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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46)화 (131/197)

거침없는 점희의 답에 도겸의 눈이 커졌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점희가 도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처음 도겸을 보았을 때처럼 잔뜩 겁을 먹고 입술을 떨면서도 끝내 제 할 말을 다하였다.

“나리께서 출타하신 동안 따로 묵던 곳 근처에서 목격하였지요. 우연찮게 목소리를 듣고 몰래 뒤를 밟았고, 그 사람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보았습니다.”

“…안 돼.”

왠지 더 말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도겸이 막 점희를 향해 한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점희가 명확히 떨리는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는 저분의 저택이었습니다.”

그 가느다란 손끝엔 조익환이 있었다.

***

“어찌하여 대책도 없이 그런 말을 한 것이냐.”

도겸은 굵은 나무 창살 너머의 점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옥에 있으면 내가 지켜 주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그런 이야기를 해 놓은지라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도 알 수가 없는데….”

그러나 소녀는 의외로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씀을 드리지 않는 게 대책이었습니다.”

“…무어?”

“나리께선 왠지, 미천한 저를 끝까지 거두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

도겸이 차마 답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점희가 힘없이 웃었다.

“나리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또다시 후회하게 되더라도 끝까지 제 삶을 믿고 나아갈 생각이 든다면 증명해 달라고.”

“그래, 그리 말했지.”

“사실 저는 반대로 생각하였습니다.”

“반대로?”

“예. 감히, 나리께서 저를 보호해 주실 수 있는 분인지를 가늠해 보았으니까요.”

되바라진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도겸은 어렵지 않게 점희의 말뜻을 이해한지라 말문이 더 막히고 말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아마 말씀하신 대로 이곳은 위험해서, 어쩌면 소인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점희가 결연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저는 앞으로 제 삶을 믿고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은 죗값을 치러야만, 나리처럼 좋은 분께 기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시시하거나 돌아가신 분들의 한을 위로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벌은 안 되지 않겠습니까?”

“…….”

어쩐지 도겸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합당한 벌을 받게 할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주변 상황을 완전히 통제한 뒤에 조익환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언 정도로만 쓰려 했다.

점희는 아직 어린아이기에, 광연과 석이처럼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형벌이라 여기고 있었으니까.

“처음엔 순이가 마냥 부러웠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리와 아씨, 그리고 남산댁 아주머니와 행랑 아저씨의 각별한 애정을 받는 것이요.”

도겸이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즈음이었다. 점희가 허심탄회하게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조용히 풀어 놓았다.

“하지만 지내보니 알 수 있었습니다. 순이는… 마땅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아이라서 사랑받았다는 것을요.”

점희가 부끄러워하듯 뺨을 만지는 척 슬쩍 눈물을 닦아 냈다.

“그래서 저도 마냥 신세를 한탄하며 도움을 바라는 어린애이기보다, 부끄럽지 않게 자격을 갖춘 나리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조용히 일어난 점희가 공수 자세를 취하는가 싶더니 도겸을 앞에 두고 공들여 큰절을 올렸다.

“…점희야.”

“나리.”

다시 일어난 점희는 활짝 웃고 있었다.

“다시 뵐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도겸의 흔들리던 눈빛이 차츰 견고해졌다. 이를 악무는 그는 단단히 마음먹은 뒤였다.

“…그래.”

점희가 옥사 바깥으로 나올 즈음엔 그저 아이가 아이라서 사랑받을 수 있도록.

세상 전부를 바꿔 놓진 못해도 적어도 제 울타리 안에서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고 어리광 부릴 수 있게끔, 그리 만들어 놓겠다고.

***

점희를 데리고 추국장으로 들어갔던 도겸은 결국 심오균을 무사히 데리고 나왔다. 심오균의 앞에 걸린 모든 증거의 빈틈을 노려 탈락시킨 결과였다.

그리고 서촌 도겸의 집엔 때아닌 잔치가 벌어졌다. 심오균의 탄원을 위해 여기저기서 모여든 이들에게 적어도 따뜻한 식사 한 끼만이라도 직접 대접하고 싶다는 신 씨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고초가 많으셨을 줄로 압니다. 그사이에 많이 야위셨습니다, 숙부님.”

바깥이 다소 왁자지껄한 가운데 도겸은 심오균에게 침착하게 술을 한 잔 따라 올렸다. 심오균은 잔을 받으면서도 지청구를 아끼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너야말로 세수할 적에 물에 비친 얼굴도 보지 못한 것이냐? 영락없이 반쪽이 되어서는.”

겨우 한두 달 사이에 지나치게 많은 일을 겪은 뒤였다. 도겸은 겸연쩍게 웃으면서도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소자, 미리 말씀드린 대로 숙부님을 모시러 가지 않았습니까.”

물론 심오균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병을 빼앗아 잔을 채워 주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네놈이 있어서 더 성가셨을 뿐이다. 우리 둘 중 하나라도 잘못 걸렸다간 꼼짝없이 파면을 면치 못하였을 테니. 그뿐이었겠느냐? 잘해야 유배였을 것이다.”

“압니다.”

담담하게 인정하는 도겸을 노려본 심오균이 돌연 잔을 내려 두며 물었다.

“그렇게 안다면 말해 보아라. 능히 수렁을 잘 빠져나와 놓고 느닷없이 사직한 연유가 무엇인지.”

누명을 벗긴 했지만, 덮어 쓰고 있던 모든 혐의를 씻어 내듯 빠져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익환이 그래 왔듯 미심쩍다 느껴질 수 있는 빈틈을 노려 물고 늘어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추국이 끝날 즈음, 도겸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일 그 자체로 이미 사대부의 명예가 훼손된 바를 이유로 스스로 규장각 직각의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더는 궐에 있을 필요도 없거니와, 기껏 적들이 거하게 차린 상을 함부로 엎어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적어도 한술 뜨는 척이라도 하는 게 더 자극하지 않는 길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점희의 진술로 추국장의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건 당연했다. 물론 조익환은 말도 안 된다며 펄펄 뛰었다. 그러나 상황을 지켜보던 임금이 심오균과 도겸의 혐의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추국을 종료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조익환에게 역풍이 불어 갈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점희가 위험해졌다. 꼭 점희가 아니더라도 조익환은 아마 어떻게든 보복을 할 것이었다. 그래서 도겸은 뼈를 취하는 대신 우아하게 살을 내어 주는 길을 택했다.

“…그래. 갈 길이 머니 조금이라도 잃는 척을 하긴 해야겠지. 어느 정도 주고받아야 상대도 의욕을 가질 테니.”

이유는 납득이 됐지만 그럼에도 심오균은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겸이 이루었던 학자로서의 업적이 아까운 탓이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가늘게 뜬 눈으로 도겸을 바라보았다.

“그럼 설마 청이를 최씨 가문에 입적시키지 않고 내 딸로 둔갑시킨 게… 네가 사직하거나 파면당할 상황까지 고려했기 때문이냐? 양친이 생존하여야 한다는 간택 조건 때문만은 아닐 터인데.”

그 물음에 도겸은 옅게 미소만 보였다. 무언의 긍정임을 알아차린 심오균이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의 아들 같은 조카는 주도에 따라 겸손하게 고개를 돌려 술을 마셨다.

“네 집념은 알겠다만….”

심오균도, 도겸도 술만 들이켤 뿐 상을 가득히 채운 음식엔 손을 대지 않았다. 심오균은 다시 스스로의 잔을 채워 마실 뿐이었다.

“그 목표 하나에 너무 매몰되어 버리는 건 아닌가 싶구나.”

“예?”

“그것 말고는 다음이 없는 사람처럼 내달리고 있질 않느냐. 조익환의 악행을 낱낱이 밝히고 조정의 썩은 근간을 모두 들어낸들, 전하와 세자 저하의 안녕을 지킨 뒤엔 어찌 살려고 출세 길도 내 버리는 것이냔 말이다.”

“…글쎄요.”

도겸은 사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 다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무어, 네 박식함만 믿고 전하나 저하께서 다시 궐로 불러들여 주시리라 기대하고 있다면 몰라도.”

퉁명스러운 숙부의 말에 도겸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하하… 그렇게까지 교만하여 건방 떨고자 관직을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숙부님.”

“그럼?”

“부디 오해를 풀어 주십시오. 유능한 인재는 저 말고도 많습니다. 한 번씩 과거를 치를 때마다 전국에서 수없이 모여들고 있지 않습니까?”

도겸은 연거푸 술을 따르려는 심오균에게서 부드럽게 술병을 빼앗아 가져왔다.

그러곤 허리를 세워 두 손으로 공손히 따랐다. 다만 잔의 반쯤 채워졌을 때 술병을 물렸다.

“그러나 그렇게 박식한 인재들을 키워 낼 수 있는 교육 기관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쩐지 답을 알겠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리는 심오균에게 도겸은 그럴싸한 답을 내어놓았다.

“주상 전하께 저 하나보다 저 같은 신하 열을 키워 보내 드리는 게 진정한 충신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어, 어디다 서당이라도 차릴 셈이냐?”

“어디든 제가 배운 것을 베풀 수 있는 곳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곳이 노상이든, 외양간이든 소자는 상관없습니다만.”

다만 제 가르침을 받을 이들은 다른 서당과 달리 조금 특별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났다. 급조한 미래 계획이긴 했지만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 듣고 보니 또한 충심이구나.”

심오균이 도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마찬가지로 상한 몸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딱 절반이었다.

“다만 네 얼굴을 보아하니 그 몸에 더 남은 살점이 있을까 걱정되는구나. 그러니 더는 살을 내어 줄 생각 말고 무난하게, 무사하게 걸어가 누군가의 스승이 되도록 하여라.”

심오균의 다정한 염려엔 아무리 도겸이라도 더 이상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예.”

도겸은 잠자코 그 응원의 마음을 소중히 담아 두었다.

“소자, 꼭 그리하겠습니다.”

궁극의 목표를 이룬 뒤에도 반드시 행복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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