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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50)화 (135/197)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순이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늘 입이 벌어지든 콧구멍이 커지든 둘 중 하나는 하는 아이인지라 청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잘 다녀오너라.”

청을 가마에 태운 도겸이 배웅했다. 청은 즉각 창문을 열었다.

“오라버니는 함께 가지 않으시고요?”

창밖의 도겸은 뒷짐을 진 채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러곤 언제 묘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어디든 가능한 한 함께 다니려던 이가 대범하게도 청을 혼자 보내려 했다.

다른 때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 땅에 청을 남겨 두게 된 바로 그 간택의 날이지 않나. 청은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요?”

“아무리 누명을 벗고 자유로워졌다 한들 보는 눈들이 많을 것이기도 하고….”

여전히 그의 심장 소리는 두방망이질 치듯 요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무어, 원래 그리 요란하게 식구들을 달고 가진 않느니라. 그러니 어서 가거라.”

말을 아낀 도겸이 서둘러 가마꾼들에게 눈짓했다. 즉각 가마가 가볍게 들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남산댁의 인사와 함께 가마가 천천히 집 앞을 떠났다.

“나리께서 더 긴장하신 모양입니다. 며칠 전부터 통 잠도 못 주무시는 것 같더니 기어이 눈 밑이 어두워지셨네요.”

청이 서운해 한다고 생각했는지 남산댁이 조용히 도겸의 편을 들었다. 청은 순순히 납득했다.

“…그래. 소원이 달린 문제니까.”

그리고 도겸의 심장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

“가마가 딱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것이 보통 집안은 아니겠구만!”

궐 앞으로 수십의 꽃가마가 줄지어 모여드는 장관을 이루었다. 자주 볼 수 있는 구경이 아닌지라 자연히 지나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삼회장을 단 노란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은 처녀들이 하나씩 내릴 때마다 먼발치서 외양을 품평하기도 했다.

“저, 저 제일 큰 가마는 어느 댁 가마인가?”

“말해 무엇 하나? 당연히 좌상 대감 댁 가마겠지.”

“주렁주렁 달고 온 사람 많은 것 좀 보라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덕분에 청은 가마가 멈출 즈음 조설아도 비슷하게 도착했음을 알았다.

“도착했습니다. 문 열겠습니다, 아씨.”

가마가 다시 지면에 닿자마자 남산댁이 문을 열어 주었다. 대궐 앞에 도착하면서부터 일찍이 평가가 시작된다 하였다. 청은 가볍게 몸을 일으켜 가마 밖으로 나섰다.

당연히 긴장 따윈 하지 않았다. 지붕 위를 뛰어왔다면 금방이었을 거리인지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뿐이었다.

“저, 저기 좀 보게!”

“응?”

“저 처녀가 그 유명한 서촌 각신 나리의 사촌 누이 아니야?”

청은 아직까지도 도성 안 유명 인사였다. 저자에서 표낭도를 잡고 감히 대감집의 딸과도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인 일이 꽤 큰 파란을 일으킨 탓이었다.

“이 사람, 태어나 저런 미인은 처음 본다네.”

“자네만 그렇겠나? 팔도 사방을 돌아다녀 본 나도 처음이라네.”

마치 귀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그러나 청은 못 들은 척 남산댁의 안내를 따랐다. 남산댁은 대궐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상궁들 쪽으로 청을 안내했다.

“아시겠지만 가문의 지위에 따라 입궐 순서를 정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 다섯 번째가 될 테지요.”

남산댁의 말을 들으며 청은 이무기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무기도 청을 의식하고 있었다. 병풍처럼 주변을 에워싼 사람이 거의 열에 가까웠다. 그 틈에 청을 노려보던 이무기가 고개를 홱 돌렸다.

청은 이무기가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버르장머리 없는 이무기만 들으라는 식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죽진 않았네. 산을 데굴데굴 굴러서 내려가더니.”

“죽긴 누가 죽어!”

역시 참지 못한 조설아가 빽 소리쳤다. 어차피 세자빈은 좌상 대감댁 여식이라며 눈치를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단박에 집중됐다. 조설아가 씩씩대는 사이 따르던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모르며 더 촘촘하게 주인을 감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봤을 땐 그래도 좀 사람처럼 굴었던 것 같은데….”

누굴 두고 하는 이야기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남산댁이 덧붙였다.

“저자에 나돌던 소문에 의하면 오래도록 병을 앓아 성격이 괴팍하고 예민하다 했습니다.”

남산댁은 미처 이무기의 감각이 인간과 비교해 비약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딱히 이무기를 비호할 생각은 없는지라, 청은 그 부분을 이야기하기보다 다른 쪽을 꼬집었다.

“인간들은 남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

별생각 없이 한 이야기에 남산댁이 뜨끔하며 즉각 사과했다.

“언짢으셨다면 송구합니다, 아씨.”

“나한테 죄송할 게 뭐가 있어. 그냥 신기할 뿐인데.”

“아닙니다. 제가 주의하겠습니다.”

대궐 문이 열리면 차례로 들어가야 하기에 상궁들이 일사불란하게 처녀들을 줄지어 세웠다. 청은 남산댁이 예상한 대로 다섯 번째에 섰다. 노란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갖춰 입었으나 제각각 다른 침모에게서 맞춰 다른 옷감이 사용되었는지 모양새는 조금씩 달랐다.

모두가 어여쁘다 했지만 청은 사실 이런 규칙이 불만이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색감의 옷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

“곧 문이 열릴 것입니다. 대궐의 턱을 지나신 뒤엔 꼭 솥뚜껑의 손잡이를 밟고 넘어서셔야 합니다.”

청이 보기에도 가장 연륜이 있어 보이는 상궁이 앞으로 나서서 알렸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두루 둘러보던 상궁의 눈이 청의 근처에 머물렀다. 차분하기 그지없던 상궁의 시선이 청의 곁에 선 남산댁에 닿자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지며 하던 말까지 멈추었다.

“모두 차례를 지켜 천천히….”

그러자 남산댁이 곤란한 듯 웃으며 의아해하는 청에게 설명했다.

“저와 함께 방을 쓰며 어울리던 동무입니다.”

“매일 집에만 있기에 벗이 없는 줄 알았는데.”

“오래도록 연을 끊고 지낸지라 알아보았다고 한들 아직도 벗으로 여겨 줄지는 모르겠군요.”

남산댁은 그 말을 끝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궐의 육중한 문이 열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간택에 참여한 처녀들의 심장 소리가 커지는 것이 들렸다.

“…있잖아.”

선두에 선 이무기가 오만하고도 다소곳한 걸음으로 천천히 궐문을 넘어가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이 대뜸 남산댁에게 물었다.

“말씀하십시오, 아씨.”

“인간들의 심장이 갑자기 날뛰는 건 병이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아… 소인이 알기로 몇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만, 지금 설명 드리긴 촉박할 듯싶습니다.”

처녀들이 상궁들의 안내를 따라 차례차례 궐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청의 일행도 앞 사람들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 걸었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실 때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래. 급한 건 아니니까.”

사적인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드디어 청도 웅장한 궐문을 넘어섰다. 궐에 몇 번 들어가 본 적 있지만 이렇게 정상적인 입구를 통해 들어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솥뚜껑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안쪽으로 들어서자 다른 궁녀가 정적이고도 친절하게 안내했다. 남산댁이 내미는 손을 잡은 청이 무명천을 둘러 놓은 솥뚜껑의 손잡이를 밟고 가볍게 건넜다. 장차 나라의 안주인이 될 사람을 뽑는 자리인지라 한 사람씩 부엌신인 조왕신에게 인사를 드리는 의례라고 했다. 이미 남산댁에게 들어 알고 있는 절차였으나 그럼에도 이렇게 직접 해보니 청은 제법 흥미롭다고 느꼈다.

“이제부터는 따르는 이들을 모두 물리십시오. 아씨들만 따로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 이야기에 거의 모든 규수들이 데리고 온 유모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장 소리가 더 커지기도 했다.

겁을 먹은 걸까. 청은 홀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남산댁과 눈이 마주쳤다.

“다녀오십시오, 아씨.”

남산댁이 미소 지으며 손을 잡아 주었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산댁은 주변의 다른 유모들처럼 굴었다.

그래서일까. 순간 어머니가 떠오르며 속이 울렁거렸다. 장기가 뒤틀리는 것 같기도, 정확히 어딘지 모르는 곳이 기분이 이상했다.

사실 이곳에 와서 이런 기분을 느껴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저기….”

청이 뭔가 더 말하려던 차, 노상궁이 규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이곳으로 나오게 되실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산댁이 청의 손을 놓으며 슬쩍 밀었다.

“다녀오십시오, 아씨.”

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규수들과 같이 상궁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산댁이 청을 보낸 그 자리에 붙박이라도 된 것처럼 서 있다는 것을. 벗도 멀리하며 궐에서 떠난 이가 유모를 자처하며 청을 위해 따라나선 사람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다시금 기분이 묘해졌다. 청은 조용히 저를 힐끔대는 처녀들과 걸음을 옮기며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 또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모든 것을 꼼꼼하게 저장하는 머리는 금세 원하는 기억을 꺼내 주었다.

…그래. 어느 순간부터 도겸이 저를 구하겠다며 자신의 등 뒤로 세우던 때였다.

무엇보다 차분한 인간이 대뜸 이무기를 죽이려 들었을 때 청은 내심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쪽으로 천천히 올라가십시오.”

생각에 잠긴 채로 상궁들을 따라가던 차, 한 전각에 다다랐다.

“들어가자마자 왕실 어른들을 뵙게 되실 것입니다. 행동거지에 각별히 주의하여 주십시오.”

드디어 본격적인 간택 심사의 시작이었다.

***

여유 있고 자신감 넘치게 청을 간택 심사에 들여보냈다. 집 앞을 떠나는 가마를 볼 때만 해도 도겸은 차분했다. 온화하게 웃으며 누이를 보냈다.

“…아.”

그러나 도겸은 기어이 망건을 쓴 이마를 쿡쿡 쥐어박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라면 틀림없이 들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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