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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65)화 (150/197)

끈질기게 도겸을 몰아붙이며 답을 요구하던 언이 이내 포기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아예 벌러덩 바닥에 드러누웠다.

“…봄에 취한 것이겠지.”

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겸아.”

“예, 저하.”

도겸은 슬쩍 술상을 당겨 치웠다. 술병이 넘어지거나 뭔가가 쏟아져 언의 귀한 옷을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너무 모진 국본으로 만들지는 말아다오.”

“제가 어찌 감히.”

“자네가 늘 하던 말이 있지 않나. 둘러 가더라도 바른길로 가자고.”

“예, 그랬지요.”

“그래서 그 말을 깊이 새겨, 나도 둘러 갈 생각이야.”

두 팔을 뒤통수에 대어 스스로 베개를 만든 언이 눈을 들어 열어 둔 창밖을 내다보았다. 치켜뜬 시야에 반짝이는 밤하늘이 어룽어룽 새겨졌다.

“나는 언제든 둘러 갈 각오가 되어 있으니 자네에게 확신이 들면 언제든 말하게.”

남산댁보다 더 도겸을 오래 보아 온 언은 더 이상 캐내거나 묻지 않았다. 그저 이미 확신하고 스스로 믿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도겸은 거기까지 아니라며 부정하지 못했다.

“저하, 소신은….”

“자네야 물론 국본에겐 이 땅이 우선이고 백성을 두루 살피는 게 우선이라 하겠지만.”

역시나, 도겸을 잘 알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언은 아예 눈을 감았다.

“그럼 나는 자네도 이 땅에 사는 내 백성이니, 자네를 먼저 살피는 것이라 답하겠네.”

눈을 감고도 건너편의 친우를 샅샅이 살필 줄 알았다.

“재간택까지 달포, 그렇다면 자네에게도 달포를 줄 테니 결정하게.”

재간택 전에 결정하라는 게 무엇인지도, 도겸은 모르지 않았다.

“어찌 저하까지 그리 부추기시는 것입니까.”

친우에게 계속 거짓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술기운을 빌어, 도겸은 어렵사리 조금 무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지 마십시오.”

“나‘까지’라니. 누군가 또 자네를 벼랑으로 떠밀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도겸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언이 스스로 답을 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 사람 또한 오지랖을 부려 가며 자네가 오롯이 행복해지길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군.”

“…….”

“그 아이에게 노란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혔을 때 못 느꼈나? 설마 제 손으로 원삼을 입혀 다른 사내의 빈으로 궐에 들여보낼 만큼 냉혹한 사내인 것이라면….”

언이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내 자네의 가슴을 열어 심장이 잘 붙어 있나 확인할 것이네.”

술기운에 어물어물 작아지는 목소리로나마 언은 끝까지 제 할 말을 다했다.

“아마도 반드시 얼어붙어 있거나, 없을 테니 말이야.”

그 확신 어린 말에 도겸은 슬며시 제 가슴에 손바닥을 대어 보아야 했다.

그곳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마음이 펄떡거리고 있었다.

***

본격적으로 간택이 시작되고 초간택 이후로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다. 벌써 재간택은 열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아주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침모가 없다니.”

도겸이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남산댁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투로 재차 설명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씨 재간택 때 입으실 옷을 지어줄 침모도, 단장을 도와줄 수모도 갑자기 일을 못 하겠답니다. 그래서 다른 침모와 수모를 구해 보려 하였는데… 당장 도성 안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도성 안에 일하는 침모와 수모의 숫자가 몇인데.”

“그러게나 말이지요. 그 많은 이들이 모두 이 집엔 일을 하러 오지 못하겠다더군요.”

“…뭐.”

책을 읽다 말고 일어나 겉옷을 찾던 도겸이 멈칫했다.

“말이 조금 이상하군. 모두가 그저 일이 바빠서가 아니라 이 집이라서 오지 않겠다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싶습니다.”

옷고름을 맨 도겸이 한숨을 내쉬었다.

“매수를 당했나보군.”

“그렇지요. 보통은 세자빈이 미리 내정된 경우가 많아 이런 면에서 알력 다툼이 잘 없는데, 특이한 사례가 생긴 셈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옷에 유행이 있다는 것쯤은 도겸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재간택처럼 특별한 일일수록 처녀들이 민감하게 군다는 것도.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나리.”

“어찌 그러나. 당장 나가서 구해야지.”

그러자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난 남산댁이 도겸의 채비를 도왔다. 직접 갓끈을 매준 여인은 옷깃에 먼지 하나 남지 않게 털어주며 꼼꼼하게 살펴주었다.

“이렇게라도 좌상댁 곳간이 열렸으니 잘된 게 아니겠습니까. 슬쩍 떠보니 나리께서 제시하시는 삯의 두 배를 주겠다 하였다기에 제 마음대로 아주 높게 쳐놓고 나왔습니다. 그러니 혹시 변심하여 이 집 일을 봐준다 하여도 나리께서 감당해 주셔야 합니다.”

어쩐지 급하게 상황을 알린 것치고 남산댁이 상당히 태평해 보였다. 도겸이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아니, 뭐 그런 거야 상관없다만… 직전까지 사람이 없다고 급박한 듯이 고하지 않았나.”

“그랬지요.”

“한데 어찌 그리 여유가 있는 것인가? 당장 구하러 나가야 한다기에 나는 상단을 통해 찾아보려 하였거늘.”

특히나 민감한 시기라 조익환이 예의주시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눈에 띄게 연락을 취하지 않고 상단 쪽에 은밀히 연락할 방법을 생각하는 동안 남산댁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소인이 보기엔 그래 봤자 도성 내 침모와 수모들 배만 불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럼 어찌하면 좋겠는가.”

“정히 구하신다면 수모 정도만 구해 주셔도 충분합니다. 침모는 소인이 구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어디, 아는 침모라도 있는 겐가.”

“초간택 때 궐에 갔다가 동무들을 만났지 뭡니까.”

준비를 마친 도겸이 약간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한데.”

“그리고 오랫동안 침방 상궁을 지냈던 동무가 병을 얻어 출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어.”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도겸은 흥분도 잠시, 침착하게 확인했다.

“병을 얻어 출궁한 것이라면, 상태가 좋지 않거나 괜찮더라도 고향으로 간 게 아닌가.”

“마침 그이는 고향이 한양이고, 얻은 병도 단순한 현훈증(주위나 자신이 도는 것처럼 느끼는 어지럼증)이라 옷을 짓는 데엔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충분히 휴식하며 옷을 짓는다면 아씨께서는 조선 최고의 침모가 지은 옷을 입고 재간택에 들어가실 수 있겠지요.”

도겸은 저도 모르게 남산댁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진정 자네가 내 집에 오게 된 것은 천운이었던 것 같네.”

도겸의 방 문짝이 부서질 듯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뭐하는 거야.”

문 밖에 나타난 이는 당연하지만 청이었다. 주변의 공기를 겨울의 북풍한설로 꽁꽁 얼린 그녀는 남산댁과 도겸을 번갈아 보며 눈을 빛냈다. 도겸은 어쩐지 큰일을 저지른 사람처럼 뜨끔하여 남산댁의 손을 놓았다.

“그, 남산댁이 내 집에 머물러주어 감사하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나는.”

“…뭐.”

“나는 안 고마워? 이 소란스러운 땅에서 네가 시키는 거 다 하고 있는데.”

“아니, 그야 당연히….”

뜻밖의 반문에 도겸은 순간 표정을 어찌 지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남산댁만 옅게 웃으며 되물었다.

“아씨의 새 옷을 짓는 일에 대하여 나리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아씨, 무어 필요한 게 있으신 것입니까.”

“나리.”

짚신 벗을 틈도 없이 무릎걸음으로 벅벅 기어 문 앞까지 온 순이가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퍼뜩 나와 보셔유! 사람이 어마무시하게 많이 찾아왔다니께유.”

그 말에 얼이 빠져 있던 도겸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고쳤다.

“…아, 그래. 올 때가 되었지.”

갑자기 낯빛이 변한 그는 성큼성큼 청을 지나쳐 밖으로 향했다. 이미 밖에 온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 청이 도겸의 뒤를 따랐다.

“왜 불렀어.”

“뭐.”

“그 여자. 왜 불렀냐고.”

어쩐지 청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행랑 마당까지 거침없이 걸어가던 도겸은 어쩐지 목뒤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청이 왜 이리 날을 세우는 것인지, 도겸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라니? 그야….”

그리고 마침내 대문간에 나간 도겸은 기다리고 있다 제 품으로 뛰어드는 여인을 미처 막지 못했다.

“나리.”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익숙한 향도 느껴졌다. 이전에 만났을 땐 모습을 보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화월아. 네가 어찌 예까지 온 것이냐.”

“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꼭 오시라 하였는데 오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눈을 뜨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인은….”

화월이 품 안에서 울먹였다. 도겸은 저를 꼭 끌어안은 여인이 제 허리에 두른 팔을 떼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던 차 갑자기 화월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아악.”

“오라버니한테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도겸이 당황해하던 차, 그의 허리를 두른 팔을 간단하게 떼어낸 청이 화월을 홱 밀쳤다. 뒤로 넘어갈 뻔한 화월을 삼득이 간신히 붙들어 잡았다.

삼득이 없었다면 화월은 바닥에 나동그라졌을 게 분명했다. 듬직한 삼득마저 뒤로 밀릴 정도였으니, 청이 얼마나 힘 조절을 하지 않았는지가 눈으로 확인되었다.

“청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찌 그러느냐.”

도겸은 갑작스레 실력행사를 하는 청을 제 뒤로 숨기며 나직이 다스리려 했다.

그러나 청이 여전히 화월을 노려보며 뾰족하게 굴었다.

“오랜만이라서 잊은 거야? 내 경고.”

“아씨는 아직도 그리 냄새에 민감하신 것입니까? 사람답지 않게.”

사람답지 않다는 말에 뼈가 있음은 도겸이 먼저 알아차렸다. 다만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 중엔 청의 정체를 모르는 이들도 있기 때문에 화월의 입 또한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둘 다 그만 하거라. 어찌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이리 날을 세우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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