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가 인간들은 이렇게 약속한다고 했어.”
“…….”
“이렇게 하면 월하노인이 혼에 약속을 새겨 준대.”
“워, 월하노인이 뭘 새겨 준다고?”
하얀 손과 청을 번갈아 보던 도겸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흔쾌히 제 손가락을 걸었다.
“…그래. 어쨌든 약조하마.”
손가락을 걸어 약속하는 청과 도겸의 사이로 봄바람이 먼저 불어왔다. 이때다 싶었는지 꽃나무가 꽃잎을 실어 보냈다.
그 광경이 청의 눈엔 마치 마른 바다에서 내리는 물기 없는 비처럼 느껴졌다.
최도겸을 닮은 따뜻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아마 견제가 많을 것입니다.”
조설아의 초대는 그야말로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전갈을 보낸 당일 오후에 북촌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명분이야 나쁘지 않았다. 함께 재간택에 든 기쁨을 나누자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부정적인 의미가 훨씬 많았다. 재간택에 든 처녀들의 신상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데다 굳이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대외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는 의도를 다과회라는 핑계를 들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 쓰고 있지 않나.
거기다 다른 처녀들이 새로 옷을 지어 입는다든지, 겉을 꾸밀 틈도 주지 않으려는 속셈도 보였다. 조설아야 당연히 준비가 되어 있겠지만 시간이 없는 다른 처녀들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간택에 들어갈 때 입을 옷마저 새로 지어 입지 못해 빌려 입는 경우가 많았다. 초간택은 몰라도 재간택부터는 기선 제압을 하려는 게 분명하다며 언과 도겸은 열을 올렸다.
“혹 다른 처녀들이 아씨를 욕보이려 한들 그것은 아마도 살기 위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말일 터이니 마음에 담아 두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남산댁은 청의 머리를 빗고 댕기를 내려 주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아마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겠지만 말입니다.”
머리 장신구를 고르던 청이 알 만하다는 듯 시큰둥하게 물었다.
“나를 걱정하는 거야, 날 욕보일 처녀들을 걱정하는 거야?”
그러자 남산댁이 뜻밖의 답을 돌려주었다.
“저는 나리와는 다릅니다.”
“뭐?”
“나리처럼 군자의 인품을 가져 두루두루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사람이 아닌 한낱 소인배인지라, 내 편이 가장 중요하다 이 말이지요. 저는 아씨를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내 편이라면 신경 쓰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불쑥 돌아앉은 청이 따져 물었다.
“똑같이 되갚아 주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소인은 아씨의 편이라고.”
“근데?”
“아씨를 욕보인들 어차피 좌상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하는 짓일 텐데 괜한 힘을 들여 무엇 한답니까. 그건 오히려 좌상이 바라는 짓일 것입니다. 잔뜩 긴장한 채로 행동하다가 허점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남산댁은 청이 골라 둔 머리 장신구를 손수 꽂아 주며 설명했다.
“그저 아무 의미 없는 괴롭힘에 아씨의 마음이 상할까, 소인은 그것이 가장 걱정되는 것입니다.”
새삼 청은 ‘심청’이 된 이후로 과보호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몸이 다칠까, 누군가는 마음이 다칠까… 하물며 누군가는 약속이 깨질까 혼을 걸어 가며 진지하게 약속하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지 않나. 처음엔 약자로 보고 무시하는 걸까 싶었지만 이젠 조금 다른 기분이 들었다.
“…알았어. 얌전하게 앉아 있다가 올게.”
“사실 저보다는 나리께서 어찌나 노심초사이신지 모릅니다.”
어쩌면 알에 들어 있던 저를 지키던 어머니의 표정이 지금의 남산댁과 같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청이 어머니를 생각하던 차, 남산댁이 청을 바라보다 슬쩍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가 나와 말인데, 초간택에 들던 날 아씨께서 물어보셨던 것 말입니다.”
“아… 그 심장 소리 물어봤던 거?”
“예. 사람은 언제 심장이 평소와 달리 바삐 뛰는지를 궁금해하셨지요.”
“응.”
“소인이 그 답을 드리기 전에, 아씨께서 왜 그걸 궁금해하셨는지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왜겠어, 우리 오라버니가 죽었다 깨어난 뒤로 심장에 병이 생긴 것 같아 그러지.”
“나리께서요?”
남산댁이 금세 심각한 얼굴로 의원을 불러야 하나 고민했다. 청은 남산댁이 판단하기 좋게 몇 가지 예시를 들었다.
“세책점의 점원이 춘화첩이라는 걸 보겠냐고 물었을 때, 그리고 나랑 몸이 닿을 때… 간택이 있던 날, 단장하고 나가서 마주쳤을 때도 그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예시들을 줄줄 읊다 마지막 예를 들 때는 청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남산댁이 그런 청을 유심히 살폈다.
“전엔 안 그랬는데 독약을 먹고 잠들어 있다 깨어나서 나를 봤을 때… 그때 이후로 특히 그래.”
정말 도겸에게 병이 생긴 것이라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는 의원을 부르겠다 해 놓고 도통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청이 먼저 의원을 찾아가기엔 사람에 대해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그런 면에서 남산댁은 청의 의문을 해결해 줄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나를 보고 두려워하는 자들의 심장 소리가 커진다는 건 알아. 그럼 오라버니도 내가 아직 두려운 걸까?”
“예?”
생각할수록 조금 억울해졌다. 청이 작게 투덜댔다.
“서로 독점하기로 한 뒤로는 해하려고 한 적도, 그럴 생각도 한 적 없는데.”
“아….”
청은 잔뜩 심각한데 어째 남산댁은 웃고 싶어 하는 듯했다. 심지어는 늘상 잔잔한 물 같던 남산댁의 심장 소리마저 커지는 터라 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혹, 나리의 귀가 붉어지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응. 거의 대부분 그랬어.”
그러자 남산댁의 얼굴이 상기되기까지 했다. 청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왜 그러냐니까?”
청은 인내심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데 어쩐지 남산댁은 느릿느릿, 느긋하기만 했다. 뭔가를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수 있죠. 암요. 사람이 큰일을 겪고 나면 미처 몰랐던 마음을 깨닫기도 하니까요.”
남산댁은 무려 궐에서 세자빈을 모시던 사람이었다. 웃전의 기분을 살피는 일에 특화되어 있기에 청이 기어이 터지기 직전, 아슬아슬한 때에 맞추어 답을 내 주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병이 있어서라기보다 보통은 사람의 마음 상태가 좌우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 그 정도는 알고 있는데….”
“아씨께서 저자에 나가시면 으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시지 않습니까. 그때 사내들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끼신 적은 없는지요?”
남산댁은 슬쩍 어조를 낮추며 덧붙였다.
“…혹은 평소 나리 말고도 아씨의 곁에 자주 계시는 세자 저하라든지.”
청은 가만 기억을 되짚었다.
“다른 사내들은 그런 편이었지. 주로 거리를 좁힐 때.”
보통은 홀로 지내는 용이 거리를 좁히는 경우는 용으로서의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일 때가 많기에 충분히 긴장할 만했다. 저조차도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몰라 그때만큼은 얼어붙었던 심장이 녹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런데 세자 저하는 좀 달랐어. 내가 문 밖에 나타난 사람이 누군지를 맞힐 때 심장이 제일 빨리 뛰었으니까.”
“그러셨군요….”
아직 확답을 주기 어려운지 남산댁이 다른 것을 물었다.
“혹, 기억하십니까? 언젠가 아씨와 제가 안채에서 예절 수업을 하다가 나리께서 퇴청하고 돌아오셨다 하여 행랑마당으로 인사를 나갔을 때였는데.”
“오라버니가 궐에 갔다 왔을 때 맞이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그날은 조금 달랐습니다. 행랑아범과 순이, 그리고 아씨를 모시고 나간 제게까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신 나리께서 유독 아씨에게만은 찬바람이 쌩쌩이셨으니까요.”
“찬바람이 쌩쌩?”
“그러니까… 제가 그때 아씨께 여쭙지 않았습니까? 나리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것이냐고.”
남산댁의 부연이 붙고 나서야 선명하게 기억났다.
“아, 응. 대답하려고 했는데 됐다고 했었잖아.”
“예. 그때… 나리께서 아씨를 한동안 피해 다니시기 전에 뭔가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아, 물론, 소인이 알 필요 없는 문제라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청은 잠시 고민했다. 남산댁에게 도겸을 강제로 넘어트려 눕힌 뒤에 저고리를 찢을 듯이 잡아 벌리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어 냉기를 뽑아냈던 일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말할 테니, 되도록 너는 그 일을 입에 담지 말거라. 다른 사람에게도 절대. 알겠느냐?”
없다. 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필요 없는지는 모르겠는데 말하지 않기로 해서.”
말하지 않았음에도 남산댁은 그 안에서 뭔가를 알아차리고 이해했다. 오히려 청의 대답을 듣고 확신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마음 상태에 좌우된다는 게 뭔데.”
“지나치게 움직여서 빠르게 뛰는 것을 제외하면 보통 사람은 긴장하거나, 놀라거나, 화가 많이 나거나, 고대하는 게 있어서 흥분하거나.”
남산댁이 한 가지씩 천천히 설명했다.
“…은애하는 이를 만났을 때도 가슴이 빨리 뛰곤 합니다.”
청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많네.”
명확한 답을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보기가 너무 많았다. 청이 실망하는 것을 느꼈는지 남산댁이 흐뭇하게 웃으며 보기를 줄여 주었다.
“하나 나리께서 아씨를 귀히 여기시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부정적인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긴 하겠지.”
“아마도… 나리께선 지금쯤 심중이 아주 어지러우시겠군요.”
“왜?”
“본인도 아직 확실히 자각하지 못하셨거나, 자각하셔서 괴로우신 게 아닐까 하거든요.”
“…하긴.”
본인도 정확한 이유를 알긴 어렵지 않을까.
“어쨌든 심장에 병이 생긴 건 아니구나.”
“예. 심장에 병이 생겼다면 간헐적으로 마구 뛰는 일 말고도 눈에 보이는 다른 증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다행이고.”
“걱정하신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