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손으로는 채신머리도 없이 쿵쿵 내달린 가슴팍을 두드렸다.
누이를 간택에 내보내며 가슴이 떨리는 오라버니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겸은 홀로 배덕감에 괴로워했다.
“…아니지.”
엄밀히 따지면 진짜 누이는 아니지 않나. 머리가 제멋대로 합리화를 하려 들었다.
여느 때와 같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려 했건만 오늘따라 쉽지 않았다.
“나리!”
어찌나 정신 사납게 굴었는지, 사랑의 바닥을 닦던 순이가 기어이 성을 낼 정도였다.
“그리 걱정하실 것 같으면은 아씨 따라가지 그러셨슈?”
“어? 어… 내가 걱정을 하였다고? 아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에, 아니시겄쥬.”
어찌나 정신이 나가 있었는지 순이가 들어와 있던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도겸은 콱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으로 표정 관리를 하며 서안 앞에 앉았다.
물론 억지로 든 책의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기어이 얼마 가지 않아 책을 내려 둔 도겸은 생각을 바꾸었다.
“그… 순이야.”
“예. 말씀허셔유.”
와중에 순이는 바닥에 광이 나는지까지 살피며 부지런히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도겸은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이가 저리 일을 하고 있는데 어른이 되어서 철없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말이다.
“혹, 같이 저자에 나가지 않겠느냐?”
“…예?”
“오랜만에 같이 구경이나 나가면 어떨까 하여서 말이다.”
“저자 구경이유?”
광이 나는지 보겠다며 바닥에 동그란 뺨을 붙이고 있다시피 하던 순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흘러내린 머리만 정리하고는 다시 상체를 낮추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저자라면 허구헌 날 장보러 나가는디 우째 또 구경을 가자고 허신데유? 뭐 필요헌 것 있으셔유? 가서 사 올까유?”
“아니, 그… 같이 나가서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싫으냐?”
“지 바뻐유. 남산 아주매가 아씨 따라가면서 지헌테 일을 을매나 시키고 갔는지 아셔유?”
이만하면 되었다며 순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어났다.
“하나하나 전부 잘해 놔야 돼유. 그래야 재간택 때 지두 따라간단 말여유.”
반드시 아씨를 모시고 싶다던 아이의 꿈이 아직 유효한 모양이었다. 대견하게 느낀 도겸은 이내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면 내가 무어 도울 것은 없느냐? 걸레질을 하려는 것이면 나도….”
“됐슈!”
그러나 순이는 물걸레와 대야를 들고 일어나며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나리는 모르시쥬? 남산 아주매 눈썰미가 을매나 무서운데유.”
“그래도 혼자 일을 다 하기엔 너무 많을 것 아니냐.”
도겸이 굴하지 않고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너무 많다고 포기하면 되겄슈? 하는 데까진 혀 봐야쥬.”
대견한 말이었지만 도겸은 탐탁지 않게 느꼈다.
“내가 너에게 그리 일을 시킬 생각이 없대도. 아니면, 함께 꽃놀이를 가는 것은 어떠냐? 천자문 공부도 거의 끝났으니 꽃이 떨어지기 전에 가는 것이 괜찮을 것 같은데.”
기어이 사술을 부리듯이 아이를 회유하고자 했다. 약간 구차한 기분이 들었지만 별수 없었다.
“꽃… 놀이유?”
그리고 드디어 시험에 든 아이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포동포동한 뺨에 힘을 잔뜩 준 채 콧구멍이 커졌다.
“…아녀유. 그것두 아씨 오시면은 같이 가유. 지는 그럼 나가유!”
기어이 순이는 도겸을 홀로 두고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
덩그러니 방에 남은 도겸은 허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심기일전하며 다시 책을 펼쳐 들었지만 한 번 눈에 들어오지 않은 글자들이 술술 들어올 리 없었다.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았다.
며칠 동안 바짝 집중해서 많은 일을 처리해 놓은 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할 게 없었다. 다른 책이라도 봐야겠다 싶어 문갑을 뒤지려던 그는 별안간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내가 서책 몇 권을 규장각에 가져다 두었더랬지.”
그러고 보니 사직을 청한 뒤로 근무지에 남겨 둔 개인 물품도 전혀 정리하지 못했다.
“윤 대교에게 빌려준 책도 있었고.”
궐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둘 더해지자 엉덩이에 좀이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벌떡 일어난 도겸은 냉큼 도포를 찾아 입으며 과장된 투로 나가야 하는 이유를 부풀렸다.
“어허, 이리 정신이 없을 수가! 귀한 서책을 함부로 두어선 아니 될 일인데.”
겸사겸사 제학을 비롯한 직제학 영감들에게도 인사를 드리는 게 좋겠다.
도겸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사랑을 나섰다.
***
초간택에 든 처녀들이 한곳에 모여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대뜸 정해진 자리에 앉아 먹을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직접 간 먹으로 부친의 이름을 적어 정성껏 말렸다. 몇몇 긴장한 규수들은 종이를 몇 장인가 망가트리기도 했지만 청을 포함한 대부분의 규수들은 어렵지 않게 써냈다.
“쓴 것을 가지고 이쪽으로 나오십시오.”
어느 정도 이름 쓰기를 마무리할 즈음, 간택을 진두지휘하는 상궁이 조설아부터 차례로 불러 나오게 했다. 조설아는 종이를 상궁에게 건네고 시키는 대로 발 뒤에 있을 왕실 어른들에게 절을 올렸다.
“흠, 필체가 아주 힘 있고 시원시원하구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발을 내려도 청은 누구의 목소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왕대비였다. 지난 두 번의 세자빈 간택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줄줄이 실패로 끝난 터라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이번 간택은 왕비가 주관한다고 했었다. 청은 약간 갸웃거리다 말았다.
어디에나 변수는 있는 법이었다.
“글자만 보아도 자신감이 넘쳐.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조설아도 약간 놀란 듯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소녀, 조가 설아라 하옵니다.”
“근래 몸이 좋지 않아 피접을 갔었다고 들었는데,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지?”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대비는 푹 찌르고 들었다. 조설아가 잠시 머뭇거렸다.
“…예. 하오나 소녀, 그저 환절기에 고뿔이 심히 든 것이었을 뿐 큰 병은 아니었습니다. 한데 자칫 나랏일로 바쁘신 아버지께 옮기라도 할까 싶어 걱정이 되어 어려서 머물렀던 곳으로 잠시 다녀온 것입니다.”
조설아는 아예 대비의 의혹을 모조리 불식시켰다.
“비록 어려서는 몸이 약해 고생을 조금 하였으나 소녀는 홍역도 너끈히 이겨 내었습니다. 두 번 걸릴 일은 없는 것이지요.”
당찬 대답에 대비가 흡족하게 웃었다.
“호오, 기특하구나. 넘어져도 굴하지 않고 일어날 줄 아는 아이로다. 그래, 앞으로도 그리 지내다오.”
이미 세자빈으로 내정되어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다음 분 나오십시오.”
이후로 세 명이 대비나 왕비와 인사를 나눈 이후, 드디어 청의 차례가 되었다. 부친의 이름이 쓰인 종이를 받아 든 대비가 한참이나 글자를 살폈다.
“…글자마다 기품이 넘치고 우아하구나. 과연 명필이야.”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획을 틀렸나 생각할 즈음, 대비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옆에 앉은 중전과 후궁들에게도 나누어 보여 주었다. 그사이 청은 상궁이 시키는 대로, 그리고 남산댁에게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점검 받은 대로 큰절을 올렸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소녀, 심가 청이라 하옵니다.”
“그래. 해 주 목사의 여식이자 최 직각의 사촌 누이이지?”
“예. 얼마 전에 스스로 사직하였지만 규장각 직각을 지낸 제 사촌 오라버니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맞습니다.”
콕 짚어 답하는 청의 당돌함을 읽어 낸 대비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내 최 직각에게 시를 한 수 적어 달라 부탁한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지. 너는 그네와 퍽 유사한 필체를 구사하는구나?”
“한양에 온 뒤로 오라버니께 글쓰기를 배웠나이다.”
“흠….”
왕대비가 뭔가 언짢은 듯 침음했다.
“내가 듣고 겪기로 너는 개성이 확실한 아이인데, 어찌 필체는 그저 오라비의 것을 옮겨 적은 것처럼 건조한 것이냐? 최 직각이 쓰는 특징을 빼면 아무것도 없겠어.”
청이 예상 밖의 부정적인 평을 듣던 순간, 뒤에서 누군가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가장 앞줄에 앉은 조설아가 청에게 들릴 정도로만 소리를 낸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세자를 보필하는 세자빈이라지만 장차 여기 있는 중전을 이어 내명부의 수장이 될 사람을 찾는 것인데 이리 특색이 없어서야… 실망스럽구나.”
그제야 글씨를 쓰게 한 목적이 드러났다. 필체로 하여금 개개의 특징을 살피려는 의도였다. 어차피 가문이며 출신은 사주단자를 낼 때부터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럼 다음….”
“외람되오나 소녀의 생각은 조금 다르옵니다.”
청의 인사가 끝났다고 생각한 상궁이 다음 처녀를 부를 즈음이었다. 상궁의 말을 자르고 든 청의 행동에 대비가 가볍게 손짓하며 상궁을 물렸다.
“지금 네 말은 곧, 이 몸의 평가 방식이 틀렸다는 것이냐?”
왕대비는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기세를 보였다. 그 이유까지는 알 길이 없는지라 청은 그저 평소와 같이 굴었다.
“세상에 ‘틀린 것’은 그다지 많지 않사옵니다. 왕대비 마마께서 말씀하시는 평가 방식이라는 것도 감히 소녀가 옳고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다른 생각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청의 답에 왕대비가 가만 청을 바라보다 별안간 상궁에게 발을 걷어 올리라 명령했다. 물 흐르듯 흘러가던 간택 심사장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가릴 것 없이 시선을 마주한 왕대비가 청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럼 어디 네 생각이라는 것을 말해 보아라.”
이윽고 왕대비의 허락이 떨어졌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던 때, 청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