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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39)화 (124/197)

“제가 장부를 보며 느낀 위화감의 원인을 이 아이가 정확히 짚어 준 듯합니다. 숙부께선 중요한 문서라 하여도 도통 초안을 미리 적어 보는 법이 없이 일필휘지로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 때문에 종종 잘못 쓴 글자도 나오는 편인 데다….”

도겸은 점희에게서 건네받은 장부의 앞뒤를 다시 비교하며 목소리에 확신을 담았다.

“이 장부가 날조됐음을 보여 주는 가장 큰 증거는 작년 즈음, 숙부께서 훈련 도중 손목을 한 번 크게 다치셨던 이후로 손에 힘이 부쩍 줄어들어 전과 같은 필체는 정확히 구사하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을 시킨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나?”

언이 트집을 잡았지만 도겸은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요. 제가 알기론 숙부의 최측근 중 이런 필체를 쓰는 이는 숙부님 말고는 없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몇 년간 숙부님 댁에서 지내며 이런저런 일을 도왔던 터라 자주 보아 알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기억을 되새기던 도겸이 확신하듯 고개를 저었다.

“거기다 숙부님은 가까운 사람을 함부로 들이거나 내치는 분도 아닙니다. 그렇다 하여도 정기적으로 저와 주고받는 서신에 반드시 알리셨으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럼 자네가 평소 심 목사와 주고받은 서신을 반증으로 내세울 순 없겠나?”

“그것은 어렵습니다. 저는 모든 서신을 확인하는 즉시 불태워 없애는지라.”

언제 어디서 트집을 잡힐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남기지 않았던 것인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단순히 서신이나 다른 기록을 남겨서 문제가 생길 줄 알았던 도겸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거참, 어찌 그리 사람이 매정하단 말인가. 혹, 연정이 담긴 서간을 받아도 그랬나?”

틈새를 놓치지 않고 언이 도겸을 놀리려 들었다. 그러나 도겸은 다분히 진지하게 대꾸했다.

“제게 서신을 보낸 여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혼인을 하였는데 그럼 태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구태여 그 마음들을 일일이 모아 보관하는 건 여인들에게도, 그 여인이 둔 지아비에게도 할 짓이 못 된다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알 게 뭔가? 어차피 그것도 두고 보면 다 추억일 뿐인데. 이루어지지 않고 혼인을 한들, 그 순간의 연정이 없던 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언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사소하게 틀어진 주제로 한세월을 갑론을박하게 되지 않나.

“하지만 그것이 자칫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저어.”

기어이 눈치를 보던 점희가 조심스레 끼어들어서야 무의미한 싸움이 끝이 났다.

“소인이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 그, 그래! 어서 해 보거라.”

언이 부자연스럽고 과장하는 투로 허락했다. 두 남자는 머쓱한 나머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헛기침을 하며 식은 찻물을 들이켜거나 이미 바른 자세를 다시 곧추세웠다.

“이번 기회에, 소인이 자백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둘은 금세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번… 기회라니.”

“반증으로 내세울 증좌가 없다면 소인이 지난 연쇄 살인 사건과 더불어 이번 사건의 증인으로 나서는 게 좋을 듯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도겸의 반문을 이해한 점희가 움찔 놀라 두 손을 마구 저었다.

“물론 좋은 일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저 지금이 가장 적기라 생각되는데… 두 분께선 어찌 생각하는지요.”

어린 소녀의 말에, 세자와 신하의 눈빛이 다시 침잠했다.

그저 한숨만 이는 순간이었다.

***

“나리, 소인을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언이 석강을 위해 궐로 돌아간 뒤, 도겸은 행랑아범을 사랑으로 불렀다. 방으로 들어온 행랑아범은 점희처럼 잔뜩 주눅이 든 채였다.

“그래, 이리 가까이 오게.”

눈을 뜨고 나니 밀린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게 제일 먼저 보였다. 우선 급한 서신들을 적어 나가던 도겸이 붓을 내려놓으며 행랑아범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곤 조심히 무릎을 꿇고 앉는 수더분한 남자를 가만 바라보았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겠네. 자네가 내 말에 따라 주길 바라는 일이 있어 부른 것이네.”

“예? 제가 언제 나리의 말씀에 불복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저 명하시면 소인은….”

“내가 부를 때까지 당분간 도성을 떠나 가능한 한 멀리 가 있게.”

떠나라는 말을 듣자마자 대경한 행랑아범이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키웠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리! 소인이 없으면 이 집의 일은 누가 돌보고요?”

“돌볼 사람이야 새경을 주면 누구든 구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네.”

그러나 도겸은 여전히 차분할 뿐이었다. 언젠가 순이를 해주에 보내려 했을 때와 같았다.

“아니, 새경을 주면서 사람을 또 구하려 하시면서 어찌 소인을….”

“자네 얼굴에 그 상처, 넘어져서 생긴 게 아니지 않나.”

그때처럼, 도겸은 아주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행랑아범의 낯빛이 퍼렇게 질렸다.

“어,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아씨께 들으신 것입니까? 이것은 그저….”

바닥을 짚은 거친 손마저 벌벌 떠는 게 보였다. 덥수룩한 수염이 자리한 입가도 경련했다.

그 모든 반응을 지켜보는 사람 또한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도겸은 긴 한숨 끝에 나직이 덧붙였다.

“자네가 평소 이 집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는지 내 속속들이 다 알진 못해도, 알지 못하기에 더 자네의 노고가 크다는 것까지 너무 잘 알고 있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게 내 부모님을 해친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도.”

“나, 나리. 어찌 그런 말씀을….”

행랑아범이 입을 떡 벌리며 주춤했다. 아마도 도겸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듯싶었다.

“아무리 내가 눈이 멀었었다지만 어린 시절에도 장님이었던 건 아니지 않나?”

나직하고 단정한 어조였으나 그 눈빛까지 정갈하진 못했다. 행랑아범을 응시하는 도겸의 눈에 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분노가 까맣게 타올랐다.

“내 기억력은 자네 생각보다 더 좋은 편이지. 그날 밤 도망치던 자네의 뒷모습 그리고 다친 다리가 어느 쪽인지도 아직 선명히 기억해. 그만한 상처는 후에 부작용이 얼마나 남을지도 여러 의서를 읽으며 가늠할 수 있고.”

석상이 된 듯이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는 행랑아범에게 도겸은 점잖지만 단호하게 덧붙였다.

“6척까진 아니더라도 제법 큰 키에 속한 자네가 그리 보폭이 짧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쪽 다리를 편히 뻗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참을 굳어 있던 행랑아범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하면, 눈치채셨으면서 어찌 소인을 살려 두신 것입니까.”

고통과 분노가 아예 수그러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배가되어서 청이 늘 불결하다 욕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겸은 화가 난다고 하여 반드시 그 즉시 분출하지 않는 법을 아주 오래도록 익혀 온 뒤였다.

“처음엔 어떻게 더 고통스럽게 복수할까 고민하느라.”

“…….”

“그다음엔 당연히 조익환에게 내 일을 낱낱이 보고할 것이라 여겼건만 어찌하여 아무런 짓도 하질 않는지 의아했고.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 번이면 족하니 사소한 것들이야 넘겨도 그만이라 여기며 더 지켜보긴 했다만….”

말끝을 흐린 도겸이 서안 아래로 재차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기엔 자네가 지나치게 내게 헌신하더군. 자네 덕에 따뜻하지 않았던 겨울이 없었고, 시원하지 않았던 여름이 없으니 말이야. 물론 그런 노력마저 조익환을 위해 묵묵히 감내했으리라, 그리 여기니 자네의 수고로움은 내게 있어 의심만 더 가중시킬 뿐이었어.”

순간 뜨끔한 통증에 도겸이 손을 펼쳤다. 손바닥에 기어이 가는 초승달 모양의 생채기가 남고 말았다.

“…그런데 문득, 어쩌면 지금껏 조익환은 자네가 내 집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리고 얼마 전 내 집에 왔을 때서야 마주쳤다면.”

“…….”

“그렇다면 지금 그 얼굴에 그런 상처가 남은 것이 과연 우연히 넘어져서만은 아닐 텐데, 하는.”

청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알았을 때 도겸은 사실 행랑아범의 존재 때문에 조익환이 빠르게 움직일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기껏 마음을 먹은 것과 달리 예상이 빗나갔다. 행랑아범은 더 문을 굳게 닫아걸고 행동거지를 살폈으니까.

“…송구합니다, 나리.”

행랑아범은 결국 고개를 숙인 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잡아뗄 수도 있다 여겼건만, 생각보다 인정이 빨랐다.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자네가 어떤 사정으로 내게 와 홀로 긴 속죄의 시간을 거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를 용서할 생각이 없네.”

오래도록 삼켜 왔을 울음을 터트린 행랑아범이 뒤늦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용서받고자 이 집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리께서 한양 서촌으로 돌아와 다시 집을 짓고 가문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소인은 사실 목숨을 내놓기 위해 문을 두드렸던 것입니다.”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가족의 죽음이 정당화되진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겸은 행랑아범에게 변명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건 어쩔 수 없이 함께한 세월이 길어질수록 쌓인 정 때문이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여겼건만 기어이 적은, 정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제 목을 치셔야 할 나리께서 너무 마르고 작은 소년에 불과하신 것을 보니… 그 마른 손을 보니 차마….”

“…….”

“그래서 저 팔뚝이 내 목을 칠 정도로 단단해지기만 하면, 그때 이실직고하자는 생각으로 집의 일꾼이 되고 싶다 청했던 것입니다. 그게, 그게 너무 길어졌을 뿐….”

울 자격도 없다 여겼는지 거칠게 눈물을 훔쳐 낸 행랑아범이 벌떡 일어나 방 한편에 놓여 있던 보검을 들어 도겸의 앞에 놓아 주었다.

“이제 소인을 살려 두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죽이십시오.”

가만 보검을 내려다보는 도겸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지금, 무어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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