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의 시선이 단박에 고정됐다.
“여의주를 빼앗기고 어설프게 키운 인간성마저 잃어 가고 있었어. 더 있으면 폭주할지도 몰라.”
“그럼 간택 자체는 무리가 없겠지만….”
언이 걱정하며 도겸을 바라보았다. 도겸도 사람이 아닌 자라는 변수에 대해서는 어찌 함부로 단언할 수가 없어 어깨만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이무기를 어찌 빼내고, 또 어찌 잡아 둔단 말이냐?”
도겸은 신물을 갖고 있는 청이 당연히 이무기를 사로잡아 제압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청의 즉답은 도겸도, 언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뭘 어떡해. 지켜야지.”
“지…키다니. 이무기를?”
“응. 조익환이 더 물들이지 못하게.”
“아니, 전력을 분산시키면 좋기야 하겠다만….”
도겸은 다시 한번 언과 눈짓을 교환했다.
“이무기가 과연 순순히 우리의 보호를 받으려 하겠느냐?”
“정신부터 차리게 해야지. 그래야 자기가 몸 담그고 있는 물이 얼마나 썩었는지 깨닫게 될 테니까.”
청은 손대지 않은 찻물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무기는 진짜 조설아에게서 은혜를 입은 것 같아. 그래서 조설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조익환의 딸이 된 거지. 진짜 조설아가 죽기 전에 간절히 바랐던 소원을 대신 이루어 줌으로써 은혜를 갚고 싶었을 테니까.”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다만 조익환에겐 이무기가 굴러 들어온 복덩이였겠구나.”
듣자하니 포악하게만 보였던 이무기가 안쓰러워졌다. 언이 중얼거리는 말에 도겸이 수긍하며 덧붙였다.
“비도 내려 주고, 모습을 바꾸어 손쉽게 사건을 꾸며 내니 그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었겠지요. 그렇다 하여 이무기에게 친딸의 신체 일부를 먹인 짓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네. 그자가 한 짓만 줄줄이 나열하면 도저히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긴 하다만 어찌 그런 짓을!”
“…수단.”
둘의 대화를 듣던 청이 조용히 단어 하나를 골라냈다. 그 작은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 도겸이 청을 바라보던 차, 청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남산댁이 왔어.”
“남산댁?”
이미 차를 가져다주었는데 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세 사람이 모두 문가를 바라볼 즈음, 정말로 남산댁이 문 밖에서 고했다.
“이야기 나누시는 중에 송구합니다만 밖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사람? 누구 말이냐?”
“…좌상 대감댁으로부터 왔습니다. 아씨께 전갈을 보냈습니다.”
마침 신명나게 조익환의 뒷담을 하고 있던 터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 모두 움찔 놀라고 말았다. 하나같이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청이에게?”
다시금 두 남자의 시선이 청에게 모여들었다.
***
“아니 된다.”
조강을 포기하고 서촌을 찾았던 언이 주강을 듣기 위해 환궁한 뒤에도 도겸은 단호히 반대했다.
함께 언을 배웅하고 안마당까지 걸어가면서도 옥신각신이었다.
“너무 위험해. 어찌 호랑이 굴에 홀로 들어간단 말이냐?”
“뭐? 호랑이? 너는 내가 호랑이따위한테 질 것 같아?”
정말이지, 독약을 먹고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이후로 최도겸은 훨씬 더 멍청해진 것만 같았다. 청이 눈을 부라리며 따져 묻자 도겸이 그제야 뜨끔하며 반대하는 이유를 댔다.
“그게 아니라 간택에 참여한 규수들만 모이는 자리라면 나는 동석할 수 없을 터인데, 어찌 너를 혼자 보내겠느냔 말이지.”
“네가 같이 가는 게 더 위험하지 않아?”
“그야!”
입씨름을 할 때마다 청산유수로 온갖 성현의 말씀을 인용해 대던 남자가 이렇게 쉽게 말문이 막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멍청해진 것이 확실했다. 청은 측은지심을 느꼈다. 차가운 눈빛은 둥글게 부드러워진 채였다.
“네가 같이 가는 것보다는 나 혼자 가는 게 편하잖아. 지켜야 할 사람이 적을수록 나는 더 손쉽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뭣보다 네가 가 봤자 긁어 부스럼이야. 이무기가 널 반기겠어? 배에다가 그 흉악한 총알을 박은 녀석이 바로 넌데. 좋게 대화하려고 해도 전혀 안 될 거야.”
아침부터 조설아가 보낸 전갈은 재간택에 든 규수들만 따로 모여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자는 초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를 들은 도겸과 언은 황당해했다. 벌써 내명부의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처녀들을 모아 팽주 노릇을 하려 한다며 적잖이 불쾌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떨떠름해하며 뭔가 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키는 도겸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어린애 다루는 것에 능통한 것 같아서 이무기랑 이야기를 좀 해 보길 바랐는데… 그건 글렀으니까 그냥 나 혼자 갈게.”
“그래서 또 다치기라도 하면?”
하지만 아무리 바보가 되었다 해도 한 번 말해서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청은 당연히 이즈음에서 무난하게 대화를 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도겸이 막무가내인 것이 문제였다.
“또 나뭇가지가 네 몸을 관통하기라도 하면 어쩌느냔 말이다!”
그러더니 대뜸 청의 어깨를 붙잡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긴, 인간의 눈으로 보면 어지간히 충격적일 수는 있겠다. 평소의 최도겸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려대어 당황했던 청은 심심하게 납득했다.
“최도겸.”
청은 슬슬 얕은 인내심의 바닥을 느끼며 제 어깨를 붙든 도겸의 두 손을 떼어 냈다.
“생각을 좀 하라고. 조설아가 정말 다시 내 배에 뭔가를 꽂아서 죽이고 싶었으면 집으로 불렀겠어? 지난번처럼 메마른 산으로 불렀겠지.”
남자의 손은 언제나 그랬듯 뜨거웠다. 열은 물을 데우고 끓어오르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꽁꽁 얼리기도 하는 무서운 힘이다. 늘 뜨거운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청으로서는 저를 자꾸 변하게 하는 도겸의 체온이 조금….
두려웠다. 성수청의 무녀가 했던 말마따나 확실히 가장 뜨거운 인간이 맞았다.
“설령 나를 사로잡으려 해도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넌 내가 다녀오는 동안 네가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고 있어.”
청이 손을 놓아 버리자 도겸이 기어코 순이처럼 울 것 같은 눈을 했다.
“…매번 그리 말하고 가서 꼭 피를 보는데 어찌 걱정을 안 하겠느냔 말이다.”
“내가 누군지 잊었어?”
“알아서 더 괴로운 걸 모르겠느냐?”
질세라 청의 말허리를 자른 도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서. 너무 잘 알아서 더 말릴 수가 없는 게 화가 난다.”
늘 홀로 지내온 청은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다시 알 속에서 성장을 기다리며 어머니의 보호를 받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요긴하게 써먹을 땐 언제고.”
말에 무슨 기운이라도 있는 건지 아슬아슬한 심장이 이상하게 반응했다. 당황한 청이 본능적으로 늘 한결같이 안정적인 샘물을 향해 시선을 돌릴 즈음, 도겸은 반대로 샘의 반대편에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무어 네 능력을 빌어 일을 해결한 게 많기야 하다만… 애초에 네 한 몸만 지키며 세자빈이 되어 달라는 게 내 부탁이었던 것을 잊었느냐?”
물을 향해 서 있는 청을 보며 도겸이 그제야 조금 웃었다.
“그러니 다치지 말거라.”
“같은 소릴 몇 번을 하는 거야?”
대체 몇 번째 듣는 말인지 모르겠다. 최도겸은 한없이 나약한 주제에 건방지게 몇 번이나 겁도 없이 같은 잔소리를 해 댔다.
“도통 그 귀에 새겨지질 않으니 계속 다치는 게 아니냐. 그러니 네가 몸을 사릴 때까지 나는 두고두고 잔소리할 것이다.”
희한한 일이었다. 귓등으로 넘기면 그만이기도 했다. 처음엔 잘못되면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될까 싶어 걱정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거기다 여전히 제 선택이 가장 최선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내가 내 몸을 우선시하다가 네 계획이 어그러져도 상관없어?”
재차 확인하고 싶어졌다. 도겸이 정말 계획을 그르쳐서라도 자신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게 맞는지.
청의 물음에 도겸은 한쪽 눈썹을 슬쩍 밀어 올렸다.
“결국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가는 길인데 누군갈 다치게 하면서 가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말도 두고두고 해 주어야 하는 것이냐?”
“나는….”
“그게 설령 너라도. 물에 들어가기만 하면 비약적으로 빨리 낫는다 하여도.”
이번엔 도겸이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다른 것을 구하기 전에 앞서 너 스스로를 먼저 구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청이 약속하기 전까진 물에 들어가게 두지 않겠다는 듯 그가 다시금 뜨거운 손으로 청의 손목을 붙잡았다.
“약속하거라. 네 몸을 먼저 아끼기로.”
“…….”
“그나마 약속은 잘 지키는 것 같으니 반드시 약조해 두어야겠다, 나는.”
청은 그의 열기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약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약속을 하고 나니 도겸이 순순히 팔을 놓아주었다.
“그래. 그럼 조심히 다녀오도록….”
“나만 약속해?”
멀어지려던 손을 청이 다시 붙들었다. 순간 손목을 부술 듯이 잡는 청의 악력에 도겸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근데 어찌 이리 잡는…!”
“왜 나만 약속하냐고. 너는 약속 안 지키는 부정한 인간이라서 약속 안 하는 거야?”
“뭐?”
도겸이 황당해하며 조금만 더 힘주면 틀림없이 다칠 것 같은 팔을 가리켰다.
“그렇다 하여 지금 벌을 주는 것이냐? 이리 팔을 부수려 하면서?”
“그래서 약속은.”
“이게 겁박이 아니고서야… 아아, 그래, 그래! 약조하마.”
뭔가 따지려던 도겸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다급히 협조적으로 굴었다.
“이제 되었느냐?”
“말로만 말고.”
비로소 도겸을 놓아준 청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린 팔을 매만지던 도겸이 물끄러미 청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