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오균을 위해 모인 사람들을 전부 도겸의 집에서 재우기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도겸은 전혀 무리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묵을 곳을 제공했다. 알게 모르게 은밀히 알고 지내는 수많은 인맥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그렇게 저녁 무렵,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모두가 떠난 뒤 드디어 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아버지, 어머니. 소녀 인사 올립니다.”
청이 천천히 몸을 낮추어 큰절을 올렸다. 앞에 앉은 심오균과 그의 부인 신 씨는 둘 다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누가 해로한 부부 아니랄까 봐 표정조차 짓는 결이 비슷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반면 청은 마치 처음 제대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임에도 뻔뻔한 얼굴로 재회한 양 굴었다.
“…그래. 덕분에 강녕할 수 있게 되었지.”
심오균이 먼저 헛기침을 하며 조신하게 앉는 청을 칭찬했다.
“옥사에서도 느꼈다만 처음 보던 때와는 확연히 다르구나. 도겸이 저 녀석이 자신한 이유를 알겠군.”
“감사합니다, 아버지.”
도겸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청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심오균은 잊지 않고 도겸도 격찬했다.
“내 체면을 지켜 주려 네가 더 신경 썼겠구나.”
“말씀드렸다시피 이 아이라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청은 직접 차를 준비해 잔에 따랐다. 신 씨는 말없이 청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뜸 밝혔다더니, 아직 믿기 어려워 보이기도 했다. 몸을 살짝 숙부 쪽으로 기울인 걸 보면 겁을 먹은 것도 같았다.
“저리 준비하였는데 간택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큰일이었겠어.”
도겸이 하고 싶은 말을 숙부가 대신했다. 도겸은 진심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것을 포기해 준 덕분입니다.”
청이 찻잔을 숙부와 숙모, 그리고 도겸에게 하나씩 내어 주었다.
“드시지요.”
“그래. 고맙구나.”
잠시 다기를 들어 마시는 인기척만 났다. 가족이 되어 처음 마주 앉은 세 사람은 격식만 차릴 뿐이었다.
“청아.”
찻잔을 내려놓은 심오균이 먼저 정적을 깼다.
“너는 시를 배웠느냐?”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도겸은 심오균이 청을 시험하려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본 시를 외우고는 있습니다.”
“공자께선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 하셨지.”
<논어>의 계씨 편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소학을 배운 청이 모를 리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예. 그리하여 군자의 아들은 시를 배웠습니다. 예를 배우지 않으면 몸을 바로 세울 수 없다 하여 예를 배우기도 하였지요.”
“그럼 시를 배우는 이유는 무엇이라 하셨느냐?”
“시경의 이남을 익히지 않으면 마치 담을 앞에 두고 서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숙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살짝 굴리는 것은 아마 다음 질문을 하려는 것이리라.
“도겸이 녀석 성격에 시경도 얼렁뚱땅 가르쳤을 터인데 혹, 거기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다면….”
예상한 대로 자연스레 시경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숙부는 말끝을 흐리며 청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서야 도겸은 청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 청은 평소와 같이 무심했다. 그러나 숙부가 읽어 낸 것처럼 뭔가 투명하고 잔잔한 물 위에 작은 파문이 인 것처럼 조금 불편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보아라. 뭐든.”
심오균은 퍽 기분이 좋아 보였다. 처음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탐탁지 않아 하지 않았나. 지금은 청을 보는 눈에 너그러움이 가득했다. 부리부리한 인상에 웃음기 없이 냉혹한 표정이었지만 오래 봐온 도겸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걸리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여라. 우린 이제 한배를 탄 식구가 아니냐?”
지금 심오균은 굉장히 기분이 좋다는 것을.
그 말을 들은 청이 고개를 들었다. 식구라 말한 숙부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시를 배우지 않았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음?”
의아해하는 숙부의 반응은 처음 도겸이 그랬던 것과 비슷했다. 보통 사대부들은 성현들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나. 정면으로 반박하거나 반대의 상황을 가정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면박을 주거나 학습이 부족하다며 상대조차 해 주지 않기도 했다.
“저와 마주 보는 이가 예를 배우지 않았다면요.”
심오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 해 보라는 듯이 여지를 주자 청은 처음 외울 때 들었던 의문을 가감 없이 쏟아 냈다.
“지금껏 마주친 이들 중엔 시와 예를 배운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도 담을 두고 서 있는 기분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요.”
“그래서 배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냐?”
“아니요, 마중지봉(麻中之蓬, 삼밭에 나는 쑥이라는 뜻으로, 구부러진 쑥도 삼밭에 나면 저절로 꼿꼿하게 자라듯이 좋은 환경에 있거나 좋은 벗과 사귀면 자연히 주위의 감화를 받아서 선인이 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이라 하였으니 소녀가 배워 두면 그렇지 못한 상대에게도 이로울 것임은 알고 있습니다. 아마 영향을 끼치겠지요.”
“하면?”
“식구라 하시니 말씀드리건대, 저는 아직도 왜 이미 죽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인간의 말을 눈앞의 아끼는 사람에게 옮겨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죽은 사람의 말이라니, 오히려 부정 탈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
“군자의 말이 틀릴 경우엔 제가 남에게 근묵자흑과 근주자적의 원흉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미 비슷한 질문을 들은 적 있는 도겸은 숙부의 답이 궁금해졌다.
과연 숙부는 여느 사대부들과 같을 것인가.
“그래. 네 말도 일리는 있구나.”
가만 청을 노려보던 심오균이 얼마 가지 않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틀린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군자의 가르침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배우지 못해 어리석은 이들을 바른길로 이끌 수 있지 않겠느냐?”
“아… 사람은 모여 살아야 하니까.”
청이 나름의 근거를 더하며 납득했다. 도겸은 저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생각의 흐름을 가늠하다 혼자 바보같이 웃고 말았다. 그런 조카를 의아하게 바라보면서도 숙부는 진지한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또 사람에겐 융통성이란 게 있다. 때에 따라 스스로 맞는 길을 선택할 의지, 또 가끔은 성현의 말씀을 거스를 수 있는 의지라고도 할 수 있지.”
심오균은 청을 바라보며 남은 차를 몽땅 마시곤 덧붙였다.
“역시 너는 아직 완전히 사람이 되진 못한 게로구나.”
도겸이 한참 시간을 들인 것에 비해 숙부는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청의 맹점을 찾아내었다. 청이 불퉁하게 입술을 조금 비죽일 무렵, 심청의 아버지는 또 다른 가르침을 주었다.
“하나 융통성이 있다는 것은 변덕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고 언제든 완전히 변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사람은 검은 생각을 많이 할수록 마음이 검어지고, 행동이 어두워지는 족속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인정하는 주옥같은 말씀들을 깊이 새겨 자칫 흔들릴 수 있는 순간의 지표로 삼는 것이다.”
“…….”
“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검어질 염려도 없으니 성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필요는 없겠구나. 그저 알아만 두는 것이 좋겠다.”
“예, 아버지.”
그 모습을 보며 도겸은 새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껏 억지로 성현의 말씀들을 칭송하며 청에게 억지로 익히게 하려던 자신이 근묵자흑의 묵이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굳게 믿어 오던 것에서 오류를 발견하면 잠깐은 제 세상이 통째로 무너지는 충격에 휩싸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세상이 단순히 약하디약한 알껍질이었다고 생각하면 더 큰 세상을 마주하는 경이로운 순간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자연스레 그런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자신의 알을 깨 주는 이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도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주 소중한 광경이었다.
***
낮엔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사람들의 소리도 간간이 들리며 마냥 심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세상 모든 것이 너무 고요해졌다.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옥사에서의 첫날 밤, 점희는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만 있었다. 아무리 꽃이 피는 계절이 왔어도 밤의 공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겨우 지푸라기로 덮은 땅에선 한기가 올라왔다.
직각 나리 앞에서는 어른스러운 척, 의연한 척, 괜찮은 척했다. 하지만 사실 점희는 옥에 갇힐 때부터 숨 한 번 편히 쉬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할까. 나갈 수는 있을까. 애써 괜찮은 척 가둬 두었던 불안함들이 모두 쏟아져 나왔다. 저를 노려보던 조익환의 눈빛이 쉽사리 잊히지도 않았다.
“금방 끝날 거라고 하셨으니까. 금방… 정리될 거라고 하셨잖아. 괜찮을 거야.”
스스로 마음을 다독여도 쉽지 않았다. 점희는 가능한 한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울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견뎌야 할 날들이 많을 텐데 벌써 울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벌벌 떨 거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자백한 거야?”
“그야 평생 죄책감 느낄 것 같아서…!”
무심코 답하던 점희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들창으로 스며들어 오는 푸른 밤빛이 비춘 어슴푸레한 인영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누, 누구십니까?”
“내가 누군지 벌써 잊었어?”
시큰둥하게 묻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혼란한 와중에 사고의 흐름이 느려 목소리의 주인이 다름 아닌 청이 아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점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륵 흘리고 말았다.
“아씨, 어찌 오셨습니까?”
자물쇠를 한번 툭 건드린 청이 혀를 찼다.
“…이번엔 부수면 안 될 것 같은데.”
“예?”
점희가 의아해할 즈음 가만 생각하던 청이 옥사 안에 놓여 있던 점희의 물그릇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혹시 목이 마르신 것이라면…!”
냉큼 일어나 물그릇을 전해 주려던 점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물그릇 안에 들어 있던 물이 허공으로 떠올라 청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간 탓이었다.
제가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점희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청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