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언의 입이 벌어졌다. 우두커니 길 한가운데 멈춰 서 있는 언과 익위사들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행인들이 통행의 불편함을 느끼고 눈을 흘기며 비켜 갔다. 눈치 빠른 언은 좌익위와 함께 길 한쪽으로 비켜서서 잠시 짧게 대책 회의를 벌였다.
좌익위는 긴장이 섞인 목소리로 언의 접근을 만류했다.
“아무래도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설아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언의 소중한 벗들이었다. 도겸과 청이 조설아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애석하게도 한낱 인간이라 저 소녀들만큼 청력이 뛰어나질 못하니 답답한 노릇이군.”
“예?”
좌익위가 되물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지키는 사람에게도, 그것도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와중에 함부로 비밀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저들에게 가 봐야겠어. 무슨 상황인지는 알아봐야지.”
“가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좌익위는 안전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은 이대로 돌아설 수가 없었다.
“자넨 몰라. 차라리 저들에게 다가가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어찌…!”
좌익위의 어깨를 짚은 언은 손에 힘을 실었다.
“나를 믿어 보게.”
“믿는 저를 두고 홀로 행동하신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요!”
좌익위가 무어라 따져 묻기도 전에 언은 먼저 세 사람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를 좁혔을 때, 언은 청과 눈이 마주쳤다. 그럼에도 언은 일부러 크게 외쳐 불렀다.
“이거, 청이가 아니냐!”
언의 외침에 청은 눈을 찌푸렸고, 조설아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두 여인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인간인 도겸만 깜짝 놀라 돌아섰다.
“…저하!”
언이 다가가자 세 사람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새삼스럽게 사람이 아닌 존재들에게 예를 다한 인사를 받으니 언은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래. 어찌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있는 겐가?”
“아, 그것이….”
언의 물음에 어쩐지 누구보다 바로 답할 것 같던 도겸이 의외로 말끝을 흐렸다. 굉장히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언은 익위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제가 같이 저자를 구경가자 하였습니다.”
그때 청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언은 믿을 수가 없었다.
“함께… 어울리자 하였다고?”
“예.”
뒤이은 대답은 도겸에게서 나왔다.
“오늘 초간택의 결과가 나오자마자 조 낭자가 재간택에 든 규수들을 북촌의 저택으로 초대하였지요. 그리하여 청이가 북촌에 갔다가 좌상 대감댁의 조 낭자와 퍽 친해진 모양입니다. 이리 어울려 같이 밤 나들이를 나올 정도로요.”
이무기에게는 어차피 들릴 것이라 생각했는지 도겸이 대놓고 시원시원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오라버니.”
그러나 반박은 의외로 청에게서 나왔다.
“친해졌다기보다는, 조설아에게서 빼앗았던 것을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뭐?”
“뭐라고?”
두 남자는 동시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조설아에게서 빼앗았던 게 무엇인지를 아는 탓이었다.
언과 도겸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언짢았는지 가만히 있던 조설아가 눈을 치떴다.
와중에 넷 중 가장 평온한 청이 시큰둥하게나마 설명을 이었다.
“처음엔 우리의 목적만 달성하면 돌려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대치 상태가 너무 길어진 것도 있고.”
여의주에 대해서는 청이 일절 두 남자와 상의하거나 협의하려 하지 않았기에 언이나 도겸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당장 이걸 깨부순다 해도 여기 있는 조 낭자를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계속 갖고 있어봤자 얘 성질머리만 더 거칠어질 뿐이라 차라리 돌려주는 게 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얘는 당장이라도 본모습인 이무기로 돌아와서 여기 다 뒤집어엎을 수도 있고요.”
“돌려주면…!”
도겸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다시 좌상의 손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 아니냐?”
“어차피 한두 번 더 비를 내린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지 않습니까, 오라버니?”
당사자를 앞에 두고도 적나라하게 이어지는 대화에 가장 당혹스러운 사람은 이제 언뿐이었다. 그는 혹여 누군가 이 심상치 않은 이야길 듣는 사람이 없나 주변을 살펴야 했다. 다행히 그들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흥에 취해 딱히 남의 대화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얜 이걸 빼앗긴 상황에서도 멀쩡히 좌상대감을 따르고 있었지요.”
“…….”
“…….”
청을 바라보던 두 남자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조설아를 살폈다.
그때까지 조설아는 다소 뚱한 얼굴로 묵비권이라도 행사하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손에 든 것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미처 상황을 파악하느라 조설아가 손에 든 것까지는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던 언은 뒤늦게 그것이 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어차피 갖고 있어 봤자 무용지물인 것, 오늘 하루 내게 복종하게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낸 뒤에 돌려줄까 하여 이리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두 사내가 조설아를 향해 갖고 있는 적개심을 읽어 낸 것일까. 청이 슬쩍 조설아의 앞으로 나와 섰다. 혹자들의 눈엔 불량한 사내들이 어여쁜 규수들을 둘러싸고 위협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제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 하여도, 혹은 불허한다 하셔도 별수 없습니다. 오라버니와 저하께서는 이만 저희를 두고 가셔도 좋습니다만.”
함께 이무기를 몰아낼 계획을 세울 땐 언제고, 이무기를 싸고도는 걸까. 언은 조금 섭섭해질 정도였다. 아마 저보다 더 서운할 도겸은 척 보기에도 매우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라버니, 어찌하시겠습니까?”
아무렴, 이무기는 조익환과 손을 잡은 것은 둘째 치더라도 당장 근래에 청을 공격하여 다치게 한 전력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집 규수들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 보내고 나서도 걱정이 끊이질 않았는데 적과 함께 희희낙락 시간을 보내겠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가만 세 사람을 바라보던 언은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띈 모습이 있다면, 바로 긴장감 어린 순간에도 손에 든 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조설아였다. 얇은 종이를 덧대어 만든 연이 혹여 찢어질까 손끝으로 대나무 살을 조심스레 들고 있는 것까지 발견했을 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처음엔 조익환이 부리는 이무기라는 편견이 있어선지 억지로 들고 있는 것 같았지만 눈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조설아는 그저 처음 겪는 상황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뿐임을.
어쩌면, 청은 일찍이 냉혹해 보이기만 한 이무기에게서 저런 순수함을 발견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언은 대뜸 앞으로 나서서 조설아가 들고 있던 연을 빼앗았다. 황망하게 연을 빼앗긴 조설아의 눈이 커졌다.
“반달 방패연이군! 이걸 날리려던 것인가?”
“…예?”
잔뜩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도겸이 뜬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언은 팔꿈치로 도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네 어른이 되어서 어린 처자들 둘이서만 이 밤에 저자를 돌아다니게 둘 텐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당연히….”
“그럼 더는 잔말 말게. 누이를 그리 믿지 못해서야 쓰나. 아마 다 뜻이 있어 내린 결정이고 알아서 할 테니 우린 그저 이 낭자들을 따라다니기만 하세.”
“하지만….”
“여기 서서 설왕설래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엔 날이 너무 좋지 않나!”
언의 너스레에 청은 또 시작이네 하는 표정을 지었고, 도겸은 마뜩잖은 눈을 하면서도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기왕 이렇게 만난 김에 오늘 야행을 함께하는 게 어떻겠나?”
그리고 조설아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은 일부러 조설아를 콕 짚어 물었다.
“어떤가, 조 낭자?”
이무기는 이무기였다. 이무기에게 진정한 힘은 신분이 아닌 순수한 무력인 게 분명했다. 순간 언이 아닌 청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청은 그저 고요히 조설아와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어찌 소녀가 감히 저하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뭔가 인간은 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눈 것일까. 조설아가 못내 언에게 따르겠노라 숙이고 들어왔다. 언은 일찍이 이무기가 저를 따르는 게 아님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리 생각해 준다니 다행이군. 그럼 가세나. 여기서는 연을 잘못 날렸다간 금방 돌가루를 먹인 다른 연줄에 당해 끊어지기 십상이니 한적한 곳이 좋겠어.”
언은 들고 있던 떡 보퉁이를 조설아의 품에 안겨 주었다.
“연날리기는 네 오라비보다 내가 확실히 일가견이 있지. 도성 안팎에 연날리기 좋은 명당은 죄다 꿰고 있으니 너희들은 이거나 씹으면서 따라오너라.”
“저희야 그렇다 쳐도, 저하께서는 어찌 석강도 제쳐 놓고 나오신 것입니까?”
뒤늦게 도겸이 타박했지만 이미 이들과 동행하기로 한 언은 앞장을 선 채였다.
“그게 궁금하면 어디 자네도 따라와 보든가.”
아마도 제가 나서지 않으면 세 사람은 밤새 여기 서서 옥신각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 하나도 제대로 날리지 못하는 자들이 무어 한다고. 언은 의기양양하게 앞섰고, 그 뒤를 재빨리 익위사들이 따랐다.
“뭐 해? 안 오고.”
그 뒤를 무심한 청이 먼저, 청의 명령에 복종하기로 한 조설아가, 그리고 못내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도겸이 따랐다.
얼결에 한자리에 모인 네 남녀의 야행이 시작되었다.
***
선두에 선 언을 따라 걷던 중, 기어이 참지 못한 도겸이 물었다.
“대관절 북촌에 가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리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냐?”
조설아가 청에게 준 굴욕을 설욕할 시간이었다.
“모두가 예상한 그대로였지요.”
청은 딴청을 피우는 조설아를 바라보며 당한 그대로를 줄줄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