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58)화 (143/197)

청의 얼굴에 가볍게 미안수를 발라 준 남산댁은 어쩐지 다른 때보다 얼굴에 웃음기를 많이 띠고 있었다.

“아직 목적 달성이 안 됐는데 죽어 버리면 곤란하니까.”

“아니, 제 말은….”

딱히 본격적인 화장을 할 필요 없이 얼굴을 정리해 준 남산댁이 물었다.

“저는 아씨처럼 사람이 아닌 존재는 어떨 때 가슴이 뛰는지 궁금하군요.”

“나?”

“내가 어떤 감정인지를 확신하고 상대를 바라보면… 더 확실히 답이 나오기 마련이지요. 나와 무엇이 같은지, 혹은 무엇이 다른지가 바로 보이니까요.”

단장이 모두 끝났다. 남산댁이 청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아씨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를 먼저 살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말을 듣자 청은 저도 모르게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힘이 응축된 구슬은 박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

“서촌 아씨께서 오셨습니다!”

한밤중에 찾아 마구 부숴 놓았던 북촌의 저택은 낮에 보니 훨씬 더 컸다. 도겸의 집에 비하면 서너 배는 되는 듯했다.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부터 느꼈지만,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여기저기서 소음도 냄새도 너무 많았다. 운종가보다야 당연히 훨씬 질서정연하더라도 어차피 청이 느끼기엔 거기서 거기였다.

“…이런 데서 어떻게 사는 거지.”

안내를 받아 별당으로 향하면서도 청은 이무기가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샘이나 연못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사는 걸까. 만약 도겸이 이런 집의 주인이었다면 다른 걸 떠나서 정신이 사납다는 이유로 다른 조력자를 찾아 나섰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너무 좋습니다!”

“향은 어찌 이리 좋은 것입니까?”

별당 가까이에 갈수록 벌써 도착한 처녀들이 하하호호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청이 지내는 안채보다 훨씬 큰 건물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있었다. 미시(오후 1시-3시)까지 와 달라는 전갈이었지만 어쩐지 제가 제일 늦은 느낌이었다.

“설아 아씨, 서촌 아씨께서 오셨습니다!”

청을 안내해 온 사람이 별당에 청의 도착 소식을 알렸다. 순간 안쪽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드시게 하여라.”

그리고 조설아의 허락이 떨어졌다. 청은 열리는 문으로 인기척도 내지 않고 여유로이 걸어 들어갔다. 어쩐지 안내해 온 사람이 문 안으로 따라 들어온다 싶더니 안쪽의 문을 한 번 더, 복도를 따라 들어가 안쪽에 있는 문을 한 번 더 열고 나서야 모여 있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간이 몇 신데 이제 오는 것이오?”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여인들의 숫자는 조설아를 포함한 여섯이었다. 저까지 총 일곱이 재간택에 든 것이다. 청은 장옷을 벗어 정리해 한쪽 팔에 걸며 누군가의 물음에 응했다.

“난 그저 초대 시간에 맞춰 온 것인데, 다른 낭자들이 심히 한가로웠던 것 아니오?”

“그게 무슨 소리요? 조 낭자께서 우리를 초대한 시간은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가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점심 식사부터 함께하자 하여 일찍부터 점심을 먹고 이리 수를 놓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여섯 명의 처녀들 모두 수틀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같은 색의 저고리와 치마만을 입고 마주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저마다 색색의 옷을 입고 둘러 앉아 있는 모양새는 퍽 아름다웠지만 청을 바라보는 눈길들은 하나같이 냉랭하기만 했다. 청은 일단 처녀들의 앞에 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심가 청이라고 합니다.”

“감히 왕대비 마마께 말대꾸를 한 처녀가 아닙니까?”

누군가 눈을 흘기며 대놓고 청의 행동을 비난하기도.

“왜, 그… 얼마 전 횡령 사건….”

누군가는 곁에 앉은 다른 처녀에게 귓속말로 심오균과 도겸의 누명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소. 왕대비 마마께 말대꾸한 일은 사실이오. 한데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횡령 사건은 누명을 썼던 일인지라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사건을 반만 파악한 모양이오?”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날카롭게 대꾸하는 청의 행동에 조설아의 곁에 앉아 있던 처녀가 뜨끔하며 눈을 피했다.

“일단 이리 앉으시오, 낭자.”

누군가 자신의 옆자리에 놓인 방석을 가리켰다. 시선을 내리니 조설아를 제외하고도 구면이었다.

“일전에 얼굴을 본 일이 있지 않소?”

송유화였다. 일전에 세책점에서 도겸에게 차를 마시러 가자 조르다 청에게 퇴짜를 맞은 처녀였다.

“그렇소.”

…그래. 그때 도겸을 바라보는 송유화도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청은 묵묵히 송유화의 곁에 앉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송유화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자신의 수놓기에 집중했다. 청의 등장으로 한바탕 소란하던 방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와중에 상석에 앉아 있던 조설아가 입을 열었다.

“함께 모여 점심을 먹고 차도 마시며 담소를 나누면 좋을 듯하여 일찍부터 초대를 하였소만.”

조설아가 말문을 트자마자 다른 처녀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숨소리조차 아꼈다.

“그리하여 모두 시간을 잘 지켜 와 주었는데 심 낭자만 아무런 연통도 없이 나타나지 않아 내 초대를 묵살한 줄 알았소.”

시선은 수틀에 둔, 다소 무례한 태도였다. 청은 제 앞에도 놓이는 수틀과 실, 바늘 따위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내려다보며 심심하게 대꾸했다.

“나는 분명 미시로 들었을 뿐이오.”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일부러 다른 처녀들과는 다른 내용의 전갈을 보내 놓고 뻔뻔하기 그지없지 않나. 어느 정도의 견제와 비난이 들어올 것이라 예상했건만, 생각보다 조설아는 지저분하게 굴고 있었다.

“한데 더 일찍 만나 식사까지 하는 줄 알았다면 우리 집의 훌륭한 육전이라도 가져왔을 텐데 말이오.”

청이 개의치 않고 대꾸하자 송유화를 제외한 처녀들이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육전 말이오?”

“감히 좌상 대감댁에 가져온다는 선물이 육전이라니, 심 낭자가 심히 소박한 것 같소.”

제법 꾸며 입은 처녀들이 조설아를 떠받들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인간들의 음식이라곤 그저 달달한 과자 정도만 먹어 봤던 청으로선 순이가 가장 좋아하는 육전이 가장 괜찮은 음식이라 생각했다. 한데 아닌 모양이었다.

“소박한 것은 가치가 없다 이런 뜻이오?”

“그, 그게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늦기까지 했는데 빈손으로 오는 게 말이 되냐는 소리요.”

한 사람의 말에 반박하자마자 다른 누군가가 토를 달았다. 청은 남산댁의 당부를 생각하며 또한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내가 조 낭자의 초대에 응하여 선물을 준비하든 말든, 내가 왜 낭자들에게 면박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소만.”

“그만들 하시오.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조 낭자가 친히 마련한 자리가 아니오?”

그때 송유화가 나섰다.

“누가 보면 심 낭자를 괴롭히기 위해 모인 자리인 줄 알겠소.”

“따지고 보면 여기 있는 낭자들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 않소.”

그리고 조설아가 눈을 들어 송유화를 응시했다.

“처음부터 심 낭자가 예의를 차려 주었으면 될 일을, 좋은 날에 모두의 기분만 상하게 되었으니 말이지.”

자연스럽게 청은 예의도 인성도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청에 대해 트집을 잡아 궐에 이야기를 흘리려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닐까 예상한 남산댁의 이야기가 맞았다. 그러면서 남산댁은 되도록 잡힐 트집이 없게 하려 짧은 시간 내에 제법 괜찮은 선물 보따리를 준비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청은 남산댁이 챙겨준 선물을 일부러 챙기지 않았다.

“그렇다 한들 모두가 합심이라도 한 듯 몰아세우는 건 좋지 않은 듯합니다.”

다른 처녀들이 조설아를 곁눈질하며 비위를 맞추고 눈치를 살폈지만 송유화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아무래도 도겸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의 딸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라서일까. 청은 인간들의 눈치싸움이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이만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청이 도착할 때도 홀로 웃고 있지 않던 송유화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실은 선약이 있었는데, 조 낭자의 초청에 급하게 오게 되었던 터라. 오늘 즐거웠습니다.”

전혀 즐겁지 않은 얼굴로 무뚝뚝하게 고개를 숙인 송유화가 청을 지나칠 때 작게 소곤대며 조언 아닌 조언을 건넸다.

“귀가 가렵지도 않았소? 내도록 낭자의 흉을 보고 있었는데.”

“…….”

“잘 버텨 보시오.”

송유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당을 나가 버렸다.

그리고 송유화가 경고한 내용대로 집중적으로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사과는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리 기본도 되지 않은 처녀가 어찌 재간택에 들었단 말인가요?”

“너른 아량을 지니신 왕대비 마마와 중전 마마가 아니셨다면 턱도 없는 일이지요.”

“오늘 일을 아신다면 생각이 달라지시겠지요. 이 사실을 왕대비 마마와 중전 마마께선 아신답니까?”

처녀들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가만 듣던 청이 불쑥 물었다.

“낭자들은 내가 지금 무례하게 굴고 있다 느끼는 게 불만인 것이오, 아님 내가 재간택에 든 게 불만인 것이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이제 수를 놓는 일은 뒷전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벌떡 일어나 청에게 언성을 높였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 낭자의 오라버니나 아비나, 좌상 대감께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슬쩍 빠져나온 것을 도성에서 누가 모른단 말이오?”

“차라리 몸이 좋지 않다 핑계를 대고 오지 않는 게 훨씬 예의 있을 뻔했소. 철면피가 아니오? 나라면 설아 낭자를 볼 면목이 없어 선물만 따로 보냈을 텐데.”

그때까진 참을 만했건만, 심오균과 도겸을 건드리려 하자 청도 더는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둘 다인 모양이네.”

청은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있던 처녀들을 가로질러 문제의 발언을 한 여인의 앞에 바짝 다가가 섰다. 뜨끔한 처녀가 약간 물러났다.

“무, 무엇 하는 것이오? 손찌검이라도 하려는 것이라면!”

물러났던 여자가 순간 조설아의 눈치를 살피곤 뺨을 슬쩍 청에게 내밀기까지 했다.

그제야 청은 눈치챌 수 있었다. 청으로 하여금 억지로 폭력을 행사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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