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40)화 (125/197)

“죽여 주십시오. 소인은 더 이상 살아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리!”

“어느 안전이라고 죄인이 그만 죽여 달라, 스스로 생사를 결정한단 말인가!”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뽑은 도겸이 행랑아범의 목을 겨누었다.

“왜, 내 부모를 죽여 놓고 부모처럼 돌보니 어디 그 죄책감이 좀 줄어들었나? 그래서 그리 겁도 없이 구는 것인가?”

“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나리! 소인은 그저 그렇게라도 나리께서 분이 풀리신다면!”

“그 입 닥치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도겸이 검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칼날이 행랑아범의 목에 닿는 일은 없었다.

“어디 감히, 사람을 지키기 위해 대대손손 물려 내려온 가문의 보검에 죽겠다 말하는가?”

빛을 보았던 검날은 다시 검집 안으로 사라졌다. 검을 갈무리한 도겸이 가까스로 분노를 억눌렀다.

“내 손으로 자네를 죽일 일은 없을 것이네. 자네는 지금껏 그래 왔듯 평생 내 집을 지키고, 쓸고, 닦고, 돌보아야 해. 내 부모님의 신위를 모신 사당 앞을 지날 때엔 고개조차 들어선 안 돼.”

“…….”

“그러니 지금은 내 집을 떠나 있게.”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행랑아범이 입을 달싹이다 간신히 되물었다.

“…어찌, 그런 명을 내리시는 것입니까?”

“조익환이 겁박한 것이 아닌가? 아마도 청이의 약점을 찾아내라거나, 이무기의 여의주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를 알아내라든지 따위로.”

그런 와중에 놀라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정확하게 짚은 모양이었다. 아마 입을 열지 않아 나름 고초를 당한 것일 게 뻔했다.

“하, 하지만 소인은 결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더군. 그건 이미 내 상단의 사람에게 들어 알고 있네. 그 뒤로 조익환이나 이무기가 취한 행동을 보아서도 알 수 있고.”

“…….”

“하나 자네는 내 집에서 평생을 노역해야 하지 않나? 일손이 죽어 버리면 내게 얼마나 손해겠는가 말이네.”

답답함을 느낀 도겸은 창가로 가 창을 벌컥 밀어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원한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지만 개운하진 않았다. 다시 돌아와 미리 적어 둔 서신들 중 하나를 찾아낸 그가 행랑아범의 앞에 내던졌다.

“그러니 당분간 그 목숨 함부로 버릴 생각 말고 한양을 떠나 있게. 봉투에 적힌 곳으로 찾아가 그 서신을 전하곤 하라는 대로 따르고.”

“나리… 나리께선 어찌.”

“어떤 것을 묻든 알려 줄 생각이 없네. 그러니 자네는 그저 닥치고 따르기만 해. 죽을 때까지.”

언젠가는 궁금한 것을 모두 해갈시켜 줄 날이 올 것이라 했겠지만, 입장이 바뀐 이상 더는 전과 같이 돌아갈 수 없을 터.

그 사실을 깨달았을 행랑아범이 납득했다는 듯 서신을 소중히 챙긴 뒤 조심스레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소인, 분부하신 대로 한양을 떠나 있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무탈하십시오, 나리.”

아마 무릎을 꿇고 앉는 것조차 버거웠을 행랑아범이 간신히 몸을 일으켜 여전히 좁은 보폭으로 조심조심 방을 나갔다.

“…하.”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도겸의 입에서 잘게 부서진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에 입술이 절로 떨렸다. 어쩐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 아….”

답답한 나머지 가슴을 퍽퍽 후려치는데 어느 순간 강한 힘에 손목을 붙들렸다.

“최도겸.”

퍼뜩 고개를 들어 보니 파리한 안색의 청이 있었다. 사방이 타들어 가던 와중에 의식을 잃고 쓰러지던 행색 그대로였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듯했다.

“…청아.”

간절히 그리운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 탓일까. 어쩐지 더욱 목이 메었다. 울컥한 나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잔뜩 갈라져 볼품없는 부름에도 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도겸의 눈에서 말간 눈물이 뚝, 떨어져 뺨을 타고 흘렀다.

“청아.”

“왜.”

어린아이처럼 돌아가신 부모님이 보고 싶고, 금방이라도 넘칠 듯 마음에 넘실대는 네가 보고 싶었다는 말이 입 안에 그득히 차올랐다. 그러나 어쩐지 온전한 말로 완성할 수가 없었다.

“청….”

기어이 무방비한 청을 당겨 품에 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얼음장 같은 몸을 끌어안으니 차라리 타들어 가는 속이 조금은 식는 듯해서 좋았다.

이제는 품에 안는 게 따뜻하다면 더 어색할 것 같았다.

“뜨거워.”

“조금만.”

청은 변함없이 불평했지만 도겸은 반대로 두 팔에 더 힘을 주어 안을 뿐이었다. 깨끗한 물처럼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그렇게 도겸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다.

“조금, 조금만….”

청은 도겸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불편하다 작게 투덜거린 게 전부였다.

그래, 그것이면 되었다, 도겸이 그리 생각할 즈음이었다. 청이 도겸의 등을 가볍게 툭툭, 다독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울게 내버려 둔 거, 순이한테는 비밀이야.”

그리곤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순이는 작아서 울면 뒷마당 나무에 매달아 버리기 쉽지만, 너는 쓸데없이 커서 그 작은 나무에 매달아지지도 않을 거라 그냥 두는 거니까.”

“…….”

“그러니까, 그 애한텐 말하지 마.”

청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며 어색하게나마 등을 툭툭 다독였다.

어쩐지 그 행동에 저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터졌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도겸은 청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놓아줄 수가 없었다.

영영 놓아주고 싶지 않아서, 정말이지 큰일이었다.

***

어쩐지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도겸은 자려다 말고 밖으로 나와 사랑 마당을 서성이다 내친김에 집을 한 바퀴 돌았다.

가솔들이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살풍경하던 집은 금세 원상복구되어 있었다. 비운 적 없는 집처럼 곳곳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나리?”

집을 한 바퀴 돌고 마구간까지 가서 말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나오는데 마침 집 안 곳곳의 아궁이를 살피러 다니던 남산댁과 마주쳤다.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주무시지 않고 나오신 것입니까.”

“아… 잠이 오지 않아 한 바퀴 돌던 참이네.”

“따뜻한 차라도 한잔 올릴까요?”

“되었네. 하루 종일 손에 물을 묻혔을 터인데 어찌 또 부엌엘 들어가려고 하는가.”

“그럼 술 한 잔은 어떠십니까.”

넌지시 권하는 말에 도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끼리 마시면 청이가 우릴 가만 두겠는가?”

“다치셨다던 분이 아까 저녁나절에 술을 두 병이나 해치우신 건 아십니까?”

“어… 그랬나?”

행랑아범이 집을 비운 틈에 당분간 집안일을 도와줄 일꾼을 구하기 위해 직접 한양 지부의 흑매향 상단에 다녀오느라 미처 알지 못했다.

그것도 모르고 상단에서 선물로 받은 술을 고스란히 가져다주었건만, 뻔뻔하게도 청은 술을 마시지 않은 척 날름 그걸 받아 마신 것이었다.

“그나마도 놈들이 집을 뒤질 적에 고이 모셔 놨던 술을 어찌나 많이 깨부수고 갔는지, 그거 아신 아씨께서 노발대발하며 술병 깬 놈들을 잡으러 가겠다고 하시는 걸 말리느라 얼마나 고생이었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말린다고 말려질 정도는 되었으니 기특하다 여겨야 할지, 술에 빠져드는 모양새를 경계하라 잔소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겸은 작게 웃고 말았다.

“순이는 자는 것인가?”

“그 아이는… 행랑아범이 먼 길을 떠난다 할 때부터 울다 조금 전에 겨우 잠들었습니다.”

내내 아이를 달랬는지 남산댁이 한 손을 들어 반대편 어깨를 주물렀다. 도겸은 웃음기를 잃은 채였다.

“…잘하신 것입니다, 나리.”

멍하니 앞만 보며 걷는데 문득 남산댁이 도겸을 위로했다.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대화를 이어 나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사실 아직 모르겠네. 처음에 만났을 때 죽였어야 했던 걸지도.”

“나리께선 듣고 싶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언젠가부터 이 댁의 주인마님이셨던 분들의 기일이 다가오면 어디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던 행랑아범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에서 몇 년쯤을 지냈을 무렵, 그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요.”

“행랑아범이 이야기를 하던가?”

“그네가 먼저 말을 하였겠습니까? 제가 요령 좋게 뜯어낸 것입니다.”

도겸과 나란히 걷던 남산댁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나리께선 듣고 싶으시지 않겠지만, 소인은 알려 드리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생각됩니다. 들으시겠습니까, 나리?”

뭔가 사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연민을 갖게 될지도 모르지 않나. 듣고 싶지 않았지만 부끄럽게도 청에게 안겨 엉엉 울고 나니 조금은 후련한 마음도 드는지라 이리 차분한 밤이라면, 또 전하는 이가 남산댁이라면 왠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해 보게.”

그래서 허락하고 말았다. 돌고 돌아 다시 사랑 마당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마루에 걸터앉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처마 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행랑아범은 어려서부터 조익환의 집안에서 긁어모은 땅 어딘가에 소작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하더군요.”

도겸은 가만 귀만 열어 두고 있었다. 남산댁도 곁에 있는 이가 굳이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쭉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한데 어느 날부터 아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답니다. 변변찮은 살림으로는 병구완을 할 수가 없어 마름에게 사정을 해 봤지만 턱도 없던 모양이고, 결국 지주를 찾아가게 된 것이지요.”

사람 모여 사는 곳이라 사정도 대강 예상한 바와 같았다.

“그런데 마침 조익환은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 줄 사람들을 모으고 있던 것입니다. 행랑아범에게는 아내를 용한 의원에게 데려다 큰돈을 들여 치료 중이라면서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가담시킨 것이고요.”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을 터.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여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어지간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건 연민이나 동정이라기보다는 수년간 자연스럽게 행랑아범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아 왔기에 드는 자연스러운 공감이었다.

이러한 사연을 듣게 되면 결국 실행한 사람보다는 약점을 잡아 교사한 자에게 원한이 더 커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눈 딱 감고 일을 저지르고 돌아와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아내는 한양에 데리고 왔을 즈음 이미 죽어 제대로 묻히지도 못하고 썩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요. 따져 봤지만 최선을 다한 것이라는 답만 겨우 듣고….”

“…….”

“한데 그 아내의 배 속에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까지 있던지라, 아범은 한 번에 둘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어진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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