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44)화 (129/197)

“모두 천부당만부당한 증좌에 불과합니다. 소신이 평소 자주 자리를 비우고 고을을 두루 둘러보는지라 조작된 증거를 가져다 두기는 어렵지 않았겠지요.”

“어디서 그따위로 근거 하나 없이 반박한단 말인가?”

“근거는 많았습니다. 하나 평소 제가 업무를 보는 방을 청소하던 관노 아이가 증언을 하기도 전에 실종됐고, 제게 유리한 관원들의 증언은 어쩐지 모두 오염되었다며 증거로 쓰이지도 않았지요. 무엇보다 수족들이 저를 보았다던 밤에도 저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자네가 그 시각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증언할 이도 없는가?”

“그야 제 안사람이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가족은 증인으로 설 수 없으니 곤란한 참이지요.”

밤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안사람만이 알고 있다. 더 캐물어 봤자 양반의 체면만 상할 상황임을 알아차린 조익환이 언짢은 듯 헛기침을 했다.

“그보다는.”

조익환이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은 심오균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제 수족들이 직접 목격하고 증언했다던 내용을 어찌 뭉뚱그려 모호하게 말씀하시는지 의아하군요. 분명 소인의 모습이긴 하였으나 다소 횡설수설하고 부하들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그들이 한 증언의 요점을 잘못 잡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자네야말로 어찌 논지를 흐리는가? 어쨌든 착복을 명한 이가 심 목사였던 것은 확실하다, 모두가 그리 말했네!”

“그렇게 따지면 며칠 전 밤에 금부 옥사에 침입한 자의 모습도 제 안사람이긴 하였습니다만.”

역시나 일부 증거가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감춰졌다. 그 과정에서 또 애먼 목숨을 잃은 듯하여 천불이 끓었다. 도겸은 주먹을 쥐었다.

“그 일은 금부 옥사를 지키다 습격을 당하여 혼절했던 병사들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무려 열이 넘는 숫자였지요. 하나 제 안사람은 사실 물동이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할 만큼 나약한 사람입니다.”

역시나 조익환은 그날의 일에 대해서도 손을 써 두었다.

“그건 저녁 식사 때문이지. 삼계탕에 몰래 술을 먹고 태만하게 잠든 병사들을 따로 처벌하여 해결한 문제일세. 애석하게도 그들은 그 밤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고.”

“아무리 잠에 들었었다 한들, 안사람의 모습을 한 여인이 들어와 억지로 음식을 먹이려 하였던 사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닐 터인데요. 갇혀 있던 소신이 그 자리에서 재료를 손질해 전을 부치고 고기반찬을 할 수는 없던 노릇이 아닙니까?”

청을 목격하지 못한 것은 다행인 일이었지만 이무기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게 되었다. 조익환은 구렁이처럼 의혹을 느긋하게 빠져나갔다.

“그날 숙모님이 어디에 계셨는지 해주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있던 도겸이 첨언하자 대번에 이목이 모여들었다.

“제가 알기로는 숙모님께선 내내 해주에 계시다 오늘 막, 한양에 들어오셨다 하였습니다만. 그것도 숙부님의 무죄를 탄원하기 위해 몸소 한양으로 모여든 수많은 이들과 함께요.”

“그 말은, 심 목사가 착복을 명한 것과 심 목사의 아내가 옥사에 나타난 두 사건 모두 모습은 분명하나 당사자가 아니란 뜻인가?”

그때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임금이 친히 하문했다. 심오균과 도겸을 포함하여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자세를 고치며 고개를 숙였다.

“어허,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거스를 수 없는 물음에 도겸은 눈만 움직여 조익환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얼마나 많은 계산이 일었는지 모른다.

“…이 땅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사람이 아닌 것이 많다지요. 규장각의 많은 서책들도 그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습니까.”

도겸의 발언에 추국장의 분위기가 거센 파도처럼 출렁였다.

***

“어르신을 풀어 주십시오!”

도겸을 따라 추국장으로 들어가지 않은 청은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소리치는 소음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을 구하고자 이렇게 모여들 수도 있구나. 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도겸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도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선하게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동물이었다. 이무기는 그저 은혜를 갚으려던 것뿐이었다며 도겸에게 언성을 높였던 일이 조금 멋쩍어졌다.

한편으로는 조익환이나 천덕이 같은 악하고 불순한 인간들 때문에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분리하여 보고 있던 자신에게, 그리고 그렇게 만든 인간들에게도 화가 났다.

“아씨, 괜찮으십니까?”

“응?”

“어쩐지 화가 나신 것 같아서요.”

미간을 찌푸린 게 소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남산댁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청은 소란한 사위에 겁을 먹은 순이만 더 제 쪽으로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까 어머니 살펴 드려.”

사실 청은 온갖 소음을 틈타 한창 추국장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를 엿듣기 바빴다.

가만 듣던 청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뭐야. 전부 밝히려는 건가?”

“예? 아씨, 뭐라구 허셨어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무기의 존재를 드러내면 아무래도 심오균의 누명을 벗기는 일도 쉬워질 것이다.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인 이가 심오균 본인이 아니라 이무기였다는 것만 밝히면 끝날 문제이지 않나.

청은 가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씨, 나리랑 어르신… 무사히 나오시겄쥬?”

하지만 이무기를 세상에 드러내면 조익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했다. 반드시 청의 존재까지 드러내고 사로잡기 위해 안간힘을 쓸 터.

그렇다면 청은 기왕 힘을 드러내는 김에 확실히 보여 주고 우위에 서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많겠지만 가장 효율이 좋은 것은 역시 시각적 효과일 테고.

“아직은….”

하지만 지금 심장은 신물의 힘을 빌어 간신히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지 않나. 가뜩이나 이무기의 여의주까지 뻐꾸기 알 품듯 품어 주고 있는지라 제 몸의 회복이 더디기도 했다.

도겸에겐 멀쩡한 척했지만 사실, 청은 정말 죽음이 코앞에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저기.”

“…예?”

그때 청의 손등을 덮는 작고 따뜻한, 청의 피부가 느끼기엔 뜨겁다 느껴지는 체온이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습… 구나.”

심오균의 아내이자 심청의 어머니 신 씨 부인이었다. 청이 어색한 듯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던 여인이 문득 청의 낮은 체온을 느끼고는 깜짝 놀라 그 손을 감싸 잡았다.

“아니, 어찌 이리 손이 차니? 가까이서 보니 안색이 심히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진짜 딸도 아닌데 여인은 만난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은 낯선 소녀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뺨에 손을 대려는 걸 피하자 그제야 흠칫 놀란 신 씨가 물러났다.

“어머, 나도 모르게….”

“괜찮습니다. 몸이 원래 좀 찬 편이라.”

“…원래?”

신 씨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재차 청을 잡아 보려는데 순이가 앞을 막아섰다.

“아씨는 괜찮으셔유!”

“응?”

그리고 뒤에선 남산댁이 신 씨를 붙잡았다.

“부인, 왜 그러십니까?”

“아니, 청이 손이 많이 찬 것 같아서 말이네.”

“아, 그것은….”

“너희도 괜찮아.”

청이 순이와 남산댁을 안심시켰다. 그러곤 신 씨에게 통보했다.

“아버지는 알고 계셔요. 당신의 새로운 딸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요.”

수많은 사람들의 간곡한 청원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청의 나직한 목소리 하나가 신 씨를 충격에 빠트렸다.

“…뭐?”

“못 들으셨어요?”

“아니, 듣긴 들었는데….”

“놀라실 것 없습니다.”

청의 시선은 줄곧 도겸이 들어간 문 안쪽에 가 있었다.

“그저 어머니가 새로 얻으신 딸이 좀, 용하다는 것뿐이니까요.”

아니, 당장 드러낼 힘이 없음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청은 도겸을 믿기로 했다.

그가 할 일이 없다면 없는 것이니 말이다.

***

인두겁을 쓴 존재라니. 물론 그런 내용들을 진실로 믿은 적은 없지만, 이제 도겸은 누구보다 앞장 서서 사실이라 소리 높여 주장할 수 있었다.

“국법이 지엄하거늘, 국문의 현장에서 규장각의 직각이라는 자가 어찌 그리 허무맹랑한 소릴 하는가!”

당연하게도 조익환이 역정을 내며 반박했다. 그러나 도겸은 청에게도 말했듯 조익환에게서 반박의 기술을 터득한 참이었다.

“저나 숙부님의 입장에선 이런 모함을 받는 것도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입니다만. 거기다 소신과 숙부님께 유리한 증거들은 모조리 배제되고 터무니없다는 식으로 간주해 버리시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자네에겐 반증을 마련할 수 있도록 친히 전하께서 하옥하지 않고 풀어 주시며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주시지 않았나?”

“예. 주셨기에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임금의 결정에 못 이기는 척 따랐겠지만 또한 조익환은 분명히 노렸을 것이다. 도겸은 담담하나 거침없이 소신을 밝혔다.

“소신은 이미 모함을 당하였습니다. 이 상태에선 누굴 만나든 그 사람까지 없는 혐의를 뒤집어쓸 수 있는데 어찌 함부로 반증을 구하러 다니겠습니까?”

“그 말은, 전하께서 주신 기회를 허투루 여겼다는 것이냐? 자네를 예의주시하던 사헌부 소유의 보고에 따르면 한 차례 웬 상단으로 외출을 하였다던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급히 외출했던 일은 아마 아시겠지만 제 집의 일을 봐주던 행랑아범이 요양을 떠나게 되어 급히 사람을 구하고자 부득이 한차례 나섰던 것뿐입니다.”

그 말에 조익환의 눈썹이 꿈틀댔다.

“…하필 이런 때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도겸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누이와 함께 바다를 보고 오자마자 모략에 빠지는 일도 벌어지는데 겨우 그런 일이 없겠습니까? 하필 침입이 있던 날 밤 금부 옥사의 병사들이 ‘모조리 잠에 빠지는 황당한 일’도 우연찮게 벌어지는데 말입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리 비아냥대는 겐가!”

어쩐지 오늘따라 조익환의 어조가 날카롭게 느껴졌다. 아마도 이무기에게 총상을 입힌 탓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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