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오라버니의 필체를 따라 한 것을 단박에 알아보시다니요. 역시 왕대비 마마의 눈썰미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조설아는 순간 휘둥그레진 눈으로 심청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용이라는 존재씩이나 되어서 뻔뻔하게 인간에게 아부를 한다고? 곱게 빗어 댕기를 내린 뒤통수를 노려보다 상궁과 눈이 마주쳐 어쩔 수 없이 도로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납득하긴 어려웠다.
“하오나 실망하셨다 하니 소녀는 도리어 조금 의아하였습니다. 보통 성현들의 말씀을 외우고 좋은 뜻을 많이 익힌 사람일수록 인과 예를 갖추어 참된 군자의 길을 가지 않습니까?”
“…그렇지.”
왕대비가 순순히 수긍했다. 시선을 내리고 있는 조설아가 눈을 부라렸다.
심청이 지나치게 시간을 오래 잡아먹고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소녀도 좋은 글씨를 따라 쓰면 저희 오라버니처럼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여 따라 쓴 것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좋은 말씀을 오라버니의 방식대로 연습하였지요. 한데… 이것이 감히 왕대비 마마를 실망케 하는 일이었다니, 소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
“옳은 사람을 따라 하면 옳은 길로 흘러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보다 개성이 더 중요한 것입니까?”
물은 앞서 흐르는 물을 무작정 따르지 않나. 오염되어있는 물에 섞인다면 함께 더러워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오염된 물이 조금이나마 희석된다는 의미도 된다.
“…라고, 미욱한 제가 감히 왕대비 마마께 여쭈어도 될지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심청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며 다시금 나무 냄새 그득한 공간엔 긴장한 숨소리만 여기저기 어지럽게 쏟아졌다. 평가방식을 부정당한 왕대비도 청을 가만 바라볼 뿐이었다.
“…하!”
그러던 순간 왕대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조설아의 예민한 감엔 마치 고요한 수면에 강력한 파문이 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청이 이 작은 전각을 통째로 흔들고 있는 셈이었다.
“내 평가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이리 알려 주는구나.”
“틀리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마마께오서 훌륭한 안목을 가진 분이라는 것임에 감탄하였을 뿐입니다. 작은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실 줄 아는 혜안을 지니신 분이 아니십니까?”
조설아는 심청이 진심임을 알았다. 인간은 동물보다 오감이 훨씬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청은 아직 인간과 용이 보는 시야가 전혀 다르다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네 개성일 수 있겠구나.”
그리고 인간은 그 얕은 오감으로 세상을 본다. 대신 좁은 시야를 머릿속에서 부지런히 해석하는 재주가 있다.
또한 조설아는 왕대비라는 인간이 심청을 아주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인간들은 아마 모르는 것 같지만 감정에 따라 그들이 풍기는 냄새가 달라진다. 이것은 조설아가 인간들 틈에 섞여 오래 지내며 알아낸 정보 중 하나였다.
기쁘거나 슬플 때, 화가 날 때도 인간이 내는 향은 달랐다. 사람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본질은 같았다.
그리고 지금 왕대비에게서는, 조설아를 처음 발견했을 때 조익환이 풍기던 냄새와 같은 향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차피 세자빈이 정해져 있는 간택이라 하였다. 불안할 것 하나 없다고도 했다.
예정과 달리 왕대비가 간택에 나선 것도, 처음과 달리 요즘 집안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도, 모두 걱정할 것 없으니 배운 대로만 하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고로 냄새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하등 신경 쓸 것 없다. 조설아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래. 최 상궁은 발을 내리고 다음 처녀가 인사를 올리도록 하게.”
“예, 마마.”
간택이 재개되었다. 오래 기다린 다음 처녀가 종이를 들고 일어났다. 심장 소리가 더 커진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조설아는 읽어 낼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한 가지 결과를 도출해 냈다.
아버지는 걱정할 것이 없다며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것은 인간의 감일 것이다.
하지만 조설아의 육감은 이 간택의 결과가 달라질 것 같다 말하고 있었다.
***
“자네가 규장각의 미래였거늘 어찌 이리 끝을 본단 말인가.”
“저 하나로 인해 규장각의 위신이 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이미 사직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도겸의 자리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무도 도겸이 규장각을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이었다. 당연히 서리들이 미리 짐을 정리해 빼 두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도겸은 조금 놀라기도,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그런 소리 말게. 바람에 날려 와 붙은 먼지가 어찌 자네의 것이라 하겠는가?”
누구보다 도겸의 사정을 잘 아는 직제학들이 가장 아쉬워했다. 각자 홍문관과 예문관으로 출근하는 날이었음에도 도겸이 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규장각까지 달려올 정도였다.
“미처 피하지 못했으니 죄라면 죄가 아니겠습니까.”
마침내 짐을 모두 싼 도겸이 제법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평소 도겸을 따르던 서리들이 집으로 가져다주겠다고 법석이었다. 덕분에 두 손이 가벼워졌다.
“당분간 한양에 있는 것인가?”
“예.”
직제학 임 씨가 도겸의 향방을 살폈다. 금족령이 풀린 터라 도겸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종종 찾아갈 테니 문전박대만 말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감께서 오신다고 하시면 대문을 그냥 열어 두겠습니다. 언제든 오십시오.”
임 씨와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송 씨는 조금 침울한 기색으로 물러나 있을 뿐이었다. 모두와 천천히 인사를 나눈 도겸이 송 씨를 찾았다.
“영감, 어찌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송 씨는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도겸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붙잡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송 낭자도 오늘 간택에 들지 않았습니까?”
“…그래. 유화도 지금 궐에 들어와 있네.”
단순히 아끼던 딸이 간택에 참여해 긴장했다고 보기엔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 걱정이 됐다.
“영감, 어딘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불편하긴. 아닐세.”
송 씨가 점잖게 답했다. 그러나 송 씨의 뒤에 선 임 씨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게 아니었다. 도겸은 주변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송 씨를 자연스레 규장각 바깥으로 이끌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곳의 경치를 다시 못 본다 생각하니 아쉽습니다.”
후원 일대는 어느새 완연한 봄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의 온도가 달랐다. 시린 뼈가 담긴 바람이 아니라 하늘하늘한 옷자락 같은 바람이 규장각 일대를 자유로이 날고 있었다.
“다시 못 보긴, 규장각 살림을 완벽하게 도맡아 하고 있지 않았나. 누가 후임으로 오든 자네의 난 자리가 분명할 것이네. 아마 누구든 반드시 자네를 찾을 테니 두고 보게.”
도겸은 그저 겸손하게 웃을 뿐이었다. 까마득한 선배에게 극찬과 신임을 한 몸에 받다니, 새삼 뿌듯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풍경을 차곡차곡 눈에 담던 도겸이 문득 송 씨에게 물었다.
“영감, 설마 이 일이 영감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송 씨가 도겸을 올려다보았다. 무언의 긍정을 이해한 도겸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간 늘 ‘아들 같다’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챙겨 주셔서 제가 얼마나 영감께 의지했는지 아십니까?”
“의지라니, 자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 같군.”
아닌 척하면서도 무안한지 송 씨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도겸은 송 씨에게서 책임감을 덜어 주고 싶었다.
“하나 진짜 아들은 아니지요.”
그래서 조금 매정하게 굴고 말았다. 역시나 송 씨의 눈에 서운함이 들어찼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유화 낭자가 훌륭한 규수로 자라 간택에 든 오늘 같은 날에 그리 상심해 계신 것은 저 때문이 아닙니까.”
자아가 지나쳐 오만하다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송 씨는 이미 도승지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한 뒤였다. 더는 부담을 지울 수 없었다. 진지한 위로보다 가벼운 농으로 송 씨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도겸이 금족령을 당해 두문불출하는 동안 규장각의 각신들이 모두 합심하여 도겸의 청렴함을 대변하는 상소를 줄기차게 올렸다는 것을. 바로 송 씨의 주도하에 말이다.
숙부가 탄원을 위해 모여든 백성들 덕분에 누명을 벗었듯, 도겸도 동료들 덕분에 스스로 옳은 길을 걸어왔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저를 위해 힘써 주셨던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리 얼굴이 상하신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이제는 제 시력도 돌아왔으니 마음 놓으시고….”
“아니.”
송 씨가 고개를 저었다. 파리한 얼굴이었으나 눈빛은 전과 달랐다.
“이미 알아 버렸지 않나. 이 조정의 이면을.”
“…….”
“나도 조정의 구성원일세. 그리고 앞으로 조정에 나아갈 이들을 가르치고, 전하를 보필하여 정책을 마련하지.”
송 씨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조정 어딘가가 오염되었다면 합심하여 걸러 내는 것 또한 우리가 할 일이 아니겠는가? 비단 사헌부의 일원이 아니라 하여도 말이지.”
무심히 송 씨의 시선을 따라 돌아본 도겸의 표정이 굳어졌다. 붉은 단령을 입고 뒷짐을 진 누군가 부용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조익환이었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확실히 알겠더군. 도승지가 누굴 그리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를.”
송 씨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한 걸음 나서려는 것을 도겸이 막아섰다.
“그럼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도 아시겠지요.”
“최 직각.”
송 씨가 도겸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도겸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영감들께서 자리를 보전해 주시는 것이 최선입니다.”
“…….”
“앞에 나서야만 싸우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늘 맑은 물로써 한 자리에 머무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요.”
송 씨의 손은 들끓는 분노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잡힌 팔로 전해지는 감정은 도겸의 속에 응어리진 것과 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