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워.”
집에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고요하던 집 안이 운종가나 다름없어졌다. 왠지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아 손으로 닦아보기까지 할 정도였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볼까 하던 청은 돌연 생각을 바꾸고 집 안 가장 안쪽, 사당 근처로 향했다.
그리고 쓰지 않는 광 안쪽에서 몰래 숨죽여 우는 아이의 작은 어깨를 콕 찔렀다.
“너 여기서 뭐 해?”
“어매야,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벌러덩 넘어진 순이가 청을 보고는 황급히 옷소매로 두 뺨을 벅벅 닦아 냈다.
“지, 지 암것두 안 혔어유!”
아이는 아직 청이 어디까지 듣고 느낄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청은 위계로 아이를 겁주기보다 도겸의 눈물을 눈감아 주었던 것처럼 순이도 한 번쯤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부엌에서 너 좋아하는 육전 냄새 나던데, 안 먹어?”
“지는 괜찮구먼유. 배 하나도 안 고파유.”
그 좋아하는 고기도 마다할 정도였다. 청은 부쩍 우울해하는 아이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 아씨. 여기 앉으시면은 치마 다 버려유!”
순이가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청의 치맛단을 들었다. 청은 반대로 순이의 치맛단을 들어 주었다.
“네 치마도 버리는데 여기 있었잖아.”
“그야…!”
간신히 잊고 있던 것이 도로 생각났는지 순이가 금세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점희 언니가 옥에 갇혀서, 그려서 나리 말구 글공부를 봐줄 사람이 없구먼유….”
“언제부터 그렇게 글공부에 열심이었다고. 남산댁도 있고, 나도 있잖아?”
청의 퉁명스러운 반응 때문일까. 기어이 순이가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여기는 잔치가 한창인디 언니는 혼자 그 찬바닥서 우째 있는데유. 그거 생각하니께 입맛이 하나두 안 살어유.”
그렇게 티격태격하더니 언제 친해진 건지 모르겠다. 청은 미묘하게 언짢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자씨두, 언니두… 이제 못 보는 건 아니겠쥬.”
청의 생각을 전혀 모를 순이는 홀로 우울해하기 바빴다. 청에게 혼나지 않으려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불안정한 호흡과 눈물 냄새가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아이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청은 아이를 다그치지 않았다. 최도겸도, 세자도, 하다못해 남산댁도 모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 길을 잃고 그 자리에 고여 멈춰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인간들 중에서 어른이라는 자들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데 작디작은 아이가 뭘 얼마나 의젓하게 이겨 내겠는가. 청은 그제야 인간의 감정 표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배우게 되었다.
감정을 통제하는 법에 미숙한 아이는 울음으로 슬픔을 쏟아 낸다. 그리고 익숙한 어른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꾸역꾸역 참아 낸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한 가지가 또 의아해졌다.
어른인 최도겸은 대체 얼마나 오래 참았기에 그렇게 터트리고 만 걸까.
“…보고 싶어? 그 인간들.”
청의 물음에 순이가 벌겋게 부은 눈을 들었다. 청은 차가운 손으로 아이의 눈두덩을 감쌌다.
“내가 찾아다 줄까?”
“…예?”
아이가 눈을 끔벅이느라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자칫 힘조절에 실패하면 눈알을 얼려 버릴 위험이 있기에, 청은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로 살짝 눌러 아예 감아 버리게 했다.
“헤어지기 싫으면 다시 데려와서 곁에 두면 되잖아.”
“아, 아니어유! 우째 그래유. 나리께서 곤란해지시면은 안 되구먼유. 행랑 아자씨가 떠난 것도, 나리를 힘들게 해 드린 게 있어서 그런 거라구 했단 말이어유.”
두 손으로 청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내린 순이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송구혀유, 아씨. 지 우는 거 싫어 허는 거 아는데… 이제 안 울게유. 제대로 아씨 모시려면은 이렇게 실없이 울면 안 된다구 배웠구먼유.”
울다 웃으려 억지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게 영 못나 보였다. 청은 무심히 눈을 돌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이제 그만 울라고 하는 것도 귀찮으니까 네 맘대로 해.”
“예?”
“그래 봤자 몸에서 물 빠져나가서 마르는 건 너니까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도 된다고.”
냉정하게 말한 탓일까. 아직 이별에 익숙지 않은 아이가 다시 입술을 비죽였다.
“아니어유. 지 인자 아무렇지도 않어유!”
역시나 한바탕 울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별안간 완전히 울음기를 털어 내는 게 아닌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지는 법두 있는 것이라구 남산 아주매가 그랬구먼유. 열심히 살다 또 연이 닿으면 만날 거라구…. 그러니께 열심히 살어야쥬. 이제 안 울어유.”
뜻밖에, 아이가 조금 자라는 순간을 목격한 것 같았다.
시원하게 표출하던 것을 참을 수 있게 되었으니 좋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까진 알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청이 보기에 순이는 조금 더 어른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
청은 잠자코 배운 대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지런히 어른이 되어 저와 헤어질 땐 너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였다.
***
“이 집에 있는 사내를 전부 모은 게 맞느냐?”
“예. 항아리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뒤져 모두 모은 것입니다.”
점희의 파격적인 증언은 궐 안을 소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추국장은 직접 몸을 움직인 임금에 의해 궐이 아닌 조익환의 집 앞마당으로 옮겨졌다.
“그럼 서둘러라.”
“예!”
임금을 모시고 온 금위대장이 전면에 나서서 크게 소리쳤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한 사람씩 나와 자신의 이름과 하는 일을 소개하여라!”
금위대장의 우렁찬 명령에 줄줄이 서 있던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가장 먼저 나선 이는 나이가 지긋한 초로의 남자였다.
“소인은 정가 삼봉이라 합니다. 좌, 좌상 대감 어른의 집의 청지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증언의 검증이 이루어지는 자리 한편엔 언도 있었다. 기존에 거주하던 북촌 저택의 보수가 끝나지 않은지라 근처의 다른 집을 쓰고 있다더니, 이 집도 대궐이나 다름없었다. 싸늘한 눈으로 잠시 집을 둘러본 언은 새삼 좌상의 권세를 실감했다.
집도 집이지만 부리는 자들 중 사내만 모아 두었는데도 그 숫자가 대단했다. 너른 마당이 미어터질 지경이지 않나.
“전에 혼자 기우제를 지낼 때도 느꼈지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좌익위가 언의 곁에 붙어 섰다.
“말씀하십시오, 저하.”
“아니, 별건 아니네. 그저 이리 보니… 문득 백성들의 눈에 좌상이 임금보다 더 임금 같아 보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서 말이야.”
“예?”
“어허, 어조를 낮추게.”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소리를 해 놓고서 언은 뻔뻔하게 좌익위의 입을 다스렸다. 그러곤 다시 친국이 벌어지는 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 소소, 소인은 이 댁에서 새경을 받는 머슴입니다.”
내린 발 뒤에 앉은 임금은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소개하는 이를 한 번, 그리고 곁에 앉아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부디 잡아야 할 텐데요.”
좌익위가 걱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곳에 찾는 이가 없다는 것은 아바마마께서도 알고 계시네.”
“예? 하면 어찌….”
“증언이 나와서 형식상으로라도 검증을 거치려는 것일 뿐이지. 조익환이 은밀히 부리는 사람이 어찌 대낮에 집 안을 돌아다니고 있겠나?”
아마도 조익환의 목소리만 키워 주는 일이 될 것이었다. 도겸과 심 목사의 누명을 푸는 데에 도움은 됐지만, 조익환을 잡기엔 역부족이니 말이다.
“전하, 어찌 이리 소신을 욕보이시는 것입니까!”
몇몇 사람들이 자신을 소개했을 즈음, 기어이 혈압이 오른 조익환이 무릎을 꿇으며 토로했다.
“소신도 금지옥엽을 간택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며 딸을 가진 아비로서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는데, 어찌!”
“진정하시오, 좌상.”
자리에서 일어난 임금이 발을 걷고 앞으로 나왔다. 자연스레 마당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저 증언에 따라 검증하는 것뿐이오. 추국관인 경이 그 누구보다 잘 알지 않소?”
“하오나 저리 근본도 없는 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다니요!”
조익환은 억울한 나머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낯을 했다. 그러나 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 쳤다.
“저리 뻔뻔한 것을 보니 재담꾼이 되면 딱이겠군.”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임금과 읍소하는 조익환의 대화가 전부였기에 근처는 고요하기만 했다. 언은 입 안에서나 중얼거릴 뿐이었다. 자칫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은 비통했다.
“근본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나? 딸을 가진 아비라면 알아야지. 이 아이도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라는 것을!”
기어이 왕이 언성을 높였다. 이미 허리를 숙인 사람들의 고개가 더 땅으로 떨어졌다.
“증언에 귀천이 있다 생각하는 것이오, 좌상?”
“…소신의 뜻은 그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저 증인을 신뢰할 만한 근거가….”
“경이야말로 떳떳하다면 능히 배 속의 장기라도 꺼내 보여야 하는 것 아니오?”
평소 대신들의 의견에 늘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던 임금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가 나겠냐면서 심 목사와 최 직각을 몰아세우던 추국관이 바로 경이었지. 그런 추국관이야말로 가장 청렴하여야 하니 경의 아궁이에서도 무엇이 타고 있는지는 소상히 확인을 해 봐야 하지 않느냔 말이오.”
임금의 의지는 강경했다. 아무리 조익환이라 하여도 더는 밀어붙일 재간이 없었다.
“…소신, 그저 억울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하니 물러나 있게. 확인할 사람이 많으니.”
다시 발 안쪽으로 돌아간 임금이 명령했다.
“속행하라!”
“예, 전하!”
금위대장이 다시금 우렁차게 명령했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