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66)화 (151/197)

제법 엄하게 다그쳤지만 청도, 화월도 도겸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어쩐지 철없는 누이가 둘이 된 것 같아 갑자기 골이 지끈거렸다.

“청이 너는 방으로 돌아가 있거라.”

“싫습니다.”

갑자기 청이 도겸의 팔을 붙잡으며 매달리는 통에 도겸으로서는 도통 난감한 게 아니었다. 하는 수없이 남산댁에게 슬쩍 눈짓하며 도움을 청하자 귀신 같이 알아차린 남산댁이 앞으로 나섰다.

“아씨, 그만 들어가시지요. 남은 수업이 있지 않습니까.”

“…….”

그러자 청이 말없이 도겸의 팔을 강하게 쥐었다. 순간 도겸은 팔이 부러질 듯한 충격에 헛숨을 들이켰다.

“큭, 그… 청아.”

“냄새에 민감한 누이를 위해 부디.”

마침내 팔을 놓아준 청이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도겸을 올려다보았다.

“저 여자는 가까이 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왠지 그랬다간 전신의 뼈마디를 모두 으스러트리겠다는 협박으로 들렸다. 도겸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그래.”

그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청이 남산댁을 따라 안채 쪽으로 사라졌다. 어차피 소리를 전부 들을 수 있기에 상관없기도 하거니와 화월과 마주치기만 하면 칼바람이 쌩쌩 불어대는지라 되도록 최대한 떼어놓을 심산이었다.

“화월아. 너는 그….”

청을 들여보내 놓은 도겸은 우선 화월의 향부터 단속했다.

“향낭을 좀 떼어두는 게 좋겠구나. 여기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예. 그리하겠습니다.”

화월이 붉은 입술을 짓씹으며 품에서 은장도를 꺼냈다. 그러곤 향낭을 그대로 뚝 잘라냈다.

“아니, 그렇게 잘라내라고는….”

“어차피 버릴 것이었습니다.”

“…….”

뭔가 난감했지만 할 일이 많은 상황에 화월에게만 관심을 쏟을 수는 없었다. 도겸은 침착한 시선으로 마당 한 편에 줄줄이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오는 길은 무탈하였는가.”

“예. 서신을 주신 대로 위장하여 오는 동안 의심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일도 수월했고요.”

일찍이 도겸은 미리 편지로 삼득에게 적당히 몸이 쇠하였을 천덕을 병자로, 그리고 광연과 석이를 자식들처럼 보이게 하여 병자를 치료하려는 가족처럼 위장시킨 뒤 한양으로 데려오게 했다.

물론 처음엔 세자에게 알려서 더 안전하게 데려올 방안을 모색해 볼까도 했었다. 하지만 일찍이 조익환을 통해 직접 알게 되지 않았나. 궐 안에 소식이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내심 걱정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모두 별 탈 없이 제 집 담장 안으로 들어왔으니 우선 한시름을 덜어 놓았다.

도겸은 한 편에 조용히 놓여 있는 낡은 가마를 턱짓했다.

“저것을 열어보아라.”

그러자 호위로 따라온 듯한 누군가 잽싸게 달려가 부서질 듯한 가마의 문을 들어 올렸다. 도겸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몸을 낮추었다. 안쪽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지독한 악취에 부채를 찾아 펼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끄, 끄윽….”

멍석말이라도 당한 양 멍석에 덮인 채 가마 안에 찌그러져 있는 사내는 천덕이었다. 언뜻 누군지 알아보기도 어려운 몰골이었다. 형편없이 비쩍 메마른 것을 보니 삼득이 그간 도겸이 시킨 것을 야무지게 이행한 듯싶었다.

“몸에 상처는 없는 것인가.”

이리 먹지 못해 마른 상태로는 조금만 상처가 나도 쉬이 덧나고 곪기 마련이었다. 도겸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을 삼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증언을 하는 데엔 전혀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무어, 전처럼 산을 타고 넘진 못할 테지만요.”

“역시 자네에게 맡기길 잘했군.”

삼득은 정말 천덕을 죽지 않을 만큼만 살려두었다. 그리고 도겸은 횡령 사건으로 인해 의심의 시선이 조익환에게 쏠려 있는 틈에 천덕을 활용해 연쇄 살인 사건까지 종결 지을 작정이었다.

“맡겨주신 일인데 당연히 해내야지요.”

삼득이 뿌듯해하는 틈에 도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머지 사람들 중 광연과 석이를 찾았다.

“순이야.”

“예… 예? 지 부르셨어유.”

그러나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이들이 아니라 뜬금없이 순이를 부르는지라 화들짝 놀란 아이가 쪼르르 앞으로 나섰다. 긴장한 작은 어깨가 움츠러든 게 눈에 보였다. 도겸은 순이에게 광연과 석이를 가리켜 보였다.

“저 아이들을 손님방으로 데려다주고 쉬게 도와주거라.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였을 테니.”

“아, 예! 맡겨만 주셔유.”

당찬 대답과 함께 광연과 석이에게 다가간 순이가 작은 손가락으로 손님방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아이들 셋이 쭈뼛대며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도겸은 머슴으로 부리는 이에게 나머지 사람들도 따로 묵을 방을 안내하도록 했다.

“그리고 저 자는 쓰지 않는 광에다 데려다 놓아라. 갑자기 잘 자리가 바뀌면 놀라 죽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예.”

쉼 없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오느라 여독이 쌓여 잔뜩 피로할 사람들에겐 휴식이 우선이었다. 도겸은 마지막으로 남은 화월과 삼득을 향해 물었다.

“너희도 우선 조금 쉬는 게 좋지 않겠느냐.”

“괜찮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한 화월이 앞으로 나섰다. 끈 떨어진 향낭은 이미 바닥에 내버린 뒤였다.

“당장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인데 어찌 한가로이 쉬겠나이까.”

화월이 고집을 부렸지만 도겸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잠시 숨을 돌리고 있거라. 내 볼 일이 있어 나가던 길이라. 다녀와서 이야기 나누자꾸나.”

“어딜 가시는 것입니까.”

당장 화월이 따라붙으려 했다. 도겸은 청의 협박을 잊지 않은지라 반사적으로 약간 비켜서며 서둘러 설명했다.

“그, 청이의 재간택을 도울 수모가 필요해서 상단에 사람을 요청하러 가던 길이었다. 내 금방 다녀올 터이니….”

“수모를 구하러 상단에 직접 걸음하신다고요.”

평소 거의 왕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화월이 의아해했다. 도겸은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이가 재간택에 들면서 유력한 세자빈 후보로 떠오르니 다른 후보들이 가벼운 농간을 벌인 듯싶구나. 도성 안엔 이 집에 올 수모가 없다 하니 어찌하겠느냐? 직접 구해야지.”

“그런 일까지 어찌 나리께서 신경 쓰신답니까. 심가의 아씨이시니 당연히 심씨 집 안에서 사람을 보내든, 아씨를 챙기든 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화월이 대놓고 불쾌해했다. 본래는 안주인이 신경 써야 할 일인 탓이었다.

그러나 도겸은 너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숙부님께선 꽤 오랜 옥살이에 상한 몸을 회복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실 것이다. 그런 와중에 숙모님을 한양으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 더군다나 수모의 단장은 유행을 타는지라 한양의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 한양의 유행이라면.”

도겸이 다시 대문으로 향하려던 차, 화월이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도겸을 붙들었다.

“한때 소인이 그 유행이라는 것을 이끌어본지라, 모르지 않습니다만.”

그 말을 들은 도겸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화월을 돌아보았다.

“…그래. 네가 바로 도성 여인들이 선망해 마지않던 그 화월이었지.”

내내 화월이 여각을 비우고 여기까지 온 것에 못내 탐탁지 않았었다. 자칫 위험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건만, 위급한 상황이 되니 새삼 반갑게 느껴졌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어쩌다 보니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침모와 수모를 전부 구하게 됐다. 요행이 연달아 이어지니 모쪼록 도겸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제가 생각보다 더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참으로 흐뭇한 날이었다.

간택이 시작되기 직전엔 수업이라고 해 봤자 딱히 별 것 없었다. 그러나 간택에 왕대비가 직접 관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직후로 청은 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즉석 과제가 나올지 모르는 탓이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이 있는데, 물어도 되겠습니까.”

수를 놓기도 하고, 난을 치기도 했다. 심지어는 음식을 만드는 법까지 배우는 중이었다.

“하문하십시오, 스승님.”

그리고 지금은 모란을 수놓고 있었다. 만약 왕대비가 청이 본 적 없는 꽃을 수놓으라고 한다면 보통 곤란한 게 아닌지라 이것저것 배워둘 필요가 있는 탓이었다.

자수를 놓는 기법도 여러 가지라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었다. 작은 꽃잎 하나를 세 가지 색의 명주실로 채워 넣느라 갈 길이 멀었다. 무엇보다 청은 실을 끊어먹지 않기 위해 가장 공을 들여야 했다. 붓을 놀리는 것만큼이나 바늘을 다루는 게 어려웠다.

“아까는 어찌하여 객주님을 그리 밀쳐 버린 것입니까.”

간신히 꽃잎의 밑 색을 다 채워가고 있었건만, 질문을 듣자마자 결국 실이 뚝 끊어졌다. 청은 실을 힘껏 당긴 그대로 멈춘 채였다. 남산댁이 눈을 빛내며 청을 유심히 살폈다.

“얼마나 세게 밀치셨는지 부객주가 아니었다면 객주님은 크게 다쳤을지도 모릅니다.”

“…제 잘못입니다.”

“이유를 알아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게 아닙니까.”

거짓을 꾸며 말하거나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청은 앞서 여러 번 실을 끊어먹었을 때 배운 대로 실을 이어 묶어 살짝 숨기며 순순히 답했다.

“싫었습니다. 그 여자가 오라버니에게 냄새를 묻히는 것이.”

“그 냄새가 싫어서요? 단순한 백단향일 뿐인데요.”

“아니요. 향 자체는 견딜 만하였지만 그 여자의 냄새라서 싫었습니다.”

시원시원한 대답에 도리어 당황한 남산댁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객주님이… 싫으십니까? 어째서요.”

“그 여자만 싫은 게 아닙니다. 그냥 오라버니를 욕심내는 자들은 다 싫습니다.”

“그 말인 즉슨….”

남산댁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한쪽 귀는 사랑채 쪽에 두고 있었다. 최도겸과 화월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청은 기어이 바늘을 수틀에 아무렇게나 찔러 넣었다.

“아씨께서 나리를… 욕심내신다는 것입니까.”

“이미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만.”

“예.”

“함부로 이 땅에서 어울리는 사람을 만들지 말자는 의미로 서로를 독점하기로 하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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