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웠는지 남산댁이 긴 한숨 끝에 혀를 찼다. 담뱃대를 넣어 둔 버선 부근을 만지작대는 게, 담배가 필요해 보였다.
“피워도 괜찮네만.”
“아닙니다.”
멋쩍은지 자세를 고쳐 바로 앉은 남산댁이 뒷 내용을 전해 주었다.
“처음 이 집에서 머뭇거리다 나리를 만나고 나서야 도망치게 된 것도, 마음을 굳게 먹긴 하였으나 이 댁 주인마님의 배가 부른 것을 보니 막상 마음이 약해져 어떻게든 살려 보려다 그리된 것이었다 합니다. 무리들 중 집을 불태우는 일을 맡은지라 마지막까지 남아있었고요.”
“…….”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 도겸이 또다시 손바닥이 아릴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그걸 본 남산댁이 주름진 손으로 따뜻하게 덮어 감싸 주었다.
“다리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바깥주인 마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휘두르신 칼에 깊게 베여 그리된 것이라 합니다. 거기에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바깥주인 마님의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 것이지요.”
“…하.”
“아내를 묻어 주고 스스로 죽으려 했지만, 적어도 나리께 죄를 모두 고하고 죽는 게 돌아가신 분들의 한을 조금 풀어 드릴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하여 몇 년이나 나리를 찾아다녔다합니다. 간신히 한양에 돌아왔을 때 서촌에 다시 집이 세워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고요.”
수많은 사람들을 구제해 왔다. 그럴 때마다 도겸은 왜 이런 비극이 선한 사람들에게만 빚어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다 한들 섣부른 판단을 내렸던 행랑아범을 용서하시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리.”
“그래… 알고 있네.”
그 말을 끝으로 도겸은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르지도 않고 또 차오르는 눈물을 억눌렀다. 이미 잔뜩 부어오른 눈은 제대로 뜨기도 어려운데 말이다. 그리고 남산댁은 가만 도겸의 손등을 토닥이며 긴 정적을 함께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도겸이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청이가 한 말이, 오늘따라 깊이 사무치며 공감이 되는군.”
“아씨가요?”
“인간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다던가.”
“아… 저도 자주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제게 수업을 받을 때마다 그리 투덜대시는걸요.”
그런데 잠시 깨어나 사랑에 왔다가 한참을 울어 버리는 저를 위로하는 동안 청은 의외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울지 말라는 말을 자기 방식으로 한 것을 제외하면.
“하나, 적어도 하나는 확실한 게 아닙니까.”
울적하게 멈춰 있던 도겸에게 남산댁이 넌지시 힘을 주었다.
“배후에 조익환이 있다는 것이요.”
“그래, 그 말이 맞지.”
분노를 표출해야 하는 정확한 방향을 짚어 주는 남산댁을 보며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나리께선 그동안 아범의 사정을 알고 계셨으면서 어찌 일찍 터트리고 아범을 증인으로 세우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증인만으로 잡기엔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탓이었지.”
“…….”
“또한 조익환이 얼마나 멀리 바라보고 어떤 목표를 세우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싶었네. 그 목표를 부수어야 완전히 무너트리고 뿌리까지 뽑아낼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동시에 자신에게도 힘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궐로 들어가 책만 보는 학자인 척 궐 안 조정을 살피고, 밖으로는 기울어 가는 상단을 하나씩 사들여 거대한 조직을 일구어 냈다.
“그리고 슬슬, 때가 되어 가는 것 같네.”
조익환의 사병이 무기까지 전부 준비한 이상, 모호하게만 보였던 그 목표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리.”
나직이 읊조리며 마음을 다잡느라 희미하게 떨리는 도겸의 손을, 남산댁이 강하게 붙들었다.
“그래도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그동안 나리께서 개척하며 걸어오신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
도겸은 억지로나마 미소를 보이며 덧붙였다.
“청이에게 복잡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모여 살아야 한다, 그리 이야기했단 말이지.”
약해진 마음에 심호흡을 불어넣은 그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럴 수밖에 없음을 청이에게 증명하고, 그리고 자라날 순이에게도 꼭 보여 주고 싶네.”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비가 내린 뒤에 땅이 굳듯이,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이 단단해지는 법이다. 적어도 도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선함의 저력을 보여 줄 때였다.
***
“뭐 해?”
한창 안마당 한쪽의 비어 있는 땅을 파고 어린 묘목을 심던 중이었다. 도겸의 뒤로 불쑥 나타난 청이 물었다. 도겸은 놀라지도 않고 느긋하게 답했다.
“나무를 심는 중이었다.”
한 손으로 가느다란 나무를 잡아 세운 뒤, 다른 손으로 천천히 뿌리를 감싼 흙덩이가 너무 눌리지 않게 흙을 모아 구덩이를 채웠다. 도겸의 곁에 쪼그리고 앉은 청이 마른 묘목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나문데?”
“살구나무다. 꽃이 어여쁘고 열매가 제법 달달하지.”
며칠 상황이 급변하며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도겸은 평소에 생각만 하고 하지 못한 것들을 틈틈이 한 가지씩 하던 중이었다.
아무래도 눈을 잃어 보고 나니 깨달은 바가 컸다. 이제는 누릴 수 있을 때 최대한 누리고 후회하기 전에 해야 함을 알았다.
“평소 이 자리만 애매하게 비어 있는 게 이상하지 않더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동생이 태어나면 심겠다, 그리 말씀하시며 비워 두신 자리였거든.”
“이상할 게 있나? 그냥 뭐든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한마디로 그러려니 했다는 거다. 도겸은 그저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너는 수업이 다 끝난 것이냐? 오늘은 무얼 배웠느냐?”
“그냥 차 마셨어. 조금 이따 침모 온다고 어디 가지 말래.”
“‘그냥’이 된 것을 보니 많이 익숙해진 모양이구나. 처음엔 인사하는 것도 어려워하더니.”
“네 소원이 걸린 일이니까.”
구덩이를 다 채우고 손으로 다지던 도겸이 멈칫했다. 청은 저만치에 있는 샘물을 끌어와 묘목 위에 비처럼 뿌려 주었다.
“근데 내가 죽는다는 조건 말이야. 다른 의미가 있는지 찾아본다고 했잖아.”
“…아, 그랬지.”
도겸이 미처 그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청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 뭐, 오자마자 누명 써서 바쁘겠지. 그만큼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아니, 한양에 오자마자 찾아보고는 있었다. 말했듯이 이렇다 할 성과가 없을 뿐.”
“노력이 가상하긴 한데, 아마 없을 테니까 더 찾지 마.”
“…뭐?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말만 들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겸이 홱 고개를 돌려 청을 바라보자 물 주기를 멈추고 젖은 나무를 손끝으로 툭 건드리던 청이 무심히 도겸을 마주 보며 답했다.
“이제 알았거든. 나 스스로 찾아야 하는 답이라는 걸.”
“그 말은 곧….”
“응.”
자리에서 일어난 청이 치맛단을 털어 내며 덧붙였다.
“대충 답을 찾은 것 같아.”
도겸은 흙투성이가 된 손을 하고서 엉거주춤하게 따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답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런데 보통은 곧장 말해 주었을 여인이 어째선지 말을 아끼며 돌아서 버리는 게 아닌가.
“확실해지면 말해 줄게. 그러니까 넌 네 숙부님 구하는 일에나 매진하라고.”
“아니, 왜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가 버리는 것이냐?”
손을 어디 닦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뒤따르는 도겸에게 새침하게 돌아선 청이 눈을 흘겼다.
“너도 그랬잖아.”
“내가 뭘?”
“확실해지기 전까지 혼자만 알고 있었잖아.”
설마, 죽은 국무를 홀로 만나고 왔던 일을 말하는 것인가.
“…허?”
기억력이 좋은 건 알았지만 그런 탓에 청은 종종 이렇게 기습적으로 허를 찔러 왔다. 경악한 도겸이 입만 떡 벌리고 바라보았다. 청은 사뿐사뿐 다시 안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
그러다 우뚝 멈춰 선 청이 돌아섰다.
“이무기는 어떻게 됐어?”
대뜸 물어온 질문은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얼이 빠져 있던 도겸을 즉각 정신 차리게 했다.
“…아, 저하께서 전해 주신 바에 따르면 회복이 좀 필요한 것 같더구나. 당분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듯한데.”
“앞으로는 그런 흉흉한 무기, 쓰지 마. 이무기도 함부로 공격하지 말고.”
“하지만 네가 그리 위험한데 어찌….”
“네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너야말로 네 기준으로 생각해서 거기서 그리 힘을 쓰다가 쓰러지지 않았느냐.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너는!”
“그게 너한테, 이 땅에 필요한 거라고 했으면서 왜 그렇게 열을 내는데?”
“…뭐?”
지독히 투명한 청의 말은 보이지 않는 얼음창이 되어 도겸을 푹 찔렀다. 도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때, 청이 제 할 말을 다했다.
“떠밀리듯 죽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내가 죽을 자리는 내가 정할 거라고.”
“…….”
“그리고 네가 또 이무기를 죽이려 할까 봐 해 주는 말인데 그 덜떨어진 이무기, 아버지 죽이려 하지 않았어.”
“그게 무슨 말이냐. 분명히 이무기는 숙부님을 해하기 위해 금부옥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을 기절시키기까지 하면서 침입하였지 않느냐?”
비슷한 일은 이전에도 있었다. 언이 직접 추포한 증인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을 때도 옥사를 찾은 가족이 사식을 건넨 이후에 일이 터졌다지 않았나. 도겸이 전혀 믿지 못했지만 청은 고집스럽게 이무기를 싸고돌았다.
“옥사 안으로 이무기가 가져간 음식엔 아무런 독도 들어 있지 않았어. 이무기는 단순히 아버지에게 멀쩡한 음식을 먹이려 하고 있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조익환을 따르는 이무기가 숙부님의 끼니를 챙기려 옥사에 침입하였다고?”
도저히 청의 주장을 납득할 수 없었다. 도겸은 답답했지만 부디 전처럼 오해가 빚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제 생각을 풀어서 설명했다.
“물론 네 말대로 이무기가 멀쩡한 음식을 가져갔을 수도 있다. 하나 내가 보기엔 그저 숙부님의 경계를 허물고자 처음 한두 번 멀쩡한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을 마침 네가 본 게 아닐까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