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55)화 (140/197)

언이 도겸의 안내를 받으며 사랑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도겸에게 물었다.

“한데 자네는 궁금하지 않은 것인가? 청이가 재간택에 들었는지 아닌지.”

“그야 당연히 재간택에 들었겠지요.”

도겸의 시큰둥한 반응에 언은 김이 빠진 얼굴을 했다. 디딤돌에 올라 신발을 벗기도 전에 우뚝 멈춰 서는 통에 뒤를 따르던 도겸은 하마터면 언과 부딪칠 뻔했다.

“자네가 몰라서 그래! 심청 저 아이가 간택에 들었다가 할마마마께 무슨 짓을 했는지.”

마루 위로 올라가지 않은 언이 끄트머리에 그대로 앉아 버렸다. 도겸은 언을 따라 곁에 앉았다.

“무슨… 짓이라니요. 저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청이가 말 안 하던가? 그 아이가 자네의 필체를 똑같이 따라 써 버린 통에 할마마마께 개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걸 두고 자긴 생각이 다르다며 반박했다잖나.”

“…예?”

그렇다면 언이 왜 그리 상기되었는지도 납득이 되었다.

“하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이가 재간택에 들었기 때문에 저하께서도 그리 기분이 좋으신 것 아닙니까?”

도겸의 확신에 언이 도겸을 가만 바라보다 허탈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맞아. 할마마마께서 고리타분한 분이셨다면 아마 언감생심이었겠지만 용케 할마마마의 마음에 쏙 들었더군. 듣자 하니 지난번 대사례 때도 청이가 한 번 인사를 드렸던 모양이고.”

“예. 친히 걸음 하셨다 하여 인사드렸습니다. 왕실의 어른이시니 잠시만 대화를 나누어도 배울 점이 있으리라 보고 청이에게 꼭 인사를 드리도록 하였으니까요.”

“크… 역시 자네가 뿌려 놓은 씨앗이었군?”

언이 접선을 펼치며 감탄했다. 부채질하는 그의 부채는 끄트머리가 약간 갈려 있었다. 청이 대뜸 진짜 용을 보여 주겠다며 바닥에 그림을 그린 탓이었다.

“근데 있지. 감히 왕실의 가장 어른께 대들며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도겸은 눈만 끔벅이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언이 눈을 가늘게 뜨며 팔꿈치로 도겸을 푹 찔렀다.

“군자가 성현의 말씀을 외우고 따라 옳은 길을 걷듯 좋은 사람의 글씨를 따라 써야 좋은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더군.”

“…….”

도겸은 순간 명치끝이 복잡해지다 못해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선은 대견했다. 얼마 전 숙부 내외와 나눈 대화를 기가 막히게 활용하지 않았나.

무엇보다 늘 불결하고 더럽다며 피하던 저를.

“좋은 사람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도겸을 바라보는 언의 눈도 작아졌다.

“자네, 어쩐지 귀가 붉어지는 것 같은데?”

“예? 아… 아닙니다.”

가까이 다가오는 언을 피해 도겸이 멀찍이 떨어져 앉을 즈음이었다.

“저하께서 굳이 이른 아침부터 예까지 걸음 하셨다 하여.”

사랑 마당으로 넘어온 청은 가장 좋아하는 푸른색 치마에 꽃이 수 놓인 연노랑 저고리를 걸친 채였다.

“소녀 인사드립니다. 오셨습니까, 저하.”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청을 바라본 언이 새삼스레 감탄했다.

“…저리 불손하고도 예의 바른 아이가 또 있을까!”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저하.”

“되었네. 우리 사이에 무어 그렇게까지.”

언이 웃으며 마루에서 일어났다.

“저만큼 해 주는 게 어딘가. 따지고 보면 저 아이에게 공대를 받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 아닌가 싶어. 무려 내 흉배에 그려진 존재이니 말이야.”

언은 다시 마당으로 내려가 청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도겸이 뒤따르는 동안 벌써 청에게 간택 소식을 전했다.

“굳이 이른 아침부터 예까지 걸음 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네가 재간택에 들었다는 소식을 직접 가져왔기 때문이지!”

“그거 말해 주려고 온 거야?”

“재간택은 보름 뒤… 무어?”

언이 약간 당황하며 그 얼굴의 웃음기마저 굳어졌다. 청을 데리고 온 남산댁이 조용히 인사하고 사라지자마자 청은 그나마 예를 차리던 태도까지 싹 바꾼 채였다.

“당연한 거잖아. 나는 세자빈이 될 생각으로 준비했는데 겨우 여기서 떨어지는 게 말이 돼?”

“아니, 뭐 그렇긴 하다만 저 녀석도 그렇고 너도 반응이 너무 싱거우니 기껏 달려온 보람이 하나도 없어 말이다.”

입술을 비죽이던 언이 대뜸 청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그리고 너는 왕실 최고 어른에게 감히 말대꾸를 한 처녀가 아니냐? 다른 때 같았으면 재간택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도겸과 청이 생각보다 대단한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싶어 보였다.

도겸이 대신 나서려던 차, 청이 먼저 답했다.

“뭐, 어른들 말씀이라면 일단 고개를 숙이라고 배우긴 했지만 그 순간엔 나도 모르게 말이 나가긴 했어. 최도겸은 글씨 가르칠 때 똑같이 쓴다고 뭐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그러자 언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러니까, 내 할마마마께서 하시는 말씀보다 도겸이 저 녀석의 말이 옳다?”

“그게 왜 그렇게 흘러가는데? 꼭 옳은지, 그른지로만 판단해야 해?”

“적어도 어떤 상황이나 때에 따라서는 숙이고 들어갈 줄도 알아야지. 우리 할마마마나 되시니까 너를 어여삐 여겨 주신 것이다! 아니었다면 재간택은커녕 초간택에서 똑 떨어졌을 거라고!”

“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 상황에선 내가 최선이었어. 그리고 나한테 공대 받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면서, 지금 나한테 큰소리치는 거야?”

“아니, 그걸 또 듣고…!”

청과 언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도겸은 어쩐지 한 발치 물러서서 바라보게 되었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앞으로 일이 지체되면 정말 세자빈이 될지도 모르지 않나. 그걸 따지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세자와 세자빈이라 칭송받을 만했다.

하지만 청이 왕대비 앞에서 굴하지 않고 저를 좋은 사람이라 칭했다는 말에 무방비하게 내려앉은 심장이 어쩐지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도겸은 이것이 질투심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둘이 나란히 서있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도겸이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였다.

“어찌 아직 밖에 계십니까? 안으로 드시지 않고요.”

남산댁이 다과상을 들고 나타났다. 뭔가를 쏟을까 걱정스러운지 순이가 조심조심 중간 문턱을 넘어 뒤를 따랐다. 돌진하던 도겸은 다급히 멈춰서다 고꾸라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텼다.

“그, 그래! 저하.”

순이가 엉거주춤하게 중심을 잡는 도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겸은 아닌 척 시선을 피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저하.”

“어? 그래. 나눌 이야기도 있으니.”

남산댁이 적당한 때에 나타나 주어 다행이었다. 도겸은 청과 함께 언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산댁과 순이는 조용히 손님을 대접한 뒤 금방 밖으로 나갔다.

“사실 어제 자네가 술 한잔 하러 오라고 해서 저녁에 올까 하다 마음이 급해 일찍 왔네만.”

언이 직접 간택 소식을 들고 온 데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제 도겸이 집에 들르라고 미리 언질을 준 일 때문이다.

그리고 언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도겸도 찻잎이 우러날 시간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요지부터 전달했다.

“어제 청이가 간택에 들어있던 때에, 조익환을 만났습니다.”

“조익환을 만났다고?”

“예. 제가 규장각에 들른 것을 알고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후안무치한 작자로군. 집에 의금부 군사들이 들이닥쳤던 게 어지간히 성이 났던 모양이지?”

도겸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래선지 본색을 드러내더군요.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도겸의 말에 언의 눈이 커지는 동시에 그의 상체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분명한 목적이 무엇인지 말한 것인가?”

“곧 뭔가 일을 치겠다는 식으로 윽박지른 게 전부이긴 합니다. 도통 상세한 것을 밝히지 않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어떤 내용이었는지까지 밝히고 싶지 않았다. 여럿이 피해를 볼 것이라는 말은 제 선에서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으니까. 다행히 세자도 더 캐묻지 않고 그럭저럭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제대로 자극이 되긴 했나 보군. 꿈틀하는 걸 보니.”

숙부와 같은 반응이었다. 도겸이 나직이 덧붙였다.

“조익환이 사병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언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예상은 했네만… 한 사람이 한 짓이라는 증거만 남기지 않았을 뿐 모으고 보면 확실히 반역의 정황이니까.”

원칙적으로 당연히 사병은 금지되어 있지만, 조익환은 나라에 귀속된 군사를 야금야금 사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막상 사병으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좌가 없지 않나.”

조익환은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물밑에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데 특출난 인물이었다. 사병을 키우는 일조차 절대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건드리는 순간 꼬리를 자르고 달아날 수 있게 모든 조치를 취해 놓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본색을 드러냈을 때 일망타진할 수 있게 우리도 더욱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겠지요.”

도겸은 차라리 조익환이 본색을 드러내어 반가웠다. 맞서 상대하고 싶어도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통에 늘 꼬리잡기만 해 대지 않았나. 가끔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 밤에 제가 본 것이 정말 맞는지 스스로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도겸을, 조익환이 속내를 보여 주며 일깨운 것이다. 이제는 마침내 그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일단은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그리고 할마마마와 누이들을 지키고… 궐 안에 수상쩍은 움직임이 있나 더 예의주시해야겠군.”

“예. 더 이상 다치거나 죽는 이가 없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점희라는 아이는 쉽사리 건드릴 수 없을 것이네. 아바마마께서 점희가 죽거나 다치면 좌상에게도 책임을 묻겠다 하셨으니 말이야.”

정말 억울하다면 점희가 해코지당하지 않도록 함께 지켜 내라는 어명이 있었다. 그리고 임금의 대책은 조익환을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묶어 놓는 아주 효과적인 묘수로 작용했다. 덕분에 점희는 아직까지 무탈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일단 이무기를 빼내는 게 좋을 것 같아.”

한 폭의 그림처럼 말없이 앉아 있던 청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