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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43)화 (128/197)

하지만 청의 입장에선 그 기준에 부합하는 도겸이 무척 답답하기만 했다. 육감을 이용해 부정한 기운을 읽고 그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할 수 있는 용이다 보니 구태여 행동까지 지켜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인지라 앞서 행동을 본 이후에 뒤늦게 의미를 납득하는 과정은 청으로 하여금 제법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 됐다.

눈앞의 남자는 알까. 청의 인내심을 끌어내고, 호기심을 끌어내는 최초의 인간이 바로 저라는 것을.

“만약 간택 전까지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면 어떡해?”

“조익환에게서 배워 둔 게 있으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그런 인간한테도 배울 게 있어?”

“그럼. 실패도, 적도 결국은 나를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법이니까.”

“너….”

청은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는 도겸이 얄궂게 느껴졌다. 충동적으로 그가 보고 있는 책의 일면을 붓으로 망가트렸다.

“이, 이게 무엇 하는 것이냐!”

그러자 내내 느긋하고 유하게 굴던 도겸이 대번에 정색하며 몹시 화를 냈다.

“귀한 서책을 이리 망가뜨리면…!”

말할 틈도 아껴 가며 바삐 먹물을 닦아 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왜 갑자기 심사가 꼬인 것이냐? 그렇다 한들 어찌 화풀이를 애먼 책에다 한단 말이냐? 이 책은 다시 구할 수도 없는 것인데!”

그러나 청은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너, 책 그만 봐.”

“…무어?”

청천벽력 같은 명령에 도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너 맨날 이런 책만 보면서, 그래 봤자 100년도 못 산 노자나 공자 같은 인간들이 뭉뚱그려서 그럴싸하게 읊는 내용이나 익히니까 평소에도 말을 두루뭉술하게 하는 거잖아.”

몸 어딘가에 아가미라도 있는 것일까. 멈추지 않고 줄줄 읊는 청을 본 도겸의 눈이 커졌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도겸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질 무렵이었다. 아예 책을 찢어 버리려는 듯 손을 뻗던 청이 먼저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리기가 바쁘게 누군가 소리쳤다.

“나리! 서둘러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행랑아범을 대신해 일꾼으로 들인 이의 목소리였다. 도겸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되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말을 늘이기에 나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는 도겸을 따르며 청이 미리 언질을 주었다.

“숫자가 많아. 지난번에 너 잡으러 왔을 때보다는 적지만.”

“그래?”

그 말에 도겸은 더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미리 감지한 대로 행랑 마당엔 대략 열 명쯤 되는 사헌부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당장 궐로 가셔야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선 이가 굳은 얼굴로 통보했다. 지난번 도겸을 추포하러 왔던 사헌부 지평이라던 자와 복색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무슨 일로 그러는가?”

“궐에 급히 추국장이 설치되고 있습니다. 곧장 출석하라는 어명입니다.”

그 말을 들은 도겸의 눈이 찰나의 순간 약간 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뭔가 올 게 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급히?”

급하게 설치되었다는 것은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다는 의미였다. 청은 도겸에게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밖으로 나서야 했던지라 겨를이 없었다. 청은 묵묵히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청아.”

그때 대문을 넘기 전 도겸이 멈춰 서 청을 찾았다.

“예, 오라버니.”

즉시 심청 그 자체로 분한 청이 나직이 답했다.

“이제 네가 할 일은 없다. 그저 지키던 것만을 지켜다오.”

돌아보지 않고 잇는 말에 청은 의아했지만 더는 심술을 부리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오라버니.”

“좋다. 그만 갑시다.”

전과 달리 어명에 따라 순순히 움직이는 도겸을 선두로 집 안의 가솔들까지 줄줄이 따랐다.

또다시 사전에 협의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고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행동만으로 의미를 유추해 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토로하기가 바쁘게, 거기다 도겸이 세운 정확한 계획을 듣기도 전인지라 청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은 두꺼운 구름이 밀려가고 예의 마른 바다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소리 없는 변화였다.

***

“저희 목사 어르신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주상 전하, 소인들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궐 근처에 다다를 즈음, 도겸은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도겸이 묻자 아마도 세자의 명령으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호위를 나왔을 한 익위사가 답했다.

“해주에서 수십은 되는 백성들이 한양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심 목사 어른의 결백을 위해 너도나도 나서서 읍을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품성은 그 사람이 지나간 자리를 보면 안다고 했다. 가만 앉아 적의 목이 떠내려오길 기다리던 도겸이 원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했다.

“…급히 추국장이 열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겠군.”

“예. 목사 어른이 계시던 고을은 물론 이전에 은혜를 입은 바 있는 사람들까지, 점점 모여들고 있습니다.”

익위사가 설명을 덧붙이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외치며 궐문 안으로 간곡한 목소리를 전하고 있었다.

“어르신께서 대동미를 빼돌리시다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도리어 빈곤한 이들을 대신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이건 모함입니다. 어르신만큼 선량한 분이 어디 계신다는 말입니까!”

그들 중엔 도겸을 알아보는 이도 있었다.

“직각 나리!”

시조카였음에도 꼬박꼬박 도겸을 깍듯하게 대우하는 숙모였다. 숙모를 본 도겸은 깜짝 놀라 사헌부 소유를 제치고 나갔다.

“숙모님!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된 것입니까?”

늘 다소곳하고 단정하기만 하던 숙모는 그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된 채로도 의연하게 답했다.

“영감께서 집을 잘 지키라, 그 말만 남겨 두신지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데… 그간 영감께 빚을 진 이들이 소식을 듣고 하나둘 찾아와 직접 주상 전하께 사실을 고하겠다 하여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제 집으로 먼저 오시지 않고요.”

“그랬다간 모의를 한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듯하여… 곧장 이곳으로 왔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머니.”

그때 청이 불쑥 끼어들었다. 도겸과 숙모는 모두 흠칫 놀라 청을 바라보았다. 도겸을 바라보는 숙모에게 도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청아.”

생각해 보니 청이 어머니를 보고도 가만히 있거나 몰라보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미처 거기까지 고려하지 못하고 있던 도겸은 새삼 청에게 감탄했다.

“아버지께선 무사하셨습니다. 너무 염려치 마세요.”

얼떨떨해하는 숙모에게 도겸이 냉큼 전했다.

“청이가 얼마 전에 숙부님을 직접 뵈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랬구나.”

도겸은 저를 따라온 남산댁에게 눈짓해 숙모를 모시게 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 곁을 지켜 주게.”

“염려 마십시오, 나리.”

그리고 도겸이 막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서려던 차, 점희가 쪼르르 따라와 도겸의 옷깃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나리, 잠시만요.”

“…점희야.”

자백하겠다는 것을 조금 더 적당한 때를 보자며 말려 두었건만.

“소인도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어이 나설 모양이었다. 아직은 앳된 소녀를 바라보던 도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곁에 서 있던 소유(所由, 형관의 보조 역할을 하는 자)에게 말했다.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시킬 것이다.”

“그리하십시오.”

거대한 입이 벌어지듯 두꺼운 대궐의 문이 열렸다.

또 하나의 산을 넘어갈 무렵이었다.

***

“국문을 행하기에 앞서 충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들이 저지른 불미스러운 사안에 소신, 더없이 참담하며 비분강개한 심정입니다!”

추국관 대표로 나와 있는 사람은 조익환이었다. 도겸과 심오균은 추국장 한가운데 깔린 멍석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대화라곤 들어올 때 눈이 마주친 게 다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도겸과 눈이 마주친 순간 심오균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으니 말이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하나하나 낱낱이 헤아려 모든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급하게 말을 맞춰 둘 필요는 없었지만, 조익환이 구구절절 떠드는 소리가 길어지니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마찬가지였는지 숙부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슬쩍 물어 왔다.

“앞이 보이는 것이냐?”

물론 도겸도 복화술로 나직이 답했다.

“…예. 다행히 회복이 되었습니다만, 어찌 아셨습니까?”

“아무리 고요한 옥사라 하여도 들릴 이야기는 전부 들리더구나.”

“송구합니다.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잘했다.”

“…예?”

“저리 파들대는 꼴을 보아하니 네가 제대로 찌른 게 아닌가 싶구나.”

그 말을 할 즈음 심오균은 옅게 웃고 있기까지 했다. 늘 화가 난 듯한 인상이라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도겸이 힐끔 보기엔 분명 웃는 게 맞았다.

“…심청, 그 아이를 놀랄 만큼 완벽하게 가르친 것도. 왜 네가 그 아이를 궐로 들이려 하는지 알겠더구나. 모두 납득이 되었다.”

“…….”

“그러니 해 보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본격적인 추국이 벌어졌다.

“죄인 심오균은 답하시오. 백성들의 대동미를 가로채 착복한 것이 사실인가?”

“아닙니다. 그저 소신을 모해 하려는 작당들이 꾸민 짓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집에서 나온 수만 냥의 은자들과 장부는 어찌 설명할 것인가? 흉년에 쌀값이 치솟은 상황을 이용하여 몰래 되팔았다는 증언에 증인들까지 있네만!”

도겸은 몰라도 심오균은 확실히 묻어 버리려는 게 보였다. 그래야 간택이 시작되기 전에 청을 배제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심 목사 자네의 수족들까지 자네가 직접 착복하라 명하는 것을 들었다 하였다!”

그러나 심오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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