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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64)화 (149/197)

그런데 정작 심청이 너무 덤덤한지라, 이쯤 되니 조설아가 억울해지고 말았다.

“겨우 이렇게 시간 좀 보내고 줄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줬으면 좋았잖아? 아니, 그냥 애초에 빼앗아 가지를 말든가. 뭐 이렇게 뜬금없고 별다른 의미도 없이…!”

“그걸 왜 네가 판단하지?”

“…뭐?”

솔직히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면 굉장한 거짓말이었지만 조설아는 일단 뻔뻔한 척했다.

그리고 심청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때와 의미는 내가 결정해.”

심청은 여전히 무심하고 표정이 없었다. 말마따나 격이 달라서 그런 건지, 도통 심중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였고 그래서 충분히 의미 있었어.”

“…….”

“그거 돌려줬으니까 전처럼 얌전하게 굴어. 아무 데서나 소리 지르지 말고.”

당부라고 해 봤자 그게 끝이었다. 심청은 그대로 돌아서 사내들에게 돌아가 버렸다.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사내들은 청을 보자 반갑게 웃으며 나란히 설 공간을 흔쾌히 내어 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설아도 머뭇거리며 돌아섰다.

대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조설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대수롭지 않은 시간이 그토록 특별하게 여겨졌는지를.

오늘 심청은 제게 없던 여의주를 돌려줌과 동시에, 제게 없던 벗을 빌려주기도 했다는 것을.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

조용히 별당으로 가려던 조설아는 기다리고 있던 조익환과 대면했다. 왠지 불장난을 저지른 아이처럼 조설아는 아버지의 눈을 피했다.

“잠시 밖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최도겸에, 심청이 그년에, 세자까지 합세해서 저자를 돌아다니며 뭘 했냐고 다시 물어야 대답을 할 노릇인 게냐?”

“그건….”

분명 조설아는 손에 쥐고 있던 여의주를 꺼내 보일 작정이었다. 당연했다.

“…무슨 생각인지 알아보려던 것입니다.”

“네가?”

댓돌 위에 서 있던 조익환이 느긋하게 내려와 뒷짐을 지며 물었다.

“그래서 알아는 보았고?”

“…….”

아니. 네 사람은 그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봄밤의 축제를 즐긴 것뿐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 이야기는 아버지가 흡족하게 받아들일 정보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조설아는 너무도 잘 알았다.

“오늘 집에 처녀들을 부르실 때… 심청에게만 다른 시간으로 전갈을 보내신 거예요?”

“당연하지. 그년에게 무어 내 집 쌀밥까지 먹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심청은 줘도 안 먹었을 텐데. 조설아는 무의식적으로 심청의 입장을 생각했다.

“무어… 그것도 그렇고, 여의주도 되찾으려고 나갔던 거예요.”

“여의주는 찾았고?”

조설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청이 여의주를 돌려줬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사실 당장 말해야 하는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손에 여의주가 있어야 어디서든 아버지가 위험할 때 달려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왜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무기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를 단순히 부정적인 뜻으로만 알고 있는 조익환이 혀를 찼다.

“쯧쯧… 쓸데없이 부족한 것 내보이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어차피 거사가 머지않았으니.”

“…네?”

“한꺼번에 찾아올 테니 너는 때가 되면 용을 사로잡아 찍어 누를 수 있게 힘이나 길러 두어라.”

조설아가 되물었지만 조익환은 더 설명해 주지 않고 지나쳐 갈 뿐이었다.

홀로 남은 조설아는 혹여 들킬까 싶어 꽉 쥐고 있던 여의주를 슬쩍 펼쳐 보았다.

“너, 죽은 조설아에게 뭔가 큰 은혜를 입었던 거지?”

검은 여의주는 달빛에 시리게 빛났다.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으려는 거야? 부정 탈 일 마구 저질러 가면서?”

왠지 모르게 투명하다 느끼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제 여의주에 스며든 흐리고 탁한 기운이 많이 가신 탓이었다.

늘 제 여의주를 들고 약 올리며 이리저리 피하며 조익환과의 연줄을 끊어 놓으려는 건 줄 알았는데, 용은 힘을 쓰고 시간을 들여가며 여의주를 정화시키고 있었다.

“힘도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왕은 무슨. 그리고 땅에 다시 떨어진 것부터 너는 더 이상 용이 아닌 거 아니야? 모습조차 제대로 내보이지 못하면서!”

“말했을 텐데.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고.”

용은 이런 식으로 필요를 증명해 조설아를 납득시켰다.

“하….”

밤이 깊도록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제 여의주를 내려다보던 조설아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땅의 하늘은 매일 빛깔이 달라. 밤엔 별도 뜨고 달도 떠. 본 적 있어?”

산에서 살 땐 기슭에서, 물속에서만 지냈다. 그리고 물 밖에 나온 이후로 고개를 숙이는 법만 배워 왔던지라 하늘을 볼 겨를 따윈 없었다.

“…….”

그동안 물방울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건 깨진 물방울 바깥에 나가 직접 폐로 숨을 쉬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조설아는 세자의 권유에 연을 날리다 줄을 툭 끊어 먹던 순간 저를 가두고 있던 물방울이 터졌음을 알게 되었다.

***

“이렇게라도 한 잔을 하고 들어가야 왠지 하루를 마무리한 것 같달까?”

기어이 언은 서촌에 들러 청이 아끼는 남산댁의 술을 축내고 있었다. 시원하게 잔을 비우고 재차 잔을 채우던 언이 문득 의아해했다.

“한데 이상하군. 우리의 청이 아씨가 이런 술을 마다하고 쉬겠다니.”

의아한 건 도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이 들고 있는 술병을 가져와 대신 따르며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쩐지 언이 술을 급하게 들이켜는 경향이 있었다.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두 병째였다. 장단을 맞추던 도겸은 금세 알딸딸한 기운을 느꼈다.

“사람이 많은 곳에 나가서 그런가? 그러기엔 그 아이가 먼저 나가자 하였다며.”

“먼저 나가자고 한 건 처음이었지요.”

다시 차오른 술잔을 가만 내려다보던 언이 첨언했다.

“거기다 이무기를 데리고 와서 함께 어울리고, 여의주까지 돌려줘 버리고.”

“그 부분은 청이가 알아서 결정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청이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아도 효용은 다했습니다. 어차피 여의주를 이쪽에서 가지고 있는 동안 조익환에겐 충분히 압박이 되었으니까요.”

“그렇게까지 여유로이 생각하면서 어찌 아까는 그리 노상에서 답지 않게 역정을 낸 것인가?”

잘 흘러간다 싶더니 언이 불쑥 급소를 찌르고 들어왔다. 도겸은 그걸 넘어가 주지 않는 주군이자 벗을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솔직히는… 그리 화를 내고 나서야 뒤늦게 생각한 것입니다. 돌려주겠다 한 게 워낙 갑작스러운지라.”

그런 도겸을 가만 바라보던 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참, 낯선 모습이로군.”

“예?”

“늘 생각부터 하고 움직이던 자네가 이리 두서없이 움직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적어도 나는 처음 보는데. 자넨 아닌 건가?”

언의 지적에서야 실감하는 것을 보니, 정말 중증이구나 싶었다. 도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까.”

“청이가 모진 일을 당한 게 그리도 속이 상했던 것인가? 당사자보다 더 분이 날 만큼.”

“예. 어느새 참으로 그 아이와 가족이 된 모양입니다.”

“가족 같은 소리 하기는.”

“…예?”

도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은 여전히 가늘어진 눈으로 도겸을 샅샅이 분해하듯 살피고 있었다. 되물어도 도통 답을 주지 않는 친우 때문에 도겸은 괜스레 초조해졌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자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언이 들고 있던 잔을 기울여 시원스레 술을 마셨다.

그러곤 다시금 도겸을 뚫어져라 보는 것이다.

“정말 청이를 내 빈으로 들여도 상관이 없겠는가?”

도겸은 뜨끔했지만 태연하게 답했다.

“그러려고 간택에 들인 게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 또한 부지런히 교육도 하였고요.”

“그러면서 함께 보낸 시간이 있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였지.”

언이 도겸의 잔을 채워 주며 덧붙였다.

“자네와 연적이 된다면 어떨까.”

도겸이 치켜든 방패에 언이 가감 없는 공격을 가했다. 버티려 했건만, 쉽지 않았다.

“…연적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나? 우리가 연적이 될 수도 있다는 그런.”

“그런 농담 마십시오.”

웃으며 술을 따라 주려 하였건만, 언이 술병을 내어 주지 않았다. 뜻밖에 술병을 두고 다투는 꼴이 되었다.

“자네는 청이를 가족처럼 여긴다지만 참으로 피가 섞인 혈육은 아니지. 혈육만 아닌가? 사람과 사람의 사이도 아닌데. 무어 그 자체로서 장벽이 있긴 하다만… 글쎄, 보다 보니 이젠 딱히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던데. 안 그런가?”

“무어, 그렇기는 하지만….”

도겸으로서는 노을이 질 무렵 이미 눈치를 챈 남산댁에게서 된통 속마음을 들통나 버린 터라 방어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찌 남녀 사이에 연정만 있겠습니까. 우애도 있고, 의리도 있고….”

“그래. 뭐, 꼭 그런 건 아니지. 한데 자네도 사내이지 않나. 외적으로만 봐도 청이는 팔도에서 그만한 처녀를 다시 찾지 못하겠다 싶을 만큼 아름다운데 자넨 정말 한 번도 혹한 적이 없단 말인가?”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내민 언이 윽박지르듯 물었다.

“정말 그 미모에 한 번도 가슴이 뛴 적이 없단 말인가?”

“아니… 저하.”

당황한 도겸이 언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도리어 언은 주안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자넨 당장 머리를 밀고 절로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야!”

“벌써 술에 취하신 것입니까?”

아마도 청은 물에 들어가 있겠지만, 괜히 들릴까 싶어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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