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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45)화 (130/197)

이무기가 다친 것을 보았다면 지금쯤 도겸이 어찌 총을 다루는지 물밑을 통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다니고 있을 것이다.

부러 조익환의 심기를 긁어 댄 도겸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즉각 심심찮게 사과했다.

“송구합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도 되겠습니까, 대감?”

“그럼 터무니없다며 부정만 하지 말고 어서 결백을 증명하게. 그렇지 않으면 사헌부에서 모은 증거에 입각하여 엄히 다스려 단죄하여야 하니!”

“소신이 직접 적어 숨겨 두었다던 장부 말입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지.”

조익환이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수첩을 들어 보였다. 하필 청이 깨어나지 못한 틈인지라 따로 알아볼 겨를은 없었다.

“저와 거래를 하였다던 이는 찾으셨습니까?”

“물론. 증인들 중 하나로 대기하고 있네.”

“그럼 지체 없이 출석시켜서 증언을 들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도 그 내용이 무척 궁금하니 말입니다.”

도겸의 호기에 즉각 증인들이 줄줄이 불려 왔다. 그리고 대부분이 같은 말을 했다.

“저, 저 사람이 시킨 것이 맞습니다! 소인에게 쌀을 팔고 원보로 받아 갔습니다요. 도성 내 쌀값이 점점 올라가고 있는지라 부쩍 거래량이 늘기도 했지요.”

물론 장부에 기재된 내용과 딱 들어맞기도 했다. 익히 예상한 바였다.

“소신도 증인에게 몇 가지 답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확실히 도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던 차, 도겸의 청에 임금이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하라.”

자리에서 일어난 도겸이 증인과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증인은 눈을 굴리며 도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거래 당사자를 바로 알아보는 것을 보니 내가 그 자리에 직접 나갔다는 뜻인가?”

도겸은 제가 썼다는 낯선 장부를 다시 들추어 확인하며 물었다. 증인이 우물쭈물하며 대꾸했다.

“주로 소인이 나리가 계신 댁으로 가서 거래를 마치고 왔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직접 나오셨지요.”

불행 중 다행으로 애꿎은 이들까지 추포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럼… 이날은 어땠는가? 대동미 열 가마니를 거래한 날 말일세.”

“그날도 나리를 직접 뵈었지요.”

“그런가? 그럼 이날은?”

“그날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소인이 쌀을 너무 헐값에 사들인다며 값을 더 쳐서 거래해야 한다한다고 하셨지요.”

전혀 본 적 없는 증인이 도겸을 알은체하며 그럴싸하게 꾸며 내기까지 하니 기가 찼다. 그러나 도겸은 말려들거나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하면 자네는 그 쌀이 대동미라는 것을 어찌 알았나? 이 정도 규모라면 소작을 놓고 소작료로 받은 것을 되파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

움찔 놀란 증인이 침을 꼴깍 삼키며 간신히 답했다.

“그러셨다면 진즉 정당하게 상단이나 소매상을 통하셨겠지요. 소인에게 몰래 쌀을 파는 이들 대부분이 비슷한 이유인지라 잘 압니다요.”

“흠, 그래? 그럼 이날도 다른 날과 다를 것 없이 순조롭게 거래하였겠군.”

“아, 이날은….”

도겸이 가리킨 날은 대사례 이후 어느 날이었다. 즉, 도겸의 눈이 멀어 있던 시기였다.

“나리께서 사고를 당하시어 눈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하였는데. 지팡이를 짚고 계셨습니다.”

분명 도겸의 눈이 먼 사실을 사전에 들었을 것이다. 도겸은 상인에게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고 물었다.

“오래전 일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니 기억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군. 그래, 그날 내가 짚고 있었다는 지팡이는 어떤 색이던가?”

그가 가리킨 날짜는 장부가 발견되기 전, 그러니까 장부에 적힌 날짜로서는 가장 최근의 것이었다. 기록상으로는 동해로 떠나기 불과 일주일 전으로 쓰여 있었다.

“그것이 어둑한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소인의 기억에 어두운 색이었습니다.”

“그런가?”

도겸은 조익환을 한 번 바라보고는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고하였다.

“지금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만 소신, 눈을 잃었을 적 사용하였던 지팡이는 오로지 연수목으로 만들어진 지팡이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었다 한들 하얀 바탕에 검은 무늬가 새겨진 것인지라 저리 기억력이 좋은 증인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 거래 내용이 중한 것 아닙니까? 나리가 무슨 색 지팡이를 짚었는지와 같은 그리 사소한 것까지 기억한단 말입니까?”

즉각 증인이 따져 물었지만 도겸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그러한가? 그런데 나는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에야 지팡이를 선물 받았네. 그전까지는 집 안에서만 생활하며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직접 손으로 익히고 있었지. 그런데 어찌 자네는 내가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고 증언하는가?”

“그리 미련하게 굴어 최 직각의 몸이 이리저리 상해 가는 것을 소자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도겸의 말에 힘을 싣는 이는 다름 아닌 세자 언이었다.

“보다 못해 지팡이를 만들어 선물한 것도 저였습니다. 그전까지 다른 건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가솔들에게서 들은 바가 있어 지팡이를 만들어 줘야겠다 마음먹은 것이고요.”

“흠….”

임금이 깊은 숨을 내쉬며 고민에 빠졌다. 나온 증거도 미심쩍은 부분들이 많은 데다 증인들의 증언도 속이 시원할 만큼 명확하지 않으니 말이다.

“…외람되오나.”

그때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여자가 어렵사리 목소리를 내었다. 좌중의 이목이 단숨에 쏠렸다.

“소인도 증언하고자 합니다. 직각 나리의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물에 대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 나리께 꼭 데려가 달라 청하였습니다.”

점희였다. 되도록 아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원만하게 일을 해결하고자 했던 도겸은 씁쓸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 아이는 누구이기에 데려온 것인가?”

임금의 하문에 도겸은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저 아이는… 지난번 처녀 연쇄 살인 사건 때 유서를 날조하였던 세책 필사인입니다.”

답을 들은 이들 모두가 기함하며 경악했다. 그러나 임금은 놀라기보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점희를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나올 뿐이었다.

“네가 바로 그 아이로구나. 증인으로 세우기 위험한 부분이 있어 당분간 따로 보호하고 있겠노라, 세자에게서 따로 보고를 받은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다.”

점희의 등장으로 추국장은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와중에 조익환이 나서서 흐름을 바로잡으려 했다.

“하오나 전하, 이 사건과 그 사건은 별개이지 않습니까? 그 문제 또한 아직 종결하지 못하였으니 저 아이는 추후에….”

“아니, 이 사건에도 연관이 있으니 데려온 것이 아니겠는가? 최 직각은 답하라. 저 아이를 이곳에 데려온 연유가 무엇이더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인이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단단히 마음먹었는지 점희는 감히 도겸이 답할 기회까지 빼앗아 갔다. 소녀의 당돌함에 흥미가 생긴 임금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는가 싶더니 친히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래. 네가 답을 해 보거라.”

“예.”

조심스럽게 앞으로 두어 걸음을 더 나온 점희가 무릎을 꿇었다.

“우선은 소인이 장부들을 조금 살펴보아도 되겠는지요.”

영특하게도 언이 몰래 가져와 보았던 일을 발설하지 않기 위해 점희는 이미 아는 것을 재차 보겠다고 요구했다. 거절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고, 소녀는 자그마한 손으로 장부를 천천히 살폈다. 그사이 많은 사람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소인이 보기에 이 장부는 날조된 것입니다.”

일각쯤 지났을까. 점희가 공손히 증거물을 내놓으며 제 생각을 밝혔다.

“무어라? 그리 말하는 근거가 무엇이더냐?”

“우선 수년 간 작성되어온 장부 치고 책지와 표지가 지나치게 깨끗합니다. 수년 간 그때그때 채워 넣은 내용이라면 먹의 농도나 필체도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건만 한결 같고요. 마치 수년간의 일을 하루아침에 기억하여 적은 것처럼 기이합니다.”

점희는 도겸과 언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하나 꼼꼼하게 짚어나갔다.

“그거야 다른 곳에 적어두었다가 옮겨 적은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조익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거기다 전하, 어찌 고작 어린 세책 필사인의 소견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까? 최 직각이 데리고 있던 아이라 하니 더욱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따로 전문인 자를 불러다 소상히 따지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이는 시간 낭비라 사료되옵니다.”

“옮겨 적었다면 더욱 필체가 흐트러졌어야 맞습니다. 소신은 지난 해 팔을 크게 다쳤던 이후로 수전증이 생겨 전과 같은 필체는 구사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양쪽의 의견을 수렴한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국관과 심 목사의 의견에 모두 따르자면 저 장부는 모호한 점이 많아 확실하지 않은 증좌가 되는 것 아닌가?”

상황을 파악한 임금이 수긍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확연히 도겸과 심오균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증인이 많고 증거가 넘쳐나지만 모두 의문이 분명한 것들입니다. 하오나 전하, 궐 앞엔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아십니까? 모두 숙부의 탄원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그 수만 해도 수십, 아마 백이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 일로 이리 급히 추국이 열린 것이 아닌가?”

고민에 빠진 임금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겸은 조익환이 무어라 반박하기 전에 쐐기를 박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숙부님의 탄원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억지로 돈을 주고 모을 수도 없는 인원들이 숙부의 결백을 증명하고 있는데 어찌 이것까지 거짓이라 치부하겠습니까?”

“심 목사와 최 직각이 연루된 이 횡령 사건이 모함이라면.”

고민하던 임금이 다른 방향에서 접근을 시도했다.

“누가 감히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도겸의 호소에 더해 이번엔 점희가 도겸조차 듣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리께서 소인을 보호해 주셨던 이유가… 바로 소인이 유서를 꾸며 쓰도록 일을 시킨 자를 특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음성은 들었으나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용모파기조차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이제는 할 수 있단 말이냐?”

“예.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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