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63)화 (148/197)

“아, 사실 뱃놀이는 초여름에 해야 되는데 말이야.”

언이 아니었다면 세 사람은 그저 적당히 밤거리를 거닐다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적어도 도겸은 그럴 작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강가에 반딧불이가 저 하늘의 별보다 많거든. 그걸 보겠다고 경강에 띄우는 나룻배는 또 어찌나 많은지!”

“초여름에 저하께서 사라지셨다고 익위사가 찾으러 다니면 여길 짚어 주어야겠습니다.”

“어허. 그리 의리 없는 벗이 될 텐가?”

그러나 날을 잡고 외출한 세자 덕에 편히 집에 가긴 어려워졌다. 청과 이무기가 불편해할 것 같아 뱃사공을 자처한 도겸은 느긋하게 노를 저으며 언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이 저하와 함께 반딧불이를 구경하러 나와야겠군요.”

“그때는 조금 더 큰 배를 빌려서 사공을 두고 우린 술을 한잔하여도 좋을 테지.”

빈손을 아쉬워하며 언이 시선을 멀리 던질 즈음, 도겸은 저만치 나란히 앉아 있는 소녀들을 지켜보았다. 작은 체구의 여인들은 작은 나룻배의 앞쪽에 나란히 앉아 뭔가를 조곤조곤 떠들고 있었다.

늘 번개를 내리치고 산을 헤집으며 싸우던 신비한 존재들이 저러고 있으니 도겸은 새삼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쩐지 목을 빼고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인간들은… 이렇게 울렁대는 배를 타고 다니는 건가?”

청이 불편해하자 곁에 있던 이무기가 코웃음 쳤다.

“배도 처음 타 보는 거야?”

척 보기에도 청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은데, 정작 당하는 사람이 개의치 않고 순순히 대꾸했다.

“한 번 잠깐 타 보긴 했어. 근데 이렇게 작은 배도 아니었고, 그냥 거기 타고 있던 인간들 겁주려고 배를 좀 흔든 게 전부라서.”

“…그러고 다니면서 네가 나한테 부정을 운운해?”

“내가 너랑 같아? 난 부정을 부정으로 상쇄시킨 거고.”

“뭐?”

“나란히 앉아 있다고 해서 너랑 내 격이 같아지는 건 아니라는 뜻이란다, 천 년도 못 산 어린 이무기야.”

“천 년 넘게 살아서 뭐해? 어차피 땅에 떨어져 힘도 못 쓰는 늙다리 용 주제에.”

“내가 진짜로 힘을 잃어도 너보다는 나을걸. 너 나한테 한 번이라도 번개로 공격 성공한 적 있어?”

“야!”

“왜.”

“여기서 한판 하자고? 물도 많네. 어디 한번 해 보라고!”

“말대꾸하지 마. 명령이야. 아, 그리고 움직이지도 마. 배 흔들리니까.”

“이씨…!”

“너 때문에 배 흔들리면 여의주는 없는 거야. 알지?”

“…….”

모르는 이들이었다면 그저 어여쁜 소녀들이 티격태격하며 수다를 떠는 것이라 관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겸은 이제 알고 있었다. 한 소녀는 용이고, 다른 소녀는 이무기라는 것을. 또한 그들이 나누는 내용도 범상치 않은지라 기분이 더 묘했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머릿속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잘 연결되지 않는, 희한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

“…….”

저도 모르게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차, 언뜻 정신을 차려보니 언도 도겸과 마찬가지로 멍하게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두 소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이젠 이무기의 앞에서도 예를 차리기 귀찮은지 청이 짤막하게 물어 왔다.

그리고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진 도겸과 언은 누가 먼저랄세라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아니다. 하던 이야기 계속하여라.”

“그래! 천 년은 무슨, 백 년도 못 산 햇병아리들은 가만 노나 저어 드릴 테니 하던 신선놀음 계속하시지요.”

갑자기 도겸의 노를 빼앗은 언이 너스레를 떨어 댔다. 얼결에 빈손이 된 도겸은 다음 순간 조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민하게 세우고 있던 벽이 조금은 허물어지는 것도 같았다.

“저하, 어디까지 가실 작정이십니까?”

언에게 묻는 청의 얼굴이 배 한가운데에 놓은 따스한 등의 불빛과 차가운 달빛을 받아 그리고 그 자체로도 환하게 빛났다. 도겸의 눈엔 잠시 주변 모든 것이 흐려져 지워졌다.

세상의 중심에 청이라는 여인 혼자만 놓여 있었다.

“그건 왜 묻느냐?”

“알려 주시면 먼저 가서 기다릴까 하여서요. 승선감이 좀….”

“어허. 내 비록 그대보다 나이는 어릴지언정 이 땅에서 지체 높기로는 하늘과 땅 차이이거늘 어찌 그리 불경하게 구는 것이냐?”

“그렇다면 노라도 넘기시는 게 어떠신지요? 햇병아리 저하보다는 햇병아리 오라버니가 더 나은 듯싶습니다.”

“이것 참.”

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노를 도로 도겸에게 넘기곤 접선을 꺼내 들었다.

“자네의 누이가 기특하게도 국본에게 버거운 일을 시키지 않으려 하는군.”

“…예?”

돌연 언이 노를 건네주지 않았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뻔했다. 도겸은 다시 천천히 노를 저었다.

용과 이무기, 그리고 세자가 작은 배에 함께 올라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임에도 분위기는 뜻밖에 제법 너그럽고 잔잔했다.

한바탕 일장춘몽과도 같은 평화가 강물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

네 사람의 야행은 운종가에 주렁주렁 걸린 등불이 하나둘 꺼지는 야심한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아, 피맛길에 유명한 국밥 먹으러 갔어야 했는데!”

모두가 함께 북촌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난데없이 소리치는 세자 때문에 조설아는 물론 심청까지 깜짝 놀라 돌아보아야 했다.

“그 집 주인장이 나이가 들어서 달포에 한 번씩 문을 열거든. 오늘이 아마 여는 날이었을 터인데, 며칠을 기다렸거늘 그대들을 만나는 통에 깜빡 잊었지 뭔가!”

세자는 국밥 한 그릇을 먹지 못한 것에 지나치게 안타까워하며 탄식했다. 조설아는 그런 세자의 언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국밥?”

심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용은 특히나 더 인간의 음식에 관심이 없을 터라 더 그랬다.

“거기 술은 어떤 것을 파나요?”

하지만 가만 듣던 조설아는 청의 물음에 새삼스레 큰 충격에 휩싸였다. 아무리 초연한 용이라 해도 술에 미련을 갖는 것일까.

“말해 뭐하나? 그 집 안주인 할멈 술맛이 또 기가 막히지. 남산댁의 술맛과도 또한 다르다네.”

세자의 호언에 심청이 눈을 부릅떴다.

“그럼 왜 쓸데없이 배 같은 걸 탄 것입니까? 국밥을 먹으러 갔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저하?”

심청은 꽤나 독특한 화법을 구사했다. 착실하게 겉만 깍듯하지 않나. 조설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록 오만하기 그지없는 용이었지만, 배워서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어찌 너는 낭만을 모르느냐? 달빛을 맞으며 뱃놀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한 줄 아느냐?”

“저하께서 직전에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분명 그 집의 술도 맛보기 어렵다며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어? 운치 있게 봄바람을 맞으며 뱃놀이를 한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정정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하께서 기억력만 제때 발휘하셨어도 배 위에서 그 맛 좋은 술을 마실 수 있었겠군요.”

“거참! 응?”

분명 입씨름을 하고 있건만, 어쩐지 오고 가는 말의 무게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언제나 해야 할 말만, 그것도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해 온 조설아에겐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결국 말싸움을 중재한 것은 도겸이었다.

“그만들 하십시오. 피맛길 국밥집이라면 저도 압니다. 문을 열 때 한번 또 같이 가시지요.”

기껏해야 하룻밤 나들이였다. 특별히 대단한 것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것저것을 구경하고, 대화를 나누며 오랜만에 열린 밤길을 걸었을 뿐인데. 저자로 나간 건 낮에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인간들과도 꾸준히 대화는 나누지 않았나. 별다를 게 없었는데 어쩐지 크게 다르게 다가왔다.

얼마나 다르게 느껴졌냐 하면, 조설아는 마치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근데 자네 누이 말이 맞긴 해. 그 배 위에서 마시는 술 한 잔의 맛이 아주 기가 막히긴 하거든.”

함께한 세 사람은 서로 종족이며 신분도, 성격도 달라 언뜻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았으나 순조롭게 어울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지위 고하로만 사람의 가치를 따져 상대하고 부리라고 배워 온 조설아의 입장에선 또한 기묘했다.

오늘 하루 복종하라던 심청을 따라 나온 이후로 겪은 모든 것이 그랬다. 당연한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심청이 들고 있는 조족등의 나지막한 빛도, 밤하늘의 달과 별도. 정확히는 그동안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고 봄이 맞았다.

그러니까, 꼭 그동안 물방울에 갇혀 흐린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가 싶을 만큼.

“다 왔군.”

몇 시진 만에 도성 안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북촌 집에 다다랐다. 거대한 대문 앞에 선 조설아가 돌아섰다. 시선은 심청을 향하고 있었다.

“그, 우리는 잠깐….”

“예.”

세자와 최도겸이 열 보쯤 뒤로 물러났다. 그래 봤자 둘이 나누는 대화는 이쪽에 모두 들리겠지만, 반대로 이쪽에서 나누는 대화를 인간들은 듣지 못할 터였다.

즉, 둘은 인간이 아닌 자들이 편히 대화를 나누도록 배려하고 있는 셈이었다. 또한 조설아는 의아했다. 국본이라는 자가 자리를 비켜 주다니. 이것 역시 조설아가 배워 온 지식 안에 없는 행동이었다.

“자.”

그 배려를 받으며, 심청은 별다른 틈도 두지 않고 대뜸 여의주를 내밀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제 삶의 결정체를 눈앞에 두고도 조설아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얀 손바닥 위에 놓인 여의주는 다른 때보다 더 검고 투명하게 보였다.

“왜 안 받아?”

“아니, 그게 아니라!”

검고 투명하다니. 말이 되지 않았지만 그랬다. 조설아는 냉큼 제 것을 가져와 두 손으로 감쌌다.

“…너무 쉽게 주잖아. 복종하라며.”

“복종했잖아.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다녔고, 입도 다물었고, 배에서 움직이지도 않았고.”

어딘가로 가서 증언하거나 아버지의 죄를 증명할 증좌를 구해 오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심청은 그런 것을 전혀 시키지 않았다.

집에 초대했던 일을 제외하고는 세자나 최도겸도 조익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나오고, 심청이 반드시 대답하라 명령했다면 꽤 난처했을지도 모른다. 불복하면 그 자리에서 심청이 여의주를 깨트릴 것이라 예상했으니까.

“그래서 돌려주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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