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67)화 (152/197)

“아….”

남산댁은 다소 충격을 받은 듯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보통은 남녀 간 평생을 해로하자며 나누는, 그런 연정 어린 약조가 아닙니까.”

“연정.”

“그런 약조를 나눈 상대가 다른 이와 있을 때 공연히 울화가 올라오거나 시기심이 들어 떨어트려 놓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이, 바로 투기이고요.”

“…투기.”

“아까 아씨가 객주님을 밀치며 화를 내신 것이, 바로 투기가 표출된 모양이었지요. 오누이의 관계라기엔 지나친지라 강샘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청은 무심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도겸의 팔을 움켜쥐었던 손이었다.

“그게… 투기라고.”

“그것이 아니라면 아씨는 나리께서 저하와 어울리는 것도 용서치 않으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감정의 정확한 정의를 알지 못하는 청에게 남산댁이 다시금 나직이 물었다.

“아씨께서는 약조대로 나리께 다른 사람이 가까이 하는 게 싫으신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여인만 곁에 있는 게 싫으신 것입니까.”

그제야 청은 정확히 제 감정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저는….”

도겸과 함께 저자를 걸을 때 다른 처자들이 그를 바라보는 게 불쾌했다. 주막에서 만난 주모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게 언짢았으며 세책점에서 만난 송유화가 그에게 차를 마시자 권하는 게 싫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여인이었다. 의외로 세자와 죽고 못 사는 것처럼 굴 때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말이다.

“오라버니를 다른 여인에게 빼앗기기 싫습니다.”

“…아이고.”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남산댁이 탄식했다. 왠지 모르게 크게 당혹스러운 것 같았다. 다른 때 같았다면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수놓는 일을 멈추지 말라 하였을 텐데, 어쩐지 수업은 뒷전이 되어 있었다.

“이를,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제가 오라버니를 갖고 싶어 하는 게, 그리 슬퍼하실 일입니까.”

남산댁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안타까워하기에 청은 의아할 뿐이었다.

“예. 슬픈 일입니다.”

“어째서요.”

“아씨, 잘 들으십시오.”

남산댁은 앞에 놓인 수틀을 옆으로 치우며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오누이 간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여인에게 빼앗기기 싫다는, 그런 마음도 가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마음을 먹든지 그것은 제 의지가 아닙니까.”

“그걸 아씨께서 표출하고 계신다는 게 문제이지요.”

“그거야….”

“아니 됩니다. 안 돼요. 아씨는 재간택에 들어 삼간택까지 거치고 나면 엄연히 이 나라의 세자빈이 되실 몸입니다. 한데 자칫 표면적으로 사촌의 관계인 나리와 추문이라도 일면 이 일은 모두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청은 순간 남산댁이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다.

“그럼 최도겸은 왜… 세자빈이 되어 달라면서 나한테 서로를 독점하자는 조건을 건 거야.”

은연중에 수업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편하게 굴었지만 사안이 남다른지라 남산댁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요. 아마도 그 약조는 지금 아씨가 갖고 계신 감정으로 이어지는 조건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결코… 아니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마도 그땐 나리께서도 이토록 마음이 깊어질 거라 생각지 못하셨겠지요. 그러실 분이 아니기도 하고… 아마 아씨께서 불한당과 함부로 어울릴까 걱정하여 그런 조건을 말씀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청이 눈을 깜빡이는 동안 남산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제가 감히, 함부로 정리해 드릴 감정은 아닌 듯합니다.”

“…….”

“이건 제가 나서선 아니 되는 일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제가 아씨께 가르쳐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가르칠 게 없다니.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스승에게 처음으로 단호한 포기 선언을 들은 청으로서는 갑자기 만만한 인간 세상이 아주 어렵게 느껴졌다.

상관 없지 않나. 어차피 최도겸은 세자빈이 되어달라 했지, 세자에게 연심을 품어달라 한 것도 아닌데.

청이 답답해하던 와중에 남산댁이 청으로 하여금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꺼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씨께서 나리께 갖고 계신 감정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신뢰와 연심은 엄연히 다르니까요.”

“그, 추문이라는 거 때문에.”

“예. 그 추문이라는 것이 잘못 퍼졌다간 지금껏 어렵게 이뤄온 모든 일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정리해 줄 감정은 아니라면서 남산댁은 당장 청이 처해 있는 상황을 확실하게 정리해 주었다.

“…이전에 해 주 목사 어르신과 나리께서 불명예를 입으셨던 것 이상으로요.”

청은 잠시 신중하게 고민했다. 머릿속으로 그동안 이곳에서 배운 조선의 법도를 하나하나 헤아렸다. 책에서 익힌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이 땅은 예와 질서가 우선되는 곳에서 남녀는 지극히 분리되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미 죽어 버린 성현들은 용이 아니라 몰랐던 것일까. 그들이 책에 쓴 내용과 실상은 전혀 달랐다. 적어도 청이 여기서 보고 들은 수많은 사실에 의하면 그랬다.

인간 남녀들은, 밤낮없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배운 것과 실천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는 줄로만 알았다. 사실 조선 땅에는 성현들의 책을 배우는 사람들이 적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런 가르침을 남긴 사람들이 죄다 죽어서 그다지 상관없는 줄만 알았는데.

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최도겸을 제외하고.

“불명예를 입었던 일 이상이면….”

그리고 어렵게 이뤄온 모든 일. 그건 하필 도겸의 소원과도 직결된 일이었다. 그게 지금 제가 가진 감정과 상충되는 것이라면 청의 선택은 하나였다.

“…그럼, 나는 최도겸을 갖고 싶은 마음을 표출하면 안 되는 거네.”

남산댁은 일찍이 말한 대로 그 답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 주지 않았다. 다만 그 어느 때보다 붉어진 눈빛으로 대신했다.

그게 정답이라고.

***

“그 눈은 어찌 돌아온 것입니까.”

부쩍 가까이 앉은 화월의 물음에 도겸은 살짝 엉덩이를 뒤로 물리며 대꾸했다.

“그렇게 도성으로 돌아오고 얼마 가지 않아서….”

어찌 설명해야 할까. 말끝을 흐리며 잠깐 고민하던 도겸의 눈에 초점이 흐려졌다.

문득 당시에 느꼈던 눈의 작열감이 새록새록 떠올라 무심코 손으로 한쪽 눈을 덮어야 했다. 눈이 터질 것같이 뜨거웠던 고통은 결코 두 번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것을 화월에게 전달할 수는 없었다. 전달한들 전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 되었다.”

다만 이제야 깨달은 게 있다면 아마도 제게 넘쳐나는 열기가 눈을 가리고 있던 뭔가를 태워 버린 게 아닐까.

“나리께선 현재 이 땅에서, 가장 강한 불의 사주를 가진 사람이시니까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용의 피에 들어있다던 독을 태웠다든지.

“그리 말씀하실 줄 알면서 소인이 공연히 물었습니다.”

화월이 수줍게 웃으면서도 옷고름 끝자락으로 눈가를 찍어냈다.

“아니다. 걱정이 많았겠구나.”

도겸은 너그럽게 미소 지으며 슬쩍 손바닥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눈을 뜨고 처음 청을 마주했을 때 깨달은 감정은 이처럼 불시에 불쑥불쑥 용천수처럼 솟구쳐 당혹스럽게 했다.

그리고 그 빈도가 심상치 않게 잦아지고 있었다. 머리와 심장이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도성까지는 별문제 없이 들어왔지만, 그래도 이 집으로 갑자기 여러 사람이 찾아든 것을 보았다면 심상치 않게 생각할 것입니다.”

잠시 찾아든 정적을 삼득이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모르지 않는 도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의원을 불러놓았다. 의원들이 오가는 것도 보여 주면 도성 검문을 거칠 때 했던 이야기를 확인하여 일맥상통함을 파악하겠지.”

“그래도 의심하지 않을까 싶은데, 따로 거처를 마련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도성을 통틀어 이 집이 가장 안전하니 그건 걱정 말게.”

단호하게 잘라 말한 도겸이 삼득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그리고 저쪽에서 뭔가를 의심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증인을 세워 선공할 것이네. 결코 빠져나갈 수 없게 말이지.”

그러자 감정을 추스른 화월이 삼득에 이어 걱정되는 부분을 짚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조익환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것까진 증명하기 어려울 텐데요. 광연이도, 천덕이라는 놈도 명령한 사람이 조익환이라고 하진 않았으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가만 찻잔을 내려다보던 도겸이 냉철하게 변한 눈을 들어올렸다.

“…그래. 증명하긴 어렵겠지.”

화월과 삼득에게 한 번씩 닿은 도겸의 시선이 그대로 흘러 문갑 위에 놓인 검집에 가 닿았다.

최씨 가문에 대대손손 가보로 내려온 검이었다. 철저히 지키기 위한 검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을 자극하기엔 충분하지 않겠나. 우리가 데리고 있는 증인들을 통해 몇몇 혐의의 죄상을 밝혀내진 못하겠지만 그자가 무엇을 위해 그리 많은 사람을 밟고 선 것인지, 그 궁극적인 목적을 드러낼 것이네. 그럼 더는 가볍게 부정할 수 없을 테고.”

도겸의 목적은 꿈틀한 조익환이 섣불리 움직이려다 허점을 드러내는 순간을 잡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을 납득한 화월과 삼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면, 언제 일을 벌일 작정이십니까.”

도겸은 슬쩍 상체를 앞으로 빼며 짧게 대꾸했다.

“최대한 빨리.”

***

“요즘 소신에게 너무 야박하신 것 아닙니까.”

술잔을 든 조익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주 앉은 임금이 웃으며 술동이에서 직접 술을 퍼담았다.

사관도 들이지 않은 야심한 밤의 너른 침전은 수면 아래 까만 밑바닥처럼 고요하고 어두웠다.

“진정 그랬다면 경과 이리 대작하지도 않았겠지.”

“참으로 소신이 그런 짓을 벌였다, 그리 짐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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