새가 제게 묻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옷이야 청을 만나기 직전에 갈아입으면 그만이었다. 청에게 팔이 부러지거나, 화월이 내던져질 우려가 가시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어 근심이라도 있던 것이냐.”

큰 보폭을 가진 도겸의 걸음이 화월에게 맞추어 자연히 느려졌다.

“잠을 못 잔다니.”

“별일은 아닙니다. 원래 잠자리가 바뀌면 적응하기까지 조금 걸리는 편이라서요.”

“그러기엔 너무 한참 걸리는 것이 아니냐? 어디 상한 곳은 없고.”

도겸의 걱정에 화월이 수줍게 웃었다.

“어찌합니까? 이리 걱정을 해 주시니, 소인 앞으로도 잠들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럼 나는 서둘러 일을 끝내고 너를 어서 돌려보내야겠구나.”

“어찌 그리 매정하셔요.”

화월이 도겸의 팔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도겸은 농이라는 듯 옅게 웃었다.

“그래도 잠은 자야하니 되도록 밤이슬은 맞지 말거라. 도리어 몸이 차게 식어 잠들기 어려울 테니.”

“무어, 곁에 따끈한 사내라도 있다면 훨씬 나을 텐데….”

“쿨럭.”

화월이 중얼대는 말에 도겸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터트리고 말았다.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찌 어엿한 객주가 되어 그리 조심성 없이 군단 말이냐.”

“사실이지 않습니까? 홀로 이불을 데우느니 곁에 누군가 있다면….”

“그만, 그만.”

미처 부채를 지니고 있지 않은지라 열이 오른 얼굴을 식힐 수가 없었다. 도겸은 화월에게서 약간 거리를 벌리는 쪽을 택했다.

“어찌 자꾸 멀어지시는 것입니까.”

“그야 네가 남사스러운 이야길 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다소 툴툴대며 대꾸하던 도겸이 무심히 시선을 화월의 어깨 너머로 던졌을 때였다.

“그러니 그런 이야긴 그만….”

“…….”

시선의 끝엔 무심한 얼굴로 서 있는 청이 있었다. 놀란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한데 섞여 눈이 커진 도겸이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차였다.

“기생 출신인 소인에게 객주의 역할을 맡기시며 그러셨지요. 남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말라고요. 한데 어찌 정작 이런 때엔 그리 신경을 쓰시는 것입니까.”

“어? 어… 아니, 나는.”

“나리.”

화월이 도겸에게 덜컥 안기며 낯 뜨거운 고백을 해 왔다.

“…나리의 이부자리는 소인이 데워드리면 아니 되겠습니까.”

“그, 그 무슨.”

당장 청이 달려와 화월을 내던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청이 오기도 전에 도겸이 먼저 밀쳐 내며 크게 나무랐다.

“아니 된다, 몇 번을 말하게….”

왠지 불장난을 치다 걸린 아이처럼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화월에게 잘라 말하며 다시 청이 있는 쪽을 힐끔댔다.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그런데 제게 달려와 화를 낼 줄 알았던 청이 그대로 돌아서 어디론가 쏙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명할 거리를 부지런히 떠올리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나리.”

그사이 아무것도 모르는 화월은 어느새 울먹이고 있었다.

“소인은 나리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 다치시게 두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도겸은 마음을 다잡았다. 청이 뭔가를 오해하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우스워졌다.

“내가 아직 많이 부덕한 모양이구나. 네가 그리 불안해할 만큼.”

오해를 한들 풀어서 무엇 할까. 아무 의미도 없는데. 도겸은 사라진 청을 따라가기보다 눈앞의 화월과 대화를 마무리하기를 택했다.

“그것이 아닙니다. 소인에게 연심을 품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지금처럼 필요한 때에 이 집의 안주인으로서 할 일을 할 수만 있어도 소인은 족합니다.”

“화월아.”

“대를 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청이 아씨를 간택에 들여보낼 때도 구태여 나리께서 사사로이 움직이고 계시지 않습니까. 소인이 있다면 침모든 수모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나리께선 다른 할 일이 더 많으실 텐데요.”

침착하게 불러도 화월이 막무가내였다. 결국 도겸은 단호하게 화월을 잡아 밀어냈다.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필요만으로 부인을 들일 생각은 없다. 이제 관직을 내려놓아 비교적 여유가 많기도 하고….”

누군가를 연모해 보니 화월이 가진 마음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이제야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거절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더군다나 너는 사랑 받아 마땅한 여인이거늘, 어찌 의무만으로 살겠다는 것이냐. 그건 내가 허락할 수 없다.”

“하면 소인에게 그 마음을 주실 순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화월은 도겸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내어놓았다.

둘 사이엔 잠시 뜨겁고도 차가운, 복잡한 공기가 지나갔다. 침묵하던 도겸이 어렵사리 거절했다.

“마음이란 게 어찌 생각대로만 되겠느냐. 네가 고생하며 상처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구나.”

“함께 부대끼며 살다보면 제게도 언젠가는 나리의 마음을 얻을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화월은 쉽게 물러나지 않고 끈질기게 굴었다. 그럴수록 도겸은 더 매정하게 굴어야함을 알고 있었다. 마음이란 것은 한 치라도 더 깊어지기 전에 끊어내는 것이 맞았다.

“나는 그리 막연한 가망에 너를 희생시킬 생각이 없다. 너는 자신을 조금 더 아낄 필요가 있어.”

“어찌 나리께선.”

고집을 부리던 화월이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흔한 사내들과 이리도 다르신 것입니까. 다른 사내들은 그저 대를 잇기 위해, 뒷바라지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해 정을 붙이지도 않은 여인과 그럭저럭 혼례를 올리고 부대끼며 산단 말입니다.”

“…….”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임을 모르지 않았다. 도겸이 그저 침묵하자 민망했는지 화월이 엉망이 된 얼굴을 숨기며 스스로 물러났다.

“송구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리께 감히 연심을 품어놓고 억지를 쓰다니.”

어쩌면 난감한 차림으로 나온 것이 단순히 잠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었던 듯싶었다. 그런 화월의 소망을 이루어줄 수 없는 도겸은 조용히 손님방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저 며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다 보니 잠시 흐트러진 게 아니겠느냐.”

“…….”

“가자. 데려다주마.”

결국 화월은 견고한 요새와도 같은 도겸의 마음 안에 끝내 들지 못했다. 둘은 말없이 화월의 방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차윤아.”

화월이 갑자기 기명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도겸을 올려다보았다.

“…예. 말씀하십시오.”

“너는 평생 너를 아껴줄 수 있는 사내를 만나거라.”

“…….”

“네가 사랑받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을 내어줄 수 없는 나를 네 짝으로 용납할 수가 없구나.”

마침내 화월의 불 꺼진 방 앞에 다다른 도겸이 화월과 마주 보고 섰다.

그를 뚱하게 올려다보던 화월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럼 차라리 평생 그 누구도 아녀자로 들이지 마십시오.”

“뭐.”

“소인이 인정할 수 없는 여자가 나리의 배필이 된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 말에 도겸은 긴장하기보다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리 하마.”

어차피 이 마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선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도겸은 욱신대는 마음을 누르며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어서 들어가 몸을 누이거라.”

화월은 순순히 받아들이는 도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댓돌 위로 올라섰다.

“울적한 밤이라서, 잠을 못 잔 탓에 저도 모르게 쏟아 버린 마음이 아닙니다.”

도겸에게 작은 등을 보인 채로, 화월이 가라앉은 밤공기에 제 남은 마음을 실어 날렸다.

“이리 급하게 꺼내려던 마음도 아니긴 하였으나… 날이 밝는다고 억지로 잊으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주워 담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

“그저 두십시오. 언젠가는… 홀로 마를 테니.”

그 말을 끝으로 화월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더 깊어지기 전에 마음을 끊어낸다고 하여 상처를 안 받는 것은 아닐 텐데. 도겸은 덜 익어 떫은 열매를 씹은 듯 불편한 얼굴로 잠시 불이 꺼진 방문을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

그의 걸음이 향한 곳은 당연하지만 안마당이었다. 점차 빨라지다 못해 내달려 단숨에 들어선 청의 공간은 더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청아.”

깨어있다면 어디서든 듣고 나타나리라 생각한 그가 나직이 불렀지만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청아. 아까 내가 본 것이 헛것이 아니었다면 좀 나와 보거라.”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웠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고 있는 것이냐.”

사실 그의 부름을 듣고 청이 나온다면 무슨 이야길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막연히 그 하얀 얼굴을 보고 싶었던 도겸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결국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문득 언젠가 청이 제 몸에서 냉독을 빼냈을 때가 떠올랐다. 눈만 마주치면 입을 맞추었던 기억이 샘솟는지라 도저히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피해 다녔었는데, 이리 청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 새삼 그때 청이 상당히 답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나도 홀로 말라가야 할 터인데.”

다 알면서도 못내 남은 미련에 이리 바보같이 굴게 되는구나. 뒷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도겸은 쓸쓸히 안채를 뒤로하고 중문을 넘어 사랑으로 돌아갔다.

유난히 까만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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