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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60)화 (145/197)

“당연히 상궁이 되었을 땐 나인들 단속에 매일 혀가 부어오를 지경이었습니다. 오죽 잔소리를 해 댔으면 그랬을까요.”

가만 듣다 보니 도겸의 머릿속에 슬그머니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는 자네는 없었나? 그런… 연심을 품은 적이.”

조심스레 물은 말에 남산댁이 시선을 떨구며 두 손을 모아 잡았다. 대단히 의외였다. 또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되어 도겸은 더 자세히 물을 수가 없었다.

“어찌 없었겠습니까.”

주름진 손을 내려다보던 남산댁이 문득 희미하게 웃으며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이제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마음처럼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라며, 궁녀로 살아가는 것보다 중한 것은 없노라 애써 마음을 다잡고 말았지만….”

그러다 별안간 점차 노을을 담은 시선으로 도겸을 바라보았다.

“나이를 먹고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도겸은 남산댁의 눈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남산댁이 제가 아닌 제 눈을 통해 다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도겸의 부채질이 마냥 느려졌다.

“궁녀로 사는 인생이 전부라며 아이들을 다그친 게, 조금은 후회가 될 정도로요. 어쩌면 그 아이들은 평생에 단 한 번 만날 수 있는 인연을 만났던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머리로 내는 답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나리.”

“…하지만.”

반박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이미 겪은 남산댁이 훨씬 더 많이 알았을 게 분명한지라 입만 피곤할 일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목석처럼 살 것이라면 차라리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묵묵히 돌아가는 물레방아로 태어나는 게 나았겠지요.”

늘 그렇듯 남산댁은 결코 도겸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않았다. 그저 길을 제시할 뿐이었다.

“그치만 하다못해 물레방아도 겨우내 물이 꽁꽁 얼면 멈추는데 사람이라고 한결같기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다만 이번만큼은 조금 따지고 싶었다.

청이를 세자빈으로 만들 작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제게 생겨난 연심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음이지 않나. 설령 세자빈이 되기 전에 일이 마무리된다 한들 그 아이는 어차피 돌아가야 하는, 아니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 아닌 용이다. 그런 이를 어찌 마음 놓고 은애할 수 있느냔 말이다.

감정으로 얼룩져 흐트러지는 도겸을 바라보며 남산댁이 나직이 말했다.

“아씨를 바라보실 때 나리께선 그제야 제 나이에 맞는 때를 찾으신 것 같았습니다.”

“…….”

“늘 너무나 많은 것들을 어깨에 이고 허리에 지고 걸어오신 분이, 그제야 편안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남산댁.”

“나리에게 봄을 가져다주신 분을 이대로 궐로 들여보내실 작정이십니까?”

“일면만 보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네. 그러니 제발!”

부지불식간에 간신히 누르고 있던 감정이 쏟아질 뻔했다. 약간 터져 나온 숨에 언성이 커졌다.

물론 금세 다잡았지만 남산댁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도겸은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이었다.

“이렇게, 이렇게… 내가 철없게 욕심부려도 된다고 부추기지 말아 주게. 부탁이네.”

억눌러 참은 감정이 심장을 멋대로 괴롭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머리까지 괴롭히기 시작했다. 갑자기 지끈거리는 통에 괜스레 망건 위를 꾹꾹 누르는데 남산댁이 조용히 사과했다.

“…송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남산댁은 대단히 서글픈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오해를 풀자면 소인은 부추긴 것이 아니라 그저 보이는 그대로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

“그러니 이미 그 마음을 꼭 감추기로 결정하신 것이라면, 더는 들키지 마십시오. 이대로 가다간 순이까지 알아차릴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도겸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남산댁이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소인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디 찬 바닥에 오래 앉아 있지는 마시고 나리께서도 안에서 기다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고개를 숙인 남산댁이 깔려 있는 손수건을 정리하고는 댓돌을 마저 올라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홀로 우두커니 남은 도겸은 그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따스한 바람에 실려 오는 완연한 꽃향기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봄은… 지나가기 마련이지 않나.”

그래. 봄이 잘못한 것이다. 괜히 사람을 꽃잎처럼 가볍게 만들어서는 이리저리 두둥실 떠다니게 하고 있질 않나. 도겸은 조금 울고 싶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떨군 그가 두 손으로 아픈 머리를 짓눌렀다.

“여기서 뭐 해?”

애꿎은 계절을 탓하며 그만 들어가 화전에 차가 아닌 술이라도 한잔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부쩍 길어진 그림자와 함께 익숙한 꽃신이 시야에 들어와 퍼뜩 고개를 든 도겸을, 청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애써 얼리고 있던 마음이 다시금 녹아내리고 말았다. 도겸은 직전까지 어지럽게 번민하며 괴로워하던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청을 붙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별일 없었느냐?”

“없었어.”

“다친 곳은 딱히 없어 보인다만….”

“없다니까.”

퉁명스럽게 구는 청은 다행히 집을 떠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한시름 놓은 도겸이 청의 어깨를 감싸며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북촌으로 찾아가려던 차였다. 너와 함께 외출을 하려고 했는데, 일단은 집으로 들어가서….”

그러나 청이 도겸을 밀어냈다.

“그 전에, 손님이 있어.”

“손님? 무슨….”

무심코 청이 가리키는 곳을 본 도겸은 하마터면 댓돌 위에 도로 주저앉을 뻔했다.

청이 다른 사람도 아닌 이무기를 집 앞까지 데려온 탓이었다.

***

“저하, 잘 계시다가 어찌 이리 또 경거망동하시는 것입니까.”

저자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든 언을 안전하게 호위하려 여기저기 포진한 익위사들과 시선을 주고받던 좌익위가 기어이 한 소리 했다.

와중에도 언은 조심성 없이 상전 위에 놓인 화전을 쓸어 담듯이 사고 있었다. 그러곤 좌익위의 걱정어린 충언에는 알록달록하고 고소한 내음이 진동하는 화전과 쑥떡으로 보답했다.

“자. 자네들도 먹어 가며 따라오게.”

언은 꾸러미를 익위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얼결에 받은 좌익위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이미 주군은 다음 가가를 구경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하….”

“할마마마께는 어떤 걸 사다 드리면 좋을까? 지난번에 사다 드린 것을 퍽 마음에 들어 하셨단 말이지. 그럼 이번엔 더 맛난 간식거리를 사 가야 할 터인데 말이야.”

“석강은 이대로 넘기실 작정이십니까?”

“응? 자네도 좀 찾아보게. 말랑말랑하고, 적당히 달짝지근하면서 보기에도 어여쁜 것으로.”

“저하.”

“어허, 자네도 보았지 않나? 아슬아슬하게 해가 떨어지기 직전까지 주강을 하고 있던 것을. 거기에 아침에 미처 못 한 조강에 지금 하여야 할 석강의 분량까지 포함이 되어 있었다네. 걱정할 것 없어.”

“참인 것입니까?”

“자네, 나 못 믿나? 거기다 오늘 주강에 참관하신 아바마마께서 기특하다 하시며 따로 외출을 허락해 주셨대도?”

“그래도 전하께서 윤허하여 주시자마자 득달같이 이리 나오는 것은 좀….”

“어허, 기회는 왔을 때 무조건 잡는 게 미덕이지. 언제 또 금족령이 내려질지도 모르는데.”

이 구역의 큰손임을 과시하며 여기저기서 돈을 써 대는 언의 걸음은 점차 수표교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좌익위도 모르지 않는 듯했다.

“혹시 연을 날리러 가실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언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아….”

언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음식만 잔뜩 들고 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공부하느라 미처 연을 만들지 못했군.”

“예?”

“삼짇날에도 연을 날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

연을 날릴 생각이 없었음에도 자연스레 발걸음이 연을 날리던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그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몸은 기억하고 있던 건가….”

언은 씁쓸하게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삼짇날은 집에 갇혀 살다시피 하는 여인들이 일 년 중 유일하게 자유로이 외출하는 날이었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거리엔 색색의 어여쁜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지나는 부녀자들이 많았다.

“별수 없지. 그럼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애송이들이 연싸움을 하는지 구경이나 해 볼까나.”

화전을 하나 꺼내어 입에 문 언이 언제 사색에 잠겨 있었냐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하!”

그렇게 얼마간을 걸었을까. 곁을 지키던 좌익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언의 앞을 가로막으며 단단히 지켜 섰다.

“왜 그러는가?”

“저길 보십시오.”

별 의심 없이 좌익위가 가리킨 다리 위를 살핀 언은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조설아가 다리 위에 서 있었다. 좌익위의 수신호에 익위사들이 사방에서 바짝 긴장하며 경계했다. 언도 낯빛을 굳혔다.

“근방에 조익환이 있는 건 아닌지 살펴 보게.”

“예!”

화살이 날아와도 막아설 작정으로 사방을 두루 경계하는 것에 열심인 익위사들의 중심에 선 언의 명령에 좌익위가 즉각 복종했다. 물론 언 본인도 조설아의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지라 조설아가 정확히 누구와 함께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는 저 여인이 이무기라는 사실이 아직도 얼떨떨했다. 조설아가 이무기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단순히 가녀린 규수가 홀로 다니는 것이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넘겼을 테니 말이다.

언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지켜볼 때, 조설아의 주변에 있던 한 무리의 사람이 빠져나가며 마침내 작은 소녀와 일행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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