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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68)화 (153/197)

“짐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증좌에 충실한 편일세. 이 자리에 앉아서는 그 어떤 것도 허투루 결정할 수 없지. 설사 지레짐작하더라도 그것과 벗에 대한 우애는 별개가 아니겠나.”

“그럼 이미 내정되어 있던 세자빈을 두고 갑자기 왕대비 마마께서 간택에 관여하시는 건 무엇입니까.”

그 말에 잔을 기울이던 임금이 그 용안의 눈을 들었다.

“음.”

“제 여식을 세자빈으로 들이기로, 이미 약조하셨던 것 아닙니까.”

“아, 그랬지.”

‘그랬지.’라니. 조익환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온화한 낯을 드러냈다.

“한데 어찌 이리 경쟁을 하게 하십니까. 재간택에 든 처녀가 무려 일곱이지 않습니까.”

보통은 내정되어있다면 형식상의 초간택에서 아예 세 명 이하로 선발해 삼간택까지 가지 않고도 재간택에서 세자빈을 뽑곤 했다. 하지만 이번 초간택에선 무려 일곱이나 뽑았다. 이는 삼간택까지 가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과인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그리고 지고한 천자의 입에서 나오기엔 다소 가볍고도 싱거운 인정이었다. 뭔가 핑계를 댈 것이라 예상한 조익환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예.”

“면목이 없네. 어마마마께서 간택에 참여하지 않으셨다면 중전과 이야기해서 자네와 약속했던 것처럼 설아 그 아이를 세자의 빈으로 들였을 테니까.”

“하면….”

“한데 어마마마께서 하시는 말씀이, 확실히 해두자 하시니 이쪽에서 반박할 말이 없지 않았겠나.”

조익환이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왕이 바쁘게 입을 놀렸다.

“당연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 하였지. 그럼 무어하나?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요지부동이시니 원.”

술을 털어 마신 임금이 다시금 술동이를 찾으며 덧붙였다.

“도대체가, 간택엔 앞으로 관여하지 않겠다 하셔놓고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러시는 것인지 알 길이 없어.”

조익환은 들고 있던 술잔을 탁 내려두었다.

“하면, 소신과의 약조는 없던 일이 되었다… 이 말씀이십니까.”

“일찍이 국혼과 관련하여서는 어마마마께서 정정하신 한 모든 권한을 드리겠다, 그리 약조해둔 게 있어 말이네. 그것은 옥새까지 찍어가며 단단히 약조를 해둔 것이라.”

국새라. 뻔뻔하고도 시원스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를 건네는 임금을 두고 조익환은 기가 찰 지경이었다.

“어찌 천자(天子)가 되셔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한 입으로 두말이라… 따지고 보면 해주 목사와 최 직각처럼 자네도 아직 혐의점을 갖고 있지 않나.”

“…….”

“설마 최 직각의 사촌 누이라는 그 아이를 견제하는 것이라면 글쎄, 둘 다 집안의 명예가 실추된 와중이니 재간택에 들지 못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임금은 교활하게도 조익환의 뒤에 쌓여 있는 여러 혐의들을 걸고넘어졌다. 혀는 조금 꼬였어도 그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내가 어마마마께 목소리를 좀 더 키울 수 있었을 텐데. 안 그렇겠나.”

상 아래에 놓인 조익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점희라는 년을 그냥 두지 않고 숨통을 끊어놓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이리 화가 치밀어 오르진 않을 텐데 말이다.

“자네의 여식이야 얼마나 공들여 키웠는지 다 알고 있으니 너무 염려 말게. 아마 어머니의 깐깐한 안목에도 무난하게 맞아 들어갈 테니. 자, 들게나.”

“…예.”

말투까지 편해진 임금은 어지간히 취기가 오른 듯했다. 음주에 꽤 강한 사람인 것을 아는지라 조익환은 침착하게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술동이가 전부 비어갈 무렵, 꼿꼿하게 앉아 있던 임금이 기어이 흐트러졌다.

“전 대사헌, 그 위인이 그리 허망하게 가 버리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셋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을 터인데 말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 겨우 술동이 하나를 비웠는데 벌써부터 이리 취기가 오르는 것이… 다른 때와는 영 다른 것 같군.”

조익환은 슬쩍 거대한 술동이를 들여다보았다. 저는 한두 잔 마시지도 않았건만, 마주 앉은 이가 홀로 한 동이를 다 비운 듯했다.

슬슬 때가 되었다.

“전하.”

“으응.”

임금, 이창이 조익환의 부름에 눈을 뜨려 했다. 하지만 다른 때보다 더 무거울 눈꺼풀을 뜨기 어려워 보였다.

“아니, 어찌….”

“그럼 소신에게도 옥새를 찍어 약조를 해 주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 무어.”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임금이 곧장 자세를 바로 하려다 휘청했다. 상을 짚고 버티려 했건만, 쉽지 않았다. 결국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조익환은 내내 웃고 있던 입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슬쩍 모로 기울였다.

“그랬다면 소신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그, 게… 무슨….”

“그저 한동안 거동이 좀 불편하실 뿐, 당장 조선의 백성들이 상을 치러야 할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

“농도를 조절하여 필요한 만큼만 몸을 망가트리도록, 그동안 수많은 실험을 거쳤기 때문이지요. 특히 주상 전하께 쓸 것이라 이번엔 저도 각별히 신경을 좀 썼습니다.”

숨조차 쉬기 어려운 듯 가쁜 숨을 내쉬는 임금을 바라보며 조익환은 몸을 일으켰다.

“세자빈 자리만 주었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임금을 두고 조익환은 임금의 서안으로 향했다. 평소 밤늦게까지 업무를 보는 임금 때문에 아직 상서원에서 가져가지 않은 옥새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조익환은 바닥에 쓰러진 왕을 보며 혀를 찼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텐데.”

“…….”

조익환은 백지에 대고 옥새를 찍어 눌렀다.

“이 자리에선 그 어떤 것도 허투루 결정할 수 없다 하였던가.”

옥새를 찍은 백지를 잘 접어 품 안 깊숙한 곳에 잘 갈무리한 조익환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글쎄… 그럼 그 말에 따라 자네가 제대로 결정할 수 있게 해 주지.”

그러곤 아직 술이 남은 제 술잔에 품에서 꺼낸 약을 탔다. 철두철미한 조익환은 약을 싼 종이마저 촛불에 태워 증거를 인멸했다.

“이창, 더는 그리 뻔뻔하게 나와의 약조를 깨지 말게.”

결국 의식을 잃은 왕의 빈 잔에 제 잔을 가져다 가볍게 부딪친 조익환이 단번에 비워냈다.

“그러니 계속 내가 재밌는 짓을 궁리하게 되지 않나.”

큭큭대며 웃던 조익환이 곧 왕이 그랬던 것처럼 옆으로 기울어 쓰러졌다.

그럼에도 그 입가엔 아직 미소가 남아 있었다.

***

왠지 심란한 밤이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한 탓에 잠에서 깬 도겸은 얇은 겉옷만 걸치고 밖으로 나와 집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일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건만 왜 그럴까. 가만 고민하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안채 쪽을 향했다.

“아….”

원인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며칠 동안 한집에 있으면서 이야기조차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청이었다. 저조차도 몰래 은둔하며 이런저런 일을 보느라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얼굴을 못 볼 일인가 싶었다.

“무어, 집 안이 다른 때와 달리 시끄럽긴 했지.”

물론 홀로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은 또 아니었다. 갑자기 집에 머물고 있는 객이 월등히 늘어나지 않았나. 아무리 조용히 지낸다고 하여도 인간보다 월등한 청력을 가진 청은 모두 고스란히 느낄 테니 말이다. 원체 이 땅에 온 뒤로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여인은 군식구까지 늘어나자 전보다 더 자주 샘에 들어가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려워졌다.

그래도 밤엔 잠깐 나와 있지 않으려나. 도겸의 걸음이 자연스레 안채를 향했다. 미처 고민을 해 보기도 전에 발이 절로 움직이는 터라 도겸은 스스로를 막지 못했다.

“나리.”

그러나 중문을 넘기도 전에 행랑 마당 쪽으로 건너온 화월과 마주치고 말았다.

“어… 화월이구나. 어찌 야심한 시간에 나와 있는 것이냐.”

“그건 제가 하려던 말이었습니다. 소인은 잠이 오지 않아 조금 걷던 차였습니다만.”

“그렇구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잠시 집 안을 한 바퀴 둘러오려던 참이었지.”

그러자 화월이 쪼르르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럼 함께 걸으시겠습니까.”

곧장 안채로 가려던 도겸은 조금 난감했다.

“아, 둘러와서 이제 막 들어가려던 것이다.”

화월에게선 더는 백단향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청이라면 화월의 체향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어쩐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소인과 한 바퀴 더 둘러와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그러나 화월이 도겸에게 팔짱을 끼며 성큼 다가오는 통에 어설픈 거짓말이 효과가 없게 됐다.

“소인이 혼자 걷기엔 너무 어두운지라 무섭습니다.”

“…그래.”

결국 도겸은 원래의 목적을 뒤로하고 화월과 함께 밤바람을 맞게 되었다. 선선한 꽃향기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밤은 생각보다 꽤 포근했다.

“조금 쌀쌀하지 않습니까.”

한참 공기가 사뭇 너그러워졌다 생각하던 차, 화월이 정반대의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도겸은 도금 의아하게 되물었다.

“추운 것이냐.”

“예. 소인, 장옷을 두고 나왔더니 조금….”

그러고 보니 화월은 하얀 소복 차림이었다. 달빛 아래로 와 다시 보니 속살이 적나라하게 비칠 정도로 얇은 속적삼 한 겹만 입은 채였다. 흠칫 놀란 도겸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편으로는 늘 청은 덥다고만 했던지라, 춥다고 하는 이와 함께 있자니 영 낯설게 느껴졌다. 그만큼 청에게 맞추어 익숙해진 제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고뿔에 걸리면 어쩌려고. 그만 들어가겠느냐.”

“싫습니다.”

방에 데려다주려 했건만, 화월이 고집을 부렸다.

“나리와 이리 시간을 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걸으면 추위는 금방 가실 테니 소인을 너무 밀어내지 마십시오.”

역시 화월은 눈치가 빨랐다. 도겸이 어려워하는 것을 알아차린 뒤였다.

“미, 밀어내다니.”

“그게 아니라면 어찌 그리 계속 옆으로 가십니까? 못 뵌 사이 꽃게가 되어버리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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