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통! 수준이 다른 신수님의 그림이라 한낱 인간 따위는 감히 이해를 하기 어렵다… 뭐, 이런 말이 아니겠느냐?”
이무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담 넘듯 무마하려 하는 세자였다. 청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는 혹 그 속에 구렁이의 혼이라도 담고 있는 거야?”
“어허, 청아. 세자 저하께 예를 갖추어야 하지 않느냐.”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도겸이 청의 행동을 지적했다. 근방에 엿듣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아는지라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청은 입술을 약간 내밀며 곧바로 언행을 다잡았다.
“어쩐지 담을 넘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으시더니 조금 더 가신다면 이무기가 둔갑한 줄 알겠습니다, 저하.”
그러자 이번엔 언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찜찜해 했다.
“지금 예를 차린 것이 맞느냐? 어째 더 불경한 것 같은데.”
청이 세자와 실랑이하는 중에도 도겸은 몸을 낮추지 않은 채로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이거 혹시.”
문득 그림을 이해한 도겸의 말에 옥신각신하던 청과 언이 가운데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물에 비친 네 모습을 그린 게 아니냐?”
도겸의 해석에 청의 눈이 커졌다.
“맞아.”
당연했다. 제 세계엔 경대 같은 게 없으니 청이 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맑은 물에 비춰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자 언이 도겸처럼 살짝 물러나 청이 그린 그림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허… 이리 보니 참으로 그렇구나. 외곽선이 구겨진 것처럼 그려져 도통 형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언이 도겸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어쩐지 청의 시선은 피한 채였다. 도겸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청의 어깨를 감쌌다.
“아무래도 초간택에 든 처녀와 너무 오래 사담을 나누시면 좋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 이만….”
“무어 어때서. 어차피 나는 네 사촌 누이를 세자빈으로 맞이하고 싶어 상사병이 걸린 세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
“예?”
“그러려면 아예 눈에 띄는 곳에 가서 손이라도 잡고 아바마마를 곤란케 해 드리면 어떨까….”
언이 싱긋 웃으며 청의 손을 잡을 즈음이었다. 전혀 악의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아는 청이 순순히 응하려던 차, 별안간 도겸이 청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청도, 언도 의아한 얼굴로 도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 그것이….”
청은 다시 도겸의 심장이 널뛰는 것을 느꼈다.
“자칫 소문이 추문이 되면 좋지 않을 듯하여.”
그의 말에 언이 눈을 끔벅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예. 그러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밖에 가마가 기다리고 있어서. 저하께서도 주강을 준비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 그렇지.”
청은 조금 의아했다. 도겸의 체온이 평소보다 높은 탓이었다.
“청아, 저하께 인사드리거라.”
뭔가 미묘하게 이상했지만, 청은 정확히 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저하, 그럼 소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래. 조심히 가거라.”
“가 보겠습니다, 저하.”
도겸이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청을 이끌어 궐 바깥쪽으로 나섰다.
그러다 문득 돌아본 그가 언에게 어조를 낮추어 말했다.
“저하, 시간 나실 때 잠시 서촌에 들러 주십시오. 술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단순한 술자리 초대 같았지만, 어쩐지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언이 표정을 굳혔다.
“알겠네.”
“그럼.”
도겸이 다시금 청을 이끌어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집에 가는 내내 그는 말이 없었다.
***
“할마마마, 소손 저녁 문안 여쭙고자 찾아뵈었습니다.”
“오, 마침 잘 왔어요. 내 밤낮으로 공부하기 바쁜 우리 세자를 위해 좋은 차를 준비해 두었지요.”
“어찌 이리 소손의 뜻을 잘 아십니까. 마침 소손도 요즘 궐 밖에 입소문이 자자한 떡과 다과를 구하여 할마마마께 드리고자 가져왔습니다.”
“그래요? 모처럼 세자와 이 할미의 뜻이 통하였나 보군요.”
왕대비가 언을 기쁘게 맞아들이며 노 상궁에게 차를 내어 오라 명했다. 언은 공손히 절을 올리고 맞은편에 앉았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왕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무얼 공부했는지는 늘 그랬듯 주상과 중전에게 문안 인사 가서 줄줄 읊었을 테니 이 할미는 묻지 않겠어요.”
학습 진도를 묻지 않는 왕대비에게 언이 삽시간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소손, 이 궐에서 할마마마를 가장 존경하는 것 아십니까?”
“늘 우리 세자는 잘 해내면서 입으로만 그러지요.”
“입으로만 그러다니요. 그럼 이 소손, 오랜만에 할마마마의 어깨를 주물러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어? 아니, 할미는 그런 뜻이 아닌데….”
왕대비가 말을 분명히 맺기도 전에 언은 벌써 몸을 일으킨 뒤였다. 그러곤 성큼성큼 왕대비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만, 공부하고 무예를 단련하느라 세자도 노곤할 터인데 어찌 이 할미까지 신경 쓰는 겁니까.”
“이리 어깨를 주물러 드리기 좋게 단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까지 살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할마마마.”
“흠….”
유난히 사근사근하게 구는 언을 바라보던 왕대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 오늘 있었던 초간택의 경과가 궁금하여 이리 공을 들여 할미의 비위를 맞추는 것입니까?”
“…예?”
뜨끔한 언은 왕대비가 보지 못하는 뒤에서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아닌 척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손은 매일 할마마마께 문안을 여쭙고 종종 궐 밖의 간식거리를 사다 드렸는데요. 그리 말씀하시면 이 소손 마음이 상합니다, 할마마마.”
그러자 왕대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이 할미가 또 세자를 장가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서운하여 그랬나 봅니다.”
“근데 마침 말씀이 나와서 말입니다, 할마마마.”
잠시 대비전의 문이 열리고 상궁들이 들어와 왕대비와 언의 앞에 다과상을 내려 주었다. 방 안에 향긋한 차향이 따뜻하게 풍겨 나갈 즈음, 언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대비에게 운을 띄웠다.
“오늘 초간택은 어떠셨습니까? 직접 처녀들을 보셨다 들었습니다.”
“맞아요. 이 할미를 궁금케 하는 처녀가 있어 직접 보러 갔었지요.”
“누가… 할마마마의 심중에 든 것입니까?”
“세자도 잘 아는 규수이지 않습니까. 해 주 목사 심오균의 여식 말입니다.”
“아….”
왕대비가 초간택의 심사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심청의 존재를 각인시키고자 단단히 작심하고 온 길이었다. 그런데 역시 그 아이는 언이 딱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왕대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저야 절친한 벗의 누이이다 보니 오며 가며 몇 번 마주친 정도이지요. 한데 할마마마께선 어찌 그 아이를 마음에 두신 것입니까?”
“맹랑하더군요.”
언은 알고 있었다. 눈앞의 왕대비가 생각보다 취향이 독특하여 마냥 고리타분한 노인이 아니라는 것을. 늘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마냥 위계에 눌려 윗사람이 맞다고만 하는 아첨꾼을 철저히 경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언은 왕대비가 청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맹랑하다니요. 그 아이가 감히 할마마마의 말씀을 듣지 않기라도 하였습니까?”
“예. 이 사람이 실망하였다 하는 말에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반박하는 것을, 세자도 보았어야 합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이 할미는 도무지 면이 서질 않았답니다.”
“허… 그런 아이였다니, 재간택엔 들지 못하겠군요.”
내일 중으로 집마다 간택 결과가 당도할 것이다. 언은 미리 알고자 했지만 일단 왕대비의 역성을 들었다.
“소손은 할마마마께서 아니라 하시면 무조건 따를 것입니다.”
“무어, 이미 안팎으로 세자빈은 내정이 되어 있어 간택이 무의미하다 하지만….”
어쩐지 언을 놀리려는 듯이 왕대비가 말을 느릿하게 늘이며 차를 따랐다.
“하나 세자가 이 할미를 우선으로 생각해 주니, 할미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하였어요.”
“예?”
언은 짐짓 놀란 척 차를 우리다 말고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왕대비가 이미 정해진 반응을 보이는 세자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간택은 내명부에서 주관하는 일이 아닙니까.”
다관을 든 채로 굳은 언과 달리, 왕대비는 제대로 우러나기 시작한 차향을 온전히 음미하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주상이라 하여도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 말씀은 곧….”
왕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상이 좌상과 국혼에 대해 미리 약속을 해 둔 일이라 하여도 내명부에서 정면으로 반박하면 얼마든 엎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
“그러니 이 할미는 최선을 다해 중전과 함께 우리 세자의 짝으로 어울리는 규수를 골라야겠지요.”
그즈음 언은 깨달았다.
이 궐 안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는 저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
“세자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언이 서촌을 찾았다.
“저하, 오셨습니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대문으로 나가 세자를 맞이했다. 대문을 들어선 언이 주변을 돌아보고는 도겸에게 물었다.
“청이는 어디에 있는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찌 찾으십니까?”
“그야 내가 초간택의 결과를 직접 가져왔지 않겠나.”
언은 어딘가 모르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묘하게 들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겸이 세자를 유심히 살피던 차, 평소엔 남산댁의 뒤에 숨어만 있던 순이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섰다.
“아씨께선 지금 한창 단장허구 계셔유. 지가 냉큼 가서 모셔 올게유!”
꾸벅 인사한 아이가 나비처럼 나풀나풀 가볍게 뛰어 중문 너머로 사라졌다.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날도 좋은데 우리가 안채 쪽으로 가면 어떻겠나?”
“아….”
도겸이 머뭇거리던 차, 언이 스스로 물러섰다.
“아니다. 전에 한 번 몰래 들어갔다가 규방에 함부로 출입한다며 혼쭐이 났었지. 되도록 그 아이의 심기는 거스르지 않는 게 좋겠네. 꽤… 뒤끝이 있는 편인 것 같으니까.”
도겸은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