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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59)화 (144/197)

흐름을 파악하고 나자 청은 도리어 한결 차분해질 수 있었다.

“지금 그 말은 내 오라버니와 아버지를 방면해 주신 주상 전하께 해야 맞는 것 아니오?”

“뭐, 뭐요?”

“내 아버지가 좌상 대감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웠든 아니든 그러한 결정을 내리신 것은 주상 전하시니 말이오.”

청은 선을 넘은 처녀들과 천천히 시선을 마주하며 나직이 경고했다.

“조 낭자의 환심을 사려다 더 큰 것을 잃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어 해 주는 말이오.”

“…….”

“…….”

구태여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는 따로 있기에, 청은 더 이상 억지로 조설아의 역성을 드는 여인들과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상 간택에 참여할 내 의지를 꺾기 위해 남아 있던 것이라면 소용없으니 그만 돌아들 가시오. 나는 낭자들의 어설픈 핍박에 굴할 생각도 겨를도 없소.”

“피, 핍박이라니. 나는 사실을 말한 것이오!”

“그렇다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면 되겠소?”

청은 그때까지 수수방관하던 조설아를 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처녀들이 무엇을 가져왔든 내 선물에 비할 바가 못 될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심 낭자. 우리가 무얼 가져왔는지 보지도 못했으면서 어찌 그리 호언장담하는 것이오?”

“맞소. 예법도 배우지 못한 것이오?”

처녀들이 저마다 콧방귀를 뀌며 청을 업신여겼다. 청은 별 감흥 없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낭자들은 예법을 배운 사람들이라 이리 떼 지어서 목소리를 키우고 있소?”

“그…!”

간단하게 어린 처녀들의 입을 다물게 한 청이 덧붙였다.

“그리고 선물의 가치는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판단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뭐라고 했소, 지금?”

“하지만 이 경우엔 확신할 수 있지. 조 낭자가 낭자들의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도 까맣게 잊을 만큼 내 선물에 가장 만족하리라는 것을.”

“……!”

그 말을 듣자마자 조설아가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청은 온화한 투로 덧붙였다.

“그만큼 귀한 선물인데 다들 보는 곳에서 꺼내는 게 좋겠소, 아님 모두 보내고 조용히 꺼내 보이는 게 좋겠소?”

청을 노려보던 조설아가 결국 다른 처녀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오늘 함께 담소 나누어 즐거웠습니다. 그만 돌아들 가시지요.”

“예? 아니, 설아 낭자 혼자 어찌 이 드센 심 낭자를 이긴단 말입니까?”

“걱정 말고 가시지요.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됐다고 몇 번을 말해! 당장 꺼지라는 말 안 들려?!”

기어이 조설아가 악을 쓰며 열을 내고 말았다. 작은 몸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고함 소리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처녀들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아… 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처녀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다 꼭두각시처럼 일제히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내놔.”

처녀들이 건물을 나서자마자 조설아가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손을 내밀었다. 청은 처녀들이 나간 문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왜 애먼 사람들을 끌어들여?”

“지들이 살겠다고 알아서 아부하는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럼 여의주 돌려줄 테니까.”

청이 품에 보관하고 있던 검은 구슬을 꺼냈다. 조설아의 눈이 커졌다.

“나한테 아부해 봐.”

“…뭐?”

그러나 이어지는 청의 말에 다시 사납게 일그러졌다.

“오늘 하루 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면 돌려줄게.”

청은 산뜻하게 미소 지은 채였다.

***

청을 북촌으로 보내 놓은 이후 도겸은 내도록 좌불안석이었다.

“나리, 아직 아씨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까? 안에서 기다리지 않으시고요.”

조익환의 집 앞까지 따라갈까도 했었다. 그러나 이무기가 알아차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며 청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도겸은 결국 대문 밖에서 서성이며 청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사랑채에서, 그다음엔 마당에서, 그러다 기어이 마당 청소를 하던 순이에게 쫓겨났다는 핑계를 대며 문 밖까지 나온 참이었다.

“아님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삼짇날이라 화전도 부쳤는데 같이 드시지 않고요.”

도겸을 찾아 약간 열린 대문 밖까지 나온 남산댁이 걱정했지만 그는 고집을 부렸다.

“아닐세. 청이가 오면 바로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

그러자 도겸을 잠시간 바라보던 남산댁이 아예 밖으로 나와 곁에 섰다.

“왜 들어가지 않고?”

“이렇게 같이 서 있으면 나리께서 홀로 하릴없이 누군가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모양새가 되지 않을 듯하여서지요.”

뜨끔한 도겸이 슬쩍 물었다.

“그, 그리도 많이 처량해 보이는가?”

“물론 이리 헌칠한 선비님께서 서성이고 계신다면 미욱한 자들의 눈엔 성현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고심하는 군자의 모습처럼 보이겠지만요.”

일부러 사족을 길게 붙이는 걸 보니 속마음을 읽어낸 것이 확실했다. 체면을 생각해 주느라 알면서도 부러 돌려 말하고 있지 않나. 도겸이 무안함에 헛기침을 하는 동안 남산댁이 작게 웃었다.

“아씨가 그리 걱정되십니까?”

걱정됐다. 청이 처음과 달리 어느 순간부터 이무기에게 무척이나 관대하게 구는지라 또 당할까 봐, 혹은 조익환이 놓은 또 다른 함정일까 싶기도 해서.

…그래서 그 여인을 잃을까 봐 늘 조마조마했다.

“아니, 뭐 그런 것보다는… 어차피 함께 밖에 나갈까 하는 터라 바람도 쐴 겸 기다리고 있던 것이지.”

그래도 솔직하지 못한 양반은 못내 둘러대고 말았다. 그런 도겸을 또 말없이 올려다보던 남산댁이 갑자기 끙 소리를 내며 대문간의 댓돌 쪽으로 향했다.

“그럼 소인도 잠깐 바람을 쐬겠습니다. 한데 나이가 들어 슬슬 무릎이 아파 서 있기가 힘든지라. 조금 앉아도 되겠습니까?”

“무어 일일이 묻고 그러는가. 그러시게.”

남산댁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제 자리가 아닌 곁에 얌전히 깔았다.

“나리께서도 한참을 서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리 오십시오.”

남산댁의 권유에 댓돌로 다가간 도겸은 펼쳐 놓은 손수건 위에 앉지 않고 손으로 툭툭 가리켰다.

“자네가 이쪽으로 와 앉게.”

남산댁이 수건 위에 앉지 않으면 저는 아예 앉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어렵지 않게 도겸의 뜻을 이해한 남산댁이 수줍게 웃으며 수건 위에 앉았다. 그리고 나서야 도겸이 그 옆자리에 순순히 앉았다.

“이리 다정하시니 나리를 아는 여인들은 모두 나리만 보면 뺨을 붉히는 게 아닙니까.”

“무어?”

부채를 꺼내 드는 도겸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게 겨우 다정한 일이라 치부될 만큼 다른 사내들이 영 시답잖은 모양이군.”

그로서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던 행동 그대로만 따랐을 뿐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 시간은 도겸으로 하여금 충분히 인간의 됨됨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훌륭한 지침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 나리께서 배필을 맞이하신다면.”

도겸이 꺼낸 부채를 자연스레 가져간 남산댁이 천천히 부채질을 해 주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열이 많아 더위를 타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

“그때부턴 이리 분별없이 다정하시면 아니 됩니다.”

“음?”

“이리 대문 밖에 나와 기다리시는 것도, 누이에게 심장이 뛰는 것을 들키는 것도.”

북촌에서 돌아오는 길목을 바라보던 도겸이 흠칫 굳어졌다. 놀라 돌아본 시야에 측은해하기도, 웃는 것 같기도 한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산댁이 들어왔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씨께서 제게 물으시더군요. 혹 나리에게 무슨 병이 생기신 것은 아닌가 하고요.”

몇 번인가 병이 생긴 게 아니냐 했을 때 시늉으로라도 의원을 부를 걸 그랬다. 도겸은 저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꼭 아씨께서 궁금해하시지 않으셨어도 소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남산댁은 도겸을 더욱 곤란하게 했다. 벌써부터 귀를 붉히는 도겸을 보며 남산댁이 옅게 웃었다.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나리께서 아씨를 바라보실 적에 그 눈빛부터 먼저 완연한 봄이 되어 버렸는걸요.”

“봄….”

“이젠 아씨를 바라보시는 나리의 눈에서 꽃향기가 날 것 같은데 나리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아, 혹여 소인이 크게 곡해하여 받아들인 것이면 경을 치셔도 좋습니다만.”

정중한 말투였으나 남산댁은 내기라도 걸듯이 호기롭게 굴고 있었다. 그런 남산댁에게 도겸이 보일 수 있는 투정이라곤 괜스레 남산댁에게서 부채를 빼앗아 열이 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하는 것뿐이었다.

저조차도 오래도록 부정만 하다 겨우 받아들이고 꼭꼭 숨기고 있던 마음을, 누군가에게 함부로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간파한 남산댁에겐 더 이상 부정해 봤자 더욱 낯부끄러운 일이 될 것임을 잘 알기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내를 보며 웃던 남산댁이 별안간 서글픈 얼굴을 했다.

“그거 아십니까? 세책점에 많고 많은 가상의 연정 소설보다 저 구중궁궐 담벼락 안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연애가 훨씬 많다는 것을요.”

그러자 도겸의 부채질이 약간 느려졌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얼핏 이해하지 못한 그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간혹 들어 알고 있긴 하다만, 그 정도로 많았던 것인가?”

“나리께선 그저 규장각에 앉아 책을 읽으시다 지나가는 서리들이 전하는 때 묻은 이야기나 들으셨겠지요.”

“그야 그렇지만.”

“소인은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중심에 있지 않았습니까. 생각시 시절에는 그런 짓을 벌여 목숨을 잃는 항아님들을 보았고, 계례를 올리고 쪽을 찌어 나인이 되었을 땐 동무들이 궐을 오가는 별감들과 불장난을 하다 쫓겨나거나 중죄인이 되어 벌을 받는 일이 못해도 달에 두어 번은 있었더랍니다.”

“…허?”

달에 두어 번이라니. 도겸은 제가 매일 입궐했던 그 궐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빠르게 몰입하여 도겸의 커지는 눈을 본 남산댁이 한숨만 폭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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