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까지 오라 하여 시간을 맞춰 갔더니 저만 빼고 다른 처녀들은 모두 오시부터 모여 점심을 먹고 자수를 놓고 있었어요.”
“뭐?”
“늦게 왔다며 타박을 받았고, 빈손으로 왔다며 핍박을 받았지요. 거기다 갑자기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횡령을 하였는데 눈치도 없이 간택에 들어갔다는 소리까지 들었답니다. 송유화 낭자의 말로는 일찍부터 제 욕을 하고 있었다던데….”
“어찌 그런 모욕을 준단 말이오!”
결국 도겸이 언성을 높이며 역정을 냈다. 큰 소리에 깜짝 놀란 청도, 부정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가만 듣고 있던 조설아도, 앞서 걷던 언마저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화를 내는 도겸에게 조설아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내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는 몇몇 집 안의 처녀들이 단단히 작정하고 와서 입을 놀린 것입니다. 거기다 어차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용인데 저희가 아무리 작정했다고 한들 모욕감을 줄 수나 있었겠습니까?”
“청이 두둔하기에 가만히 두고 보려 하였더니 말하는 모양새가 좌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군. 지금 타격을 입지 않는다고 하여 공격하는 게 옳다, 이 말이오?”
“나리껜 옳지 않을지 몰라도 소녀에겐 옳을 수 있음을 모르십니까? 저는 그저 아버지께 정치란 그런 것이라 배웠습니다만.”
“이보시오, 조 낭자!”
“어허, 내 오늘은 좋은 날이라 하였지 않나.”
청이 보기에도 도겸이 과하게 화를 낸다 싶을 즈음 언이 나서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 큰 처녀와 사내가 노상에서 어찌 이리 언성을 높인단 말인가. 응?”
“하오나, 저하. 이 문제는 바로잡아야….”
“함께 전을 부쳐 먹으며 서로 마음을 다잡고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길 바라는 뜻깊은 날이네.”
세자가 대뜸 청이 들고 있던 보퉁이에서 떡을 꺼내어 도겸의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하나 더 꺼낸 것은 차마 함부로 조설아의 입에 넣지 못하고 그 작은 손에 쥐여 줄 뿐이었다. 언의 눈짓에 조설아가 머뭇거리며 억지로 떡을 조금 베어 물었다. 언이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하나씩 나누어 먹었으니 오늘만큼은 화해한 것이네. 내 명령에 불복하면 엄히 다스릴 테니 그리 알고!”
세자가 으름장을 놓고서야 다시금 불씨가 수그러들었다. 청은 묵묵히 떡을 씹는 도겸의 옷깃을 슬그머니 잡으며 곁에 다가섰다.
“너 왜 그래?”
“…….”
그러자 도겸이 청을 원망스러운 듯이 내려다보았다. 꾹 다문 입으론 아직 언이 억지로 욱여넣은 떡을 씹을 뿐이었다.
“내가 여의주를 돌려주는 게 그렇게 싫어?”
“그게 아니라…!”
울컥 뭔가를 터트리려던 도겸이 언의 눈치를 살피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다만 옷깃을 잡은 청의 손을 떼어 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슬쩍 밀어내기까지 했다.
청은 도겸의 뜻을 알지 못해 의아했다. 밀어내버리니 더는 묻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보폭을 크게 하며 앞서가 버리는 통에 청은 조설아와 나란히 걷는 꼴이 되었다.
“이렇게 계획도 없이 나와서 따라다니기만 해도 여의주를 준다는 거야?”
도통 청을 믿을 수 없는 이무기가 이때다 싶었는지 재차 따져 물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질문이었다. 청은 무심히 대꾸했다.
“응.”
“대체… 그럼 그동안 왜 쥐고만 있던 건데?”
황당해하는 조설아에게 청은 대뜸 익위사가 건네준 조족등을 보여 주었다.
“너 이거 본 적 있어?”
“그건 왜?”
“이 아래로 비추는 빛이 제법 예뻐.”
“…뭐?”
“이 땅의 하늘은 매일 빛깔이 달라. 밤엔 별도 뜨고 달도 떠. 본 적 있어?”
“갑자기 그딴 건 왜 물어보는 거냐고!”
청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한 조설아가 결국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벌컥 짜증을 냈다.
그러자 두어 걸음을 먼저 나가던 청이 돌아서 조설아에게 나직이 요구했다.
“대답.”
아마도 하루 복종하기로 약속한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씩씩대며 노려보던 조설아가 청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 대꾸했다.
“그딴 거… 알 게 뭐야.”
“넌 나보다 이 조선 땅에서 훨씬 오래 살았는데 그런 것도 못 봤어?”
청의 핀잔에 조설아가 눈을 부라렸다. 씩씩대는 꼴이 볼만했지만 청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넌 조익환이 시키는 것 말고, 이 땅의 것들을 제대로 즐겨 본 적이 있느냐고.”
“…….”
“그래 봤자 물속에 있어서 아무것도 몰랐을 거 아니야. 밖에 나와선 조익환이 시키는 짓만 하니까 이런 것들을 볼 틈도 없었을 테고.”
청은 어둑한 대신 하늘을 촘촘하게 수놓은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심오균은 왜 안 죽였어?”
“…….”
“내 주변에 있는 것들부터 죽이겠다며. 최도겸도 죽인다며. 근데 안 죽였잖아.”
역시 답하지 못하는 조설아에게 청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돌려주는 것이기도 해. 그때 심청의 아버지가 죽었다면 나도 너를, 그리고 조익환을 죽여야 했을 테니까.”
조설아가 짧은 숨을 들이켰다. 청은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며 다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거 보고 알았어. 아직 네게 자유 의지가 남아 있다는 거.”
청이 얼마간 앞서 걸어갔지만 조설아가 도통 움직일 줄을 몰랐다.
“따라오라는 명령까지 해야 해?”
기어이 퉁명스럽게 부르고 나서야 조설아가 느릿느릿 뒤를 따라 걸었다. 앞서가는 사내들의 걸음이야 답답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차피 인간의 탈을 쓰고 있으니 인간처럼 느리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찌 그리 걸음이 느린 것이냐? 어서 오너라. 다 왔다!”
밤마다 홀로 야행을 즐겼던 세자는 도성 내 모르는 곳이 없었다. 청의 일행을 데리고 천천히 밤의 운종가를 구경시켜 준 그가 연을 날릴 장소로 고른 곳은 바로 강변이었다.
“물가가 연을 날리기 좋거든.”
청은 일단 물가가 가까워져 만족이었다. 뒤를 묵묵히 따르는 조설아도 전보다 편한 얼굴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강가에 띄엄띄엄 밝은 등을 설치해 놓아 제법 운치가 있었다. 드문드문 늘어선 노점의 불빛들도 한몫했다.
“자, 간다!”
그런 와중에 청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불어 가는 바람에 언이 날려 보낸 연이었다. 청은 물론 조설아도 마찬가지였다. 능숙하게 연줄을 풀어낸 언의 배웅을 받은 납작한 연이 두둥실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가느다란 줄은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팽팽함을 유지하며 조금씩 지상에서 멀어졌다.
벌써 점처럼 작아진 연을 바라보던 청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연을 날리는 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잘 보아라. 어디 가서도 쉽게 구경 못 할 재주를 부려 보일 테니!”
우두커니 멈춰 있는 것 같던 연이 언의 조종에 따라 갑자기 회전했다. 급강하를 하던 연은 바람을 타고 떠올라 다시 고도를 높이기도 했다.
“네가 갑자기 사 달라고 하여 얼결에 산 연이긴 한데, 뜻밖에 저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구나.”
마찬가지였는지 곁으로 다가온 도겸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청은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어차피 세자가 말한 연날리기라는 게 뭔지 궁금했던 거였어. 저렇게 직접 보여 주니까 확실히 이해가 돼.”
언은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는 얼레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겸이 낮은 어조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는… 네가 수모를 당했다니 화가 났던 것이다.”
도겸의 반응에 청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어차피 다 예상했던 거 아니었어?”
“슬픈 예감이 현실이 되는 일엔 아직 면역이 되지 않은 탓이지. 아무리 예견한들 화가 나는 일에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어.”
“걱정하지 마. 이무기 말이 맞으니까. 내겐 아무런 타격도 되지 않아.”
“하지만… 네가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상한다.”
그의 말에 청은 도겸을 올려다보았다. 노란 불빛이 어스름하게 비추는 그는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청에게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내 마음이, 상해.”
도겸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비로소 청을 내려다보았다. 청은 불현듯 도겸과 일찍이 약속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혹시 서로 몸 상하지 말자고 했던 내용에 그것도 포함이야? 마음이 상하는 일.”
그러자 도겸의 눈빛이 흔들렸다. 청은 그가 어떤 답이든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도겸은 자신이 조선 땅에서 만난 가장 아는 게 많은, 똑똑한 인간이었으니까.
“…아니다. 거기까진 신경 쓰지 말거라. 너는 그저 네 몸만 챙겨도 충분해.”
“…….”
그런데 갈수록 헛똑똑이라는 생각만 진해졌다. 차라리 순이가 어른스럽게 느껴졌으니 말 다하지 않았나.
도겸을 바라보는 청의 눈이 가늘어질 무렵, 둘 사이에 가느다란 봄바람이 여유낙락 지나쳤다. 저만치서 연을 날리는 데 집중하던 언이 소리쳤다.
“한번 해 보겠나?”
퍼뜩 놀라 돌아보니 언은 청이나 도겸이 아닌 조설아에게 권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멍하니 하늘에서 춤을 추는 연을 바라보던 조설아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소녀는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연을 날려 보고 싶어서 들고 있던 것 아니었나? 어렵지 않아. 내가 가르쳐 줄 테니 이리 와 보게.”
“아니, 소녀는….”
“해 보래도.”
덥석 연줄이 이어진 얼레를 조설아에게 넘긴 언이 얼레를 잡는 법을 능숙하게 일러 주었다.
조설아는 뜨거운 것이라도 잡은 듯 얼레를 힘주어 잡지도 못했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구부리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어찌합니까. 이게 잘 되지 않습니다!”
늘 콧대 높게 굴던 조설아가 겨우 작은 얼레를 어찌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언은 웃으며 연을 날리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아니야. 잘하고 있대도 그러네. 실이 너무 당긴다 싶으면 얼레를 풀어도 되니까.”
“아니, 저하. 이게…!”
그러나 아무리 잘 알아듣는다 한들 단숨에 체득하여 숙련될 수는 없었다. 바람이 강해지는 틈에 얼레질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결국 가느다란 연줄이 툭 끊어져 연이 멀리 날아가 버렸다.
마치 갇혀있던 새가 날아가듯, 연은 그대로 훨훨 강 너머로 날아갔다.
“이런.”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도 언은 딱히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청이 단박에 읽어낼 수 없이 복잡해보이기만 했다. 아쉬운 듯도, 아련한 듯도 했다. 그럼에도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그러나 줄이 툭 끊어지던 순간 조설아는 그 작은 충격에 놀라기라도 한 듯 그대로 얼레와 함께 굳어 버렸다. 약간 벌어진 입, 그리고 커다랗게 뜬 눈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청의 눈엔 물기 어린 소녀의 눈망울이 반짝이는 것도 같았다.
“…희한한 일이군. 보통은 저리 끊어지면 곧장 바닥으로 고꾸라지기 마련인데.”
곁에 선 도겸이 작게 중얼거렸다. 청은 조설아가 어떤 심정으로 저런 표정을 지은 것인지 바로 알아본 뒤였다.
저 눈빛은 매일 빛깔을 달리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저의 것과 많이 닮아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