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려운 걸 영감께서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앞으로도 후학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귀감은 무슨….”
도겸은 천천히 송 씨의 손을 내리게 했다.
“배웅 감사합니다, 영감. 그만 들어가 보십시오.”
“정말 괜찮겠나?”
못내 걱정하는 송 씨에게 도겸은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설마 규장각 앞에서 저를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그리곤 살짝 고개를 숙여 나직이 덧붙였다.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제가 훨씬 체격이 좋은데 어찌 걱정을 하십니까.”
“신소리 말게. 대사례처럼 그리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당했던 것을 벌써 잊은 겐가?”
“…아.”
기습적으로 허를 찌른 송 씨가 혀를 차며 돌아섰다.
“이런데 어찌 걱정을 안 해?”
“송구합니다.”
“조심히 가기나 하게!”
결국 잔소리로 끝났지만 어찌 송 씨의 기분은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도겸은 규장각을 뒤로하고 천천히 협문을 나섰다.
“오늘도 이곳으로 산책을 나오신 것입니까?”
도겸의 물음에 조익환이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섰다.
“자네가 아주 오랜만에 입궐을 하였다 하여 들렀네. 의정부를 대표하여 떠나는 관리를 배웅하기 위해 말이지.”
조익환의 다감한 말엔 참으로 많은 의미가 깔려 있었다.
“…겨우 자리 정리하러 온 제 입궐 소식이 어느새 의정부까지 날아간 모양입니다.”
도겸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는 건 당연했다.
“당연하지. 무릇 궐 안의 사정이라면 어느 궁에 장작 몇 개가 들어가서 탔는지도 의정부에서 훤히 알아야 하는 것 아니겠나?”
조익환은 여유가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도겸은 조익환이 그다지 여유가 많지 않음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이 저자에서 조설아의 위신을 꺾었을 때도 태평하게 기다렸던 양반이 이렇게 규장각 앞까지 쫓아왔겠는가.
“얼마나 다행인가. 자네의 시력이 회복되어 이리 다시 함께 부용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조익환은 도겸의 눈이 다시 보이는 것부터 들먹였다. 도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이곳에서 낚시는 할 수 없게 되었군요.”
“규장각을 나가게 되었다 하여도 무어 전하께서 허락하시면 얼마든 올 수 있지 않겠나? …아, 그게 아니라면 혹시 자네는 총 쏘는 것에 더 관심이 깊어서인가?”
뜻밖에 조익환이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당시엔 경황이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전력이 들통 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총이라니요.”
도겸은 조익환처럼 시치미를 뚝 떼며 가볍게 굴었다. 그의 반응에 조익환이 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평소 그답지 않게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래, 자네가 배움이 빠른 편인 것을 잊고 있었군.”
“언제까지 그리 얄팍하게 모면할 생각이십니까?”
“얄팍한 모면이라니, 말은 바로 해야지.”
조익환은 웬일로 피하지 않고 도겸에게 답했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나를 사로잡지 못하였는데, 어찌 그저 ‘얄팍하다’ 치부할 수 있겠는가?”
“그 말은…!”
곧, 흔적을 완전히 덮었으니 없는 일이 된 것이 아니냐는 논리였다. 도겸이 대번에 정색하며 언성을 높였다.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대거리했다.
“얄팍합니다. 더없이 얄팍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 아닙니까. 하늘이 대감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진정 모르는 것입니까?”
“정말 얄팍했다면.”
더는 부정하지 않은 조익환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약간 거리를 좁히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나?”
“…….”
“날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자만하지 말게. 심청? 용이라지만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질 않나? 그랬다면 날 진즉 사로잡았을 터인데.”
도겸은 뜨끔했지만 침착하게 대꾸했다.
“청이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제가 대감과 달리 정도를 아는 사람이기에 청이도 저를 보고 참는 것입니다.”
“인간적이라며 내 집을 부수고 내 딸을 죽이려들었나? 그것이 인간의 도리였단 말인가?”
“직전에 대감이 한 짓을 기억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사실을 호도하려 들지 마십시오. 교묘하게 전후 사정을 꾸민다고 하여 벌여 놓은 진실이 없는 일이 되겠느냔 말입니다!”
“증명할 수 없으면 없는 일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하게 만드는군.”
잘라 말한 조익환이 도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를 어여삐 여겼건만 이리 물어뜯는다면 나도 별수 없지.”
“…이번엔 정말 죽이기라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글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조익환이 양쪽 입꼬리를 바짝 끌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자넨 차라리 혼자 죽었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될 것이네.”
드러난 시커먼 입속에선 그동안 숨겨왔던 속내가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
“오늘 초간택의 절차는 모두 끝났습니다. 모두 일어나 저를 따라 주십시오.”
내명부의 여인들이 모두 전각을 나선 이후, 다시 돌아온 상궁이 처녀들을 인솔하여 궐의 입구로 향했다. 청은 다른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일어나 따랐다.
그러나 저만치서 익숙한 냄새가 나는지라 자꾸만 눈이 갔다. 전각 뒤쪽에 몰래 숨어 있긴 했지만 사람의 눈을 피하려는 것일 뿐, 청의 예민한 감각을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무시할까. 잠시 고민하던 청은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뒤를 따르던 처녀들이 의아해하며 멈췄지만 청은 잠시 꽃신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몸을 낮추어 살피며 말했다.
“먼저 가시오. 신발만 살피고 뒤를 따를 테니.”
그 소리를 들은 이무기가 맨 앞에 서 있다 홱 돌아보았다. 그러나 청과 눈이 마주치고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선두를 지키며 쌩하니 걸어갈 뿐이었다. 청은 그 동그란 뒤통수를 노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린 게 장유유서는 아직도 모르지.”
“무얼 그리 중얼거리느냐?”
청이 억지로 신발을 살피게 만든 이가 등 뒤에 나타났다.
“너 때문이잖아.”
벌떡 일어난 청이 돌아서 세자를 마주했다.
“여기 네가 사는 곳인 거 누가 모를까 봐 알려 주려고 여기까지….”
청의 시야에 언의 곤룡포가 그득하게 들어찼다. 정확히는 그의 옷에 새겨진 흉배였다. 청이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언이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돌아서도록 유도했다.
“혹시 몰라 나와 본 것인데 이리 알아보는구나.”
언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그를 올려다보는 청은 무뚝뚝하기만 했다.
“뒤따라가겠다고 했어. 가야 돼.”
“그래서 네가 멈춰 섰을 때 익위사를 보냈다. 상궁에게 전해 줄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
“뭐 할 말 있어서?”
“벗이 꼭 할 말이 있어야만 만나느냐? 이리 궐에 온 김에 얼굴이나 볼까 하여.”
다른 때 같았다면 얼굴 봤으니 그만이라며 돌아섰을 것이다.
“근데 이거.”
인적이 드문 곳에 가자마자 청이 대뜸 언의 몸통을 쿡 찔렀다. 흠칫 놀란 언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흉배 말이냐? 용이 새겨진 것인데 내 것은 발가락이 네 개….”
반사적으로 설명하려던 언이 멈칫했다. 그러곤 제 곤룡포를 당겨 거꾸로 보이는 사조룡과 청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이, 이 용과…!”
“아니거든? 그럼 인간들은 용의 성체를 이렇게 흉측한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순간 불쑥 치솟은 짜증에 얼음 창을 만들어 흉배를 벅벅 찢으려던 청이 손에서 힘을 뺐다. 신물 반쪽을 점희에게 준 상황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됐다.
대신 언이 들고 있는 접선을 빼앗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접선을 접어 끄트머리를 붓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잘 봐.”
“흠….”
접선을 빼앗긴 언은 별말 없이 청과 마주 앉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두 남녀는 한적한 궐의 담장 아래 앉아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이거 봐. 이렇게 다르다니까?”
언이 미간을 찌푸려 가며 청이 바닥에 휘갈긴 그림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한참 고민한 그가 마른 코를 훌쩍였다.
“내 흉배의 사조룡과 무엇이 그리 다른지 모르겠는데….”
“…뭐?”
“그, 그것이 말이다!”
청이 무심히 되묻자마자 흠칫 놀란 언이 황급히 자신의 감상을 수습했다.
“그, 뭐랄까…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말이다. 일단 몸이 길고… 이게 다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분명 제가 본대로 그렸건만, 이상하게도 언은 청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구조가 다른 것보다, 나는 네가 달고 있는 용보다 훨씬 웅장하고 위엄 있게 생겼단 말이다!”
답답한 청이 직접 언의 손가락을 잡아다 가리켰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덧그리듯 다시 보여 주었지만 언은 도대체가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모르겠어? 난 그렇게 이것저것 갖다 붙여 놓은 것처럼 아무렇게나 생기지 않았다고. 이 땅에도 용이 있었다며, 인간들은 제대로 본 게 맞아?”
“그, 그럼, 그럼! 당연히 내 흉배가 잘못된 것이 아니겠느냐?”
언은 무작정 맞장구를 치면서도 딱히 해갈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도통 이해력이 부족한 세자를 노려보던 청이 말했다.
“최도겸, 너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자 담벼락 뒤에서 헛기침을 하는 소리와 함께 도겸이 나타났다.
“뭐야. 어디서 나타난 것이냐?”
“저하를 뵙습니다.”
곤룡포를 입은 언은 절대적으로 세자로 대하여야 했다. 역시나 도겸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규장각에 두고 쓰던 개인적인 물건들을 찾으러 왔다가 마침 초간택이 끝났다 하지 않습니까. 함께 집으로 가면 될 듯하여 찾고 있었습니다.”
도겸은 언에게 먼저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곤 아직 쪼그리고 앉아 있는 청의 앞에 그려진 것을 내려다보았다.
“한데 청이 너는 무얼 그리고 있던 것이냐?”
그는 자연스레 청과 언의 가운데 서서 거리를 벌리게 했다.
“그래! 자네도 좀 보게. 청이가 내 흉배에 그려진 사조룡을 보고 성이 나서는 아까부터 이리 용의 모습을 그려 대는구나. 한데 도통….”
“도통, 뭐?”
홱 고개를 드는 청의 섬찟한 눈빛에 흠칫 놀란 언이 너스레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