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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49)화 (134/197)

청은 물을 가져다 자물쇠에 흘려 넣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물로 자물쇠를 푼 것인가 생각할 즈음 청이 옥사 안으로 들어왔다. 점희는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 아씨, 지금 무얼 하신….”

“열쇠가 없잖아. 부수면 안 되니까 물을 얼려서 잠깐 열쇠를 만든 거야.”

청은 쓴 물을 얌전히 다시 물그릇에 담아 놓기까지 했다. 보통 사람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어여쁜 여인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병사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들어온 게 이상했다. 이전에 목사 어른의 옥사에 누군가 침입했던 사건 때문에 경계가 이중, 삼중으로 훨씬 삼엄해졌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이거.”

점희가 얼떨떨해하는 동안 점희의 앞에 몸을 낮춘 청이 웬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작은 손이 가볍게 내려둔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너한테 가 본다니까 순이가 싸 준 거야.”

“순이가요? 대체 뭘 싸 주었기에… 아뜨뜨!”

급하게 보따리를 풀던 점희는 문득 뭔가 뜨거운 것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손을 뗐다.

“그거 때문에 버리고 올까 싶었는데 애가 하도 꼭 가져다 주라고 해서.”

청이 무뚝뚝하게 설명했다. 다행히 덴 것은 아닌지라 옷자락에 손을 문지른 점희가 전보다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었다.

커다란 바구니 안엔 옹기들이 들어 있었다. 청이 가운데에 놓인 것을 가리켰다.

“숯이 들어 있어. 너 추위 탄다고 넣었대. 화로 대용으로 쓰라던데.”

“…….”

내친김에 다른 것들도 하나씩 알려 주었다. 하얀 손가락이 거침없이 옹기를 짚어 나갔다.

“이건 전 몇 가지, 이건 약밥, 이건 떡, 그리고 이건 종이랑 붓, 그리고 초도 들어 있어.”

“초요?”

점희는 청이 마지막으로 가리킨 옹기의 뚜껑을 열었다. 어두운 와중에 초라니, 불씨가 있을 때 얼른 켜 보고 싶었다. 손이 데이지 않게 화로를 열고자 주섬주섬 치맛자락을 모으는데 청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 켜지 마. 뜨거운 거 질색이니까.”

“예? 아… 네.”

티격태격하던 순이와는 정이 쌓였지만 어쩐지 아씨와는 아직도 데면데면했다. 그래서 점희는 아는 사람이 와 주어 큰 안도감이 들면서도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들키면 어쩌려고 순이는 이런 걸 다 챙겨 주었답니까.”

괜히 순이 이야기나 할 뿐이었다. 화로 주변에 놓인 옹기의 뚜껑을 하나씩 열어 전을 하나 꺼내 씹었다. 육전이었다.

“너랑 헤어졌다고 종일 울어대서 지금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해.”

전을 입에 물고 이번엔 떡을 하나 꺼내던 점희가 멈칫했다. 갑자기 입 안의 음식 맛이 완전히 가셨다. 대신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러나 점희는 묵묵히 음식을 씹었다. 다른 그릇에 들어 있는 약밥을 꺼내 입에 욱여넣기도 했다.

“음식은 남산댁이 넣어 줬어. 국물은 못 챙겨 줬으니까 천천히 먹고 체하지 말래.”

“…….”

“붓이랑 종이가 든 항아리는 최도겸… 아니, 오라버니가. 옥중일기라도 쓰래.”

결국 다시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어찌.”

남산댁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점희가 입 안에 든 것을 간신히 씹어 삼켰다.

“저 같은 죄인을, 이리 챙겨 주신답니까.”

“넌 깨끗해.”

아까워서 양껏 먹을 수나 있을까. 쓸 수나 있을까. 모인 마음들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는데 청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진 않아.”

“…….”

“오라버니가 아이들은 지켜봐야 한다고, 시간이 형벌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지금처럼 괴로워하며 반성해.”

점희는 땅만 내려다보며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벌이 끝날 때까진 아무도 너 못 건드리게 지켜 줄 테니까.”

청이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마구 끄덕일 것 같던 점희가 퍼뜩 눈을 들었다. 청의 하얀 손이 눈앞에 와 있었다.

그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반쪽짜리 돌멩이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벌벌 떨면서 울 필요 없어.”

점희가 눈만 굴리자 청이 받으라는 듯이 손을 까딱였다.

“내가 너 지켜 준다고 했잖아. 이거 갖고 있어.”

“…이게, 무엇입니까?”

“뭔지는 알 것 없고, 네가 위험할 것 같으면 이걸 손에 꽉 쥐기만 하면 돼. 깨트리진 말고.”

“예?”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어 점희는 울던 것도 잊고 젖은 눈을 끔벅였다. 그사이에 청은 차가운 돌멩이를 점희의 손에 들려준 뒤 미련 없이 일어났다.

“네가 죽을 일은 없어.”

옥사의 문을 닫고 나간 청은 친절하게 자물쇠까지 다시 꼼꼼하게 잠갔다.

“그러니까 그런 잡생각 할 시간에 떳떳해진 뒤에 어떻게 살아갈지나 생각하고 있어.”

“저!”

왠지 청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점희가 다급히 몸을 반쯤 일으키며 돌아서려는 청을 불러 세웠다. 청은 고개만 돌려 점희가 말을 잇기를 기다려 주었다.

“…나리와 아주머니, 그리고 순이한테도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좀 전해 주실 수 있나요?”

이윽고 점희가 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조심스레 부탁했다.

“뭐, 어려운 건 아니니까.”

끝까지 아씨는 냉수처럼 차갑기만 했다. 따로 인사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걸 보면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점희는 두 손으로 돌멩이를 소중히 감싼 채 멍하니 청이 사라진 자리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던 건 한참을 우느라 콧물까지 흐른 탓이었다. 옷소매로 얼굴을 닦아 낸 점희는 이번에야말로 가운데 화로를 열었다. 다행히 아직 숯은 꺼지지 않고 잘 타고 있었다.

“귀한 것을….”

귀한 초를 아낌없이 내어 준 나리께 더없이 고마웠다. 점희는 초에 불을 붙였다. 금세 환해지는 사위에 울적한 마음이 싹 달아났다. 점희의 까만 눈이 노란 불빛에 별처럼 반짝였다.

더 이상 춥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점희의 삶을 통틀어 가장 따뜻하고 환한 밤이었다.

***

“아씨!”

단장을 마치고 안채를 나서자마자 순이가 빽 소리쳤다.

“참말로 어여쁘셔유! 초간택에서는 일부러 노란 저고리에다가 홍색 치마로 통일한다던데, 분칠도 제대로 안 한 아씨께서 이리 빼어나시믄 초간택이 무슨 의미가 있데유?”

무슨 소린가 했더니 매일 하는 말을 조금 더 크게 하는 것이었다. 청은 평소처럼 우아한 걸음으로 디딤돌을 밟고 내려갔다.

“너 내가 언성 낮추라고 몇 번을 말해?”

“하지만 아씨가 지나치게 어여쁘신 걸 우째유? 지가 왕실 웃전 어른들이었다믄 초간택에서 딱 끝났슈. 아씨가 아니믄 누가 세자빈 마마가 돼유?”

순이가 콧구멍까지 키우며 방방 뛰었다. 청의 단장을 돕고 따라 나온 남산댁이 주의를 주었다.

“정신 사납게 무엇 하는 것이냐? 그리 뛰다 아씨께 흙이라도 튀면 경을 칠 줄 알아라.”

남산댁 또한 평소와 달리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도겸이 간택에 따라갈 유모나 몸종, 수모를 따로 구하려 했지만 웬일로 직접 나섰다.

“아휴, 지가 이리 뛰어두 흙 튈 자리를 보구 뛴다니께유?”

천연덕스럽게 굴면서도 순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괜히 청의 다홍치마를 털어 주었다. 청은 천천히 밖으로 걸었다.

“날씨부터 아주 기똥찬 것이, 아주 우리 아씨를 위한 것 같지 않어유?”

졸졸 따르는 순이의 밑도 끝도 없는 주책에 청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내 땅의 하늘은 늘 나를 향하고 있었어.”

“예?”

“여기서 이리 하루쯤 파랗게 빛난다고 뭐….”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청은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이 땅에 온 이래로 봤던 모든 하늘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모든 하늘과 다르다는 게 신기했다.

다만 제가 다스리던 하늘과 굉장히 비슷했다. 아니, 원래 살던 곳의 하늘과 같았다.

“뭐… 마음에 들긴 하네.”

아끼던 바다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심장이 허한 지금은 특히나 더 그랬다.

“다 되었느냐?”

청이 아직 하늘에 둔 시선을 내리기 전, 도겸이 나타났다. 내내 행랑 마당을 서성이더니 기어이 단속하러 와 본 듯했다.

“예. 이제 막 나가시던 참이었습니다.”

남산댁이 대신 답했다. 그러나 도겸은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어서 나가라며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 멍한 얼굴로 청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만 그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소란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나리, 나리께서 보시기에두 아씨가 지나치게 어여쁘시쥬?”

청이 충분히 하늘을 담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말이 없던 도겸이 뒤늦게 순이의 말에 대꾸했다.

“…그래, 어여쁘구나.”

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가 모르게 도겸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탓이었다.

사람이 우는 이유는 비단 슬퍼서만은 아니라고 배웠다. 고로 청의 입장에서는 도겸이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전혀 없었다.

“가자.”

도겸이 대문 밖까지 앞장섰다. 하늘에 푹 담가 물들인 듯한 그의 도포 자락이 걸음에 따라 나풀거렸다. 그의 뒤를 따르던 청은 그의 옷자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마는 다시 고쳐 두었다. 그러니 오늘은 화나는 일 있다고 가마 부수지 말고.”

대문 밖을 나선 도겸이 가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궐까지 따라가기로 한 남산댁이 먼저 나가 가마의 문을 열었다.

“저것만 안 부수면 되는 거예요?”

“음?”

어제까지만 해도 도겸은 왕실 웃전들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줄줄이 읊기 바빴다. 그런데 궐로 보내기 직전엔 정작 가마를 부수지 말라는 말뿐이라니.

“더할 당부는 없으신지요, 오라버니?”

왠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것만 같아 청이 먼저 물었다. 그러자 도겸이 약간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 번 일러 주기만 해도 완벽하게 기억하는데 두 번 말할 필요가 무어 있겠느냐.”

“…그래요?”

“늦겠구나. 그만 가마에 오르거라.”

도겸이 가볍게 청의 손을 잡아끌었다. 청은 그에게 이끌려 대문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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